소주와 신문 ‘닮은꼴 시장 판도’는 1도1사 체제 산물

정부가 병마개·주정 독점 공급체제 만들어 세원 장악

윤전기 도입·용지 배급 권한도 틀어쥐고 신문사 압박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국민주로 꼽히는 진로소주가 탄생 100돌을 맞았다. 1924년 10월 3일 장학엽이 동업자 홍석조 강기욱과 함께 평남 용강군 진지동에서 진천(眞泉)양조상회를 세우고 알코올 도수 35도의 증류식 소주를 출시한 것이 기원이다. 진로소주의 심벌 두꺼비는 오랜 기간 애환을 함께한 애주가의 친근한 벗이었고, 한류 드라마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녹색병 속 액체는 전 세계인이 마셔보고 싶어하는 선망의 대상이 됐다.

 

진로 역사 1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며 소주 회사들의 부침과 시장 판도를 들여다보면 자연스럽게 신문업계가 연상된다. 박정희 정권의 유산인 1도1주(一道一酒) 시대와 전두환 정권이 만든 1도1지(一道一紙) 원칙은 소주와 신문의 품질을 획일화하는 동시에 시장을 서울과 지방 이원 체제와 군웅할거식 지역 독점구도로 만들었다. 정부가 각각 주정과 신문용지 배급권을 쥐고 소주회사와 신문사들을 어르고 달래온 것도 유사하다. 사주들은 명줄을 쥐고 있는 정권에 고분고분할 수밖에 없었고 이 과정에서 갑자기 사라진 비운의 업체도 있었다.

 

시대별 진로소주 병과 상표. 맨 왼쪽이 원숭이표 진로. 왼쪽 첫 번째와 두 번째에는 벼 이삭이 그려져 있다가 이후 빠졌다. 맨 오른쪽은 최근 출시된 진로 골드. 
시대별 진로소주 병과 상표. 맨 왼쪽이 원숭이표 진로. 왼쪽 첫 번째와 두 번째에는 벼 이삭이 그려져 있다가 이후 빠졌다. 맨 오른쪽은 최근 출시된 진로 골드. 
하이트진로가 창립 100주년을 맞아 1만9240병만 생산해 한정 판매한 일품진로 1924 헤리티지 100주년 에디션.
하이트진로가 창립 100주년을 맞아 1만9240병만 생산해 한정 판매한 일품진로 1924 헤리티지 100주년 에디션.

평남 진지군에 최초로 세워진 한국인의 소주 공장

진로에 앞서 이미 1919년 6월과 10월에 일본인들이 평양과 인천에 각각 조선소주와 조일양조를 설립하고 희석식 소주를 대량생산하고 있었다. 안동소주처럼 가양주(家釀酒)로 증류식 소주를 빚는 집은 많았으나 한국인이 양산 체제를 갖춘 공장을 차린 것은 진로가 처음이었다. 희석식은 주정(酒精·에틸알코올)에 물과 첨가물(감미료)을 넣어 묽게 한 술이다. 그래서 소주의 한자도 술 주(酒) 대신 ‘세 번 빚은 술’이란 뜻의 주(酎)를 쓴다. ‘세 번 이상 연속증류해 고순도 주정을 뽑아낸 뒤 희석했다’는 뜻을 담았다. 진로는 증류식이었으나 처음부터 한자를 소주(燒酒)가 아닌 소주(燒酎)로 썼다.

장학엽은 제품명을 진로로 정했다. 생산지인 진지(眞池)의 앞 글자인 참 진(眞)에다 소주를 증류할 때 술방울이 이슬처럼 맺힌다는 의미로 이슬 로(露)를 붙였다. 이는 1998년 새로운 브랜드 참이슬이 나오기까지 소주를 대표하는 이름이었다.

 

1954년(단기 4287년) 신문에 실린 진로소주 광고. 순곡주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1954년(단기 4287년) 신문에 실린 진로소주 광고. 순곡주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진로는 해마다 생산량을 늘렸지만 동업자들과의 불화와 만성적인 자금난으로 3년여 만에 간판을 내렸다. 장학엽은 새로운 동업자를 만나 1928년 회사를 재건한 뒤 자리를 잡아나갔다. 그러나 6·25 전쟁이 터지고 숙청 대상으로 몰리자 월남했다. 장학엽은 부산에서 동업자들과 동화양조를 설립하고 금련(金蓮)이란 이름의 소주를 출시했다. 1952년 독자적으로 구포양조회사를 세워 낙동강(洛東江)을 선보였다가 1954년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 서광주조를 창업해 진로란 이름으로 돌아왔다.

“야야야 차차차~” CM송 타고 인기 치솟은 신길동 두꺼비

1959년 선보인 우리나라 최초의 CM송 ‘진로 파라다이스’의 애니메니션 배경화면. 동생 신동우와 함께 형제 만화가로 잘 알려진 신동헌의 작품이다.
1959년 선보인 우리나라 최초의 CM송 ‘진로 파라다이스’의 애니메니션 배경화면. 동생 신동우와 함께 형제 만화가로 잘 알려진 신동헌의 작품이다.

