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1일은 유네스코 제정 ‘국제 모어의 날’
제주어 사라지면 제주 고유 문화도 잃는다
방글라데시 탄생시킨 벵골어 지키기 운동
1947년 인도 제국은 2세기에 걸친 영국 식민통치에서 벗어날 때 종교에 따라 나라가 쪼개졌다. 무슬림이 많은 북동쪽과 북서쪽은 파키스탄, 불교를 신봉하는 실론섬은 스리랑카라는 이름으로 분리 독립했고, 힌두교가 다수인 나머지 지역은 인도로 남았다. 파키스탄은 인도 북부를 사이에 두고 국토가 갈라져 아라비아해 쪽은 서파키스탄, 벵골만 쪽은 동파키스탄으로 불렸다. 믿는 종교는 같았지만 주로 쓰는 언어는 우르두어와 벵골어로 각기 달랐다.
면적이 넓고 정치·경제력이 집중된 서파키스탄은 행정력도 장악해 우르드어를 유일한 공식 언어로 채택하는 정책을 밀어붙였다. 1947년과 1948년에 걸쳐 우표, 화폐, 군입대 시험 등에 벵골어를 배제하자 동파키스탄 주민들은 항의 시위를 벌이고 총파업에 나섰다. 이들이 내건 구호는 ‘벵골어 수호’였지만 서파키스탄의 지배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서파키스탄은 공권력을 동원해 반대 목소리를 억누르려 했고, 동파키스탄은 이에 거세게 저항하는 가운데 1952년 2월 21일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동파키스탄의 중심도시에 있는 다카대에는 아침부터 많은 학생이 모여들었다. 정문으로 진입하려는 학생들과 이를 저지하는 경찰 간의 충돌이 빚어지던 중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대학생을 포함한 시민 4명이 숨졌다. 격분한 동파키스탄 주민들은 언어 평등권 보장 투쟁을 뛰어넘어 분리 독립을 요구하고 나섰다. 기나긴 저항과 전쟁 끝에 마침내 1971년 방글라데시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쟁취했다.
방글라데시는 벵골어 투쟁의 기폭제가 된 시위가 벌어진 2월 21일을 ‘언어 수호 순교자의 날’로 지정했다. 문화 다양성을 추구해온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는 1999년 제30차 총회에서 이날을 ‘국제 모어(母語)의 날’(International Mother Language Day)로 정해 해마다 기념행사와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지구상 언어는 7168개…불평등 극심
성경 번역을 위해 소수 언어를 연구하는 기독교 언어학 봉사단체(국제SIL)의 웹사이트 에스놀로그(www.ethnologue.com)에 따르면 지난해 2월 기준으로 지구상에서 쓰이는 언어는 7168개에 이른다. 2023년 기준으로 원어민만 따지면 표준 중국어(만다린어) 사용 인구가 9억 4000만 명으로 가장 많고 스페인어(4억 8500만 명), 영어(3억 8000만 명), 힌디어(3억 4500만 명)가 뒤를 이었다.
제2외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을 포함할 경우에는 영어(14억 6000만 명), 표준 중국어(11억 3900만 명), 힌디어(6억 1000만 명), 스페인어(5억 5900만 명)로 순위가 바뀐다. 다음은 프랑스어, 표준 아랍어, 벵골어, 포르투갈어, 러시아어, 우르두어, 인도네시아어, 표준 독일어, 일본어 순이다. 한국어는 한반도와 중국 동북부·러시아 동부 등 6개국 8천 100여만 명이 사용해 23위에 랭크됐다.
영어를 쓰는 나라는 146개국에 달하지만 반대로 인구가 1000만 명 남짓한 파푸아뉴기니에는 무려 841개의 언어가 쓰이고 있다. 유럽 전역에서 쓰이는 언어의 두 배가 넘는다. 인도네시아(720개), 나이지리아(537개), 인도(458개), 미국(355개), 호주(318개), 중국(307개) 등도 많은 언어가 존재하는 나라로 꼽힌다. 반면 사용 인구가 100명에도 못 미치는 소수 언어는 500개에 가깝고 사용자가 없어 소멸한 언어도 200개가 넘는다. 전체 언어의 42.5%에 해당하는 3045개가 소멸 위기에 놓여 있다. 교통의 발달과 미디어의 눈부신 진보는 언어의 소멸 속도를 빠르게 앞당기고 있다.
독일 언어학자 피터 뮐호이저는 “오늘날 사용되는 언어들은 각 집단의 삶과 지혜와 적응의 산물로 수천 년간 노력해온 결과”라며 “총체적인 문화의 DNA를 담고 있는 한 언어가 사라지면 집단이 축적해온 지혜와 전통도 한꺼번에 자취를 감추고 인류의 문화 다양성도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제주어는 치명적 소멸 위험에 놓인 언어
에스놀로그는 남북한의 수많은 방언 가운데 다른 지역과 소통이 힘든 제주 방언은 별도의 언어로 분류하고 있다. 사이트에는 “제주어는 멸종 위기에 놓인 한국의 토착 언어로 한국어 어족에 속한다. 노인들만 모어로 사용하며 학교에서는 가르치지 않는다. 사용 인구는 1만 명 미만이다”라고 설명해놓았다.
유네스코는 2010년판 ‘위험에 빠진 세계 언어 지도’(Atlas of the World's Languages in Danger)를 펴내며 세대간 전승과 단절 정도에 따라 소멸 위험 단계를 흰색(취약), 노란색(확실한 위험), 주황색(심각한 위험), 빨간색(치명적 위험), 검은색(소멸)으로 나타냈는데, 제주어를 빨간색으로 표시했다. 국립국어원의 조사에서도 제주도민들의 제주도 말 사용률은 눈에 띄게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20~69세 성인들의 사용률은 2010년 67.8%에서 2010년 46.9%로 21.6%나 떨어졌다. 같은 기간 다른 지역에 비해 낙폭이 가장 크다.
2010년 제주대 국어문화원이 제주 중고생 400명에게 제주어 120개의 뜻을 물어본 결과 응답자의 90% 이상 이해한 어휘는 아방(아버지), 어멍(어머니), 하르방(할아버지), 할망(할머니) 4개에 불과했다.
보물섬의 보배 제주어를 지키기 위한 안간힘
제주특별자치도는 2007년 ‘제주어 보전 및 육성 조례’를 공포한 데 이어 2014년 ‘제주어 표기법’을 제정해 제주어 지키기 운동에 나서고 있다. 이에 따라 5년 단위로 제주어 발전 기본계획을 수립해 추진하고 있다. 관광해설 표지판과 관광안내 책자 등에 제주어를 병기하는가 하면 제주어 간판 달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제주어 말하