소주의 또다른 대명사인 두꺼비는 신길동 시절부터 진로의 얼굴이 됐다. 전에는 심벌이 원숭이였다. 평안도에서는 원숭이가 복과 지혜를 상징하는 동물이었으나 남부 지방에서는 부정적 이미지가 강했다. 장학엽은 “떡두꺼비 같은 아들만 하나 낳으라”는 덕담에 착안해 두꺼비로 바꿨다고 한다. 두꺼비는 전래동화 콩쥐팥쥐 등에서도 영물로 등장한다.

1959년에는 국내 최초의 CM송인 “야야야 야야야 차차차~”로 시작하는 ‘진로 파라다이스’ 광고를 신동헌의 애니메이션과 함께 선보여 인기 브랜드로 떠올랐다. 1954년 0.5%에 지나지 않던 시장점유율이 10년 만에 10.1%로 치솟았다.

 

1959년 2월 29일 열린 진로 창립 30주년 기념 사은 복금(福金) 추첨식. 그때는 창립연도를 1928년으로 계산했다.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장학엽 창업주. 
1959년 2월 29일 열린 진로 창립 30주년 기념 사은 복금(福金) 추첨식. 그때는 창립연도를 1928년으로 계산했다.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장학엽 창업주. 

1965년 정부는 양곡관리법을 시행하며 수출용을 제외하고 증류식 소주의 국내 판매를 금지했다. 식량 부족 사태를 막으려는 고육책이었다. 증류식 소주의 주원료는 쌀이었는데, 쌀이 귀해지고 수입 밀이 흔해지자 밀로 대체하는 경우도 있었다. 곡물로 술을 빚지 못하게 한 조치는 1940년 일제가 물자 절약을 이유로 조선인이 발간하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자진 폐간하도록 압력을 넣고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만 남겨 놓은 것과 유사하다.

이에 따라 진로도 희석식으로 전환했다. 희석식 소주 제조는 고구마로 만든 주정에 향신료와 물만 타면 되는 단순한 공정이어서 우후죽순격으로 소주공장이 생겨났다. 1970년대 초에는 400여 개를 헤아릴 정도로 난립했다. 상표 라벨에 있던 벼 이삭 그림도 지워버렸다.

양곡관리법은 막걸리 시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전까지 추운 북부 지방에는 소주, 따뜻한 남쪽 지방에는 탁주(막걸리)가 인기를 끌고 있었으나 쌀 대신 밀가루로 막걸리를 빚자 맛이 달라져 값싸고 깔끔한 희석식 소주가 서민주로 자리잡았다.

박정희의 김대중 미움이 극에 달할 때 퇴출당한 목포 기업 삼학

이전투구식 각축전에서 소주시장의 패권을 차지한 것은 삼학(三鶴)이었다. 삼학소주는 극작가 차범석의 부친 차남진, 윤심덕과 현해탄에 투신한 김우진의 형 김철진, 가수 남진의 부친 김문옥이 1947년 설립한 목포양조가 전신이다. 1950년 김문옥의 동서 김상두(남진 이모부)가 인수한 뒤 업체명과 상품명을 목포의 명소 이름을 따 각각 삼학양조와 삼학소주로 바꿨다. 1960년대 말 주류 시장에서는 삼학, 진로, 백화가 삼파전을 벌이고 있었다. 소주에서는 삼학, 청주에서는 백화가 1등이었다. 매출 규모는 삼학이 진로의 갑절이었다. 두꺼비가 두루미(학)에 맥을 못춘 것이다.

진로는 서울 남산 등지에서 돗자리를 갖고 다니며 소주를 판매하는 행상을 판촉 요원으로 활용한 ‘밀림의 바 작전’, 소비자가 병마개(병뚜껑)를 모아오면 보상해주는 ‘왕관 회수 작전’, 병마개 안쪽에 그려진 두꺼비를 찾는 경품 이벤트 등으로 삼학과의 간격을 차츰 좁혀나갔다.

두꺼비와 두루미의 숨막히는 승부는 어이없게 마무리됐다. 1971년 11월 삼학의 김상두 사장 등 9명이 납세증지를 위조해 세금을 포탈했다는 혐의로 구속됐다. 김 사장은 최종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추징금 3억 2000만 원을 선고받고 삼학양조는 1973년 최종 부도처리됐다.

삼학소주 납세필증 위조 사건을 보도한 1971년 11월 25일자 조선일보 7면. 왼쪽 사진은 검찰에서 조사를 받던 김상두 사장이 부축을 받으며 화장실에 가는 모습이다. 
삼학소주 납세필증 위조 사건을 보도한 1971년 11월 25일자 조선일보 7면. 왼쪽 사진은 검찰에서 조사를 받던 김상두 사장이 부축을 받으며 화장실에 가는 모습이다. 

항간에서는 1971년 7대 대통령선거 때 삼학이 목포를 기반으로 한 김대중 후보에게 정치자금을 댔다가 박정희 정권의 미움을 사 세무조사를 당했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1961년 2월 민족일보를 창간했다가 5·16 군사정변 이후 북한을 이롭게 한 혐의로 혁명재판부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그해 12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조용수가 떠오른다. 그는 과거사위원회 결정과 재심을 거쳐 2008년 무죄를 선고받아 명예를 회복했다.

부산일보와 부산MBC의 사주 김지태도 박정희에게 미운털이 박힌 탓인지, 언론사를 소유하려는 박정희의 욕심 때문이었는지, 1962년 재산 해외 도피 등의 혐의로 구속된 뒤 강압에 못 이겨 주식을 5·16장학회에 넘겨주고 말았다.

 

1961년 12월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사형 집행 직전 모습.  
1961년 12월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사형 집행 직전 모습.  

술꾼 아닌 국세청이 각 소주회사 생산량을 정했던 시절

삼학이 퇴출된 뒤 진로는 도수를 30도에서 25도로 낮추고 독주 체제를 굳혔다. 이때부터 25년간 ‘소주=25도’라는 등식이 정착됐다. 23도의 참이슬을 시작으로 도수 낮추기 경쟁이 본격화한 것은 1990년대 말 이후의 일이다.

소주가 서민의 사랑을 받자 정부는 지역경제 육성, 과당경쟁 방지, 품질 관리, 소비자 보호 등을 내세워 소주시장에 적극 개입하기 시작한다. 각각의 명분이 허울뿐인 것은 아니었으나 가장 큰 목적은 주세의 효율적인 징수였다.

 

두꺼비가 안에 그려진 병마개를 찾는 사람에게 승용차, 냉장고, TV 등의 고가 경품을 선사한다는 내용의 1971년 진로 광고. 이때는 창립 연도를 1924년으로 계산했다.   
두꺼비가 안에 그려진 병마개를 찾는 사람에게 승용차, 냉장고, TV 등의 고가 경품을 선사한다는 내용의 1971년 진로 광고. 이때는 창립 연도를 1924년으로 계산했다.   

국세청이 맨 처음 주목한 것은 병마개였다. 병마개를 독점 공급하도록 하면 출고량을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세법과 시행령에 근거를 마련한 뒤 1965년 창업한 삼화왕관을 1972년 납세 병마개 제조업자로 지정했다. 이후 세왕금속(85년), CSI코리아(2010년), 신성이노텍(2011년)을 추가로 지정했으나 지금도 여전히 삼화왕관이 독보적이다.

소주의 주정도 정부가 공급량을 제한했다. 1974년 주세법에 도입한 주정배정제에 따라 국세청이 소주업체별로 연간 주정 공급량을 정해 주정회사로 하여금 이 범위에서만 공급하도록 했다. 국세청은 전년도 업체별 출고량을 기준으로 해마다 주정 공급량을 정했으나 이를 둘러싸고 뒷말이 적지 않았다.

주정 공급은 1972년 설립된 대한주정판매에 독점하도록 했다. 대한주정판매는 창해에탄올, 진로발효, 일산실업, 서영주정, 풍국주정 등이 생산한 주정을 일괄적으로 사들인 뒤 소주업체에 판매한다. 소주 주정의 주원료는 카사바(열대고구마)에서 추출한 타피오카다. 주정배정제는 자유시장 경제원리에 어긋난다는 지적에 따라 1982년 일부 해제된 데 이어 1993년 폐지됐지만 대한주정판매의 주정 독점 공급은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조선일보 사장, 포항 앞바다 석유 찍어 맛 본 덕에 윤전기 얻어

박정희 정권은 신문시장에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개입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윤전기 수입 허가였다. 신문을 고속으로 찍어내는 윤전기는 첨단기술이 집약된 기계여서 매우 비쌀 뿐 아니라 지금도 독일과 일본만 생산하고 있다. 정부는 외화 낭비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윤전기를 마음대로 사들이지 못하게 했다.

1976년 박정희 대통령이 언론사 사장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포항 앞바다에서 시추한 석유라며 병 안에 든 기름을 돌렸을 때, 다른 사장들은 코를 대고 냄새를 맡는 것에 그쳤으나 방우영 조선일보 사장은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본 뒤 “정말 진짜 석유”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며칠 뒤 1년 가까이 보류돼오던 조선일보의 윤전기 도입 허가 요청서에 결재가 떨어졌다고 한다.

윤전기는 1987년 언론기본법 폐지 이후로도 신문시장의 진입장벽으로 작용했다. 정기간행물법에 일간신문을 발행하려면 윤전기를 보유해야 한다는 규정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95년 정간법을 개정하며 윤전기 임대차 계약을 맺은 신문사도 등록을 허용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4년 언론윤리위원회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반대하는 신문사에 신문용지 공급을 줄이고 융자를 제한하겠다고 압박하기도 했다. 신문용지용 펄프를 수입에 의존했기 때문에 제지회사들도 정부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신문용지 시장은 세한제지(전주제지로 이름을 바꿨다가 한솔제지와 전주페이퍼로 분리), 고려제지(페이퍼코리아 전신), 대한제지 3개사가 과점하고 있다.

<※ 2주 뒤에 후속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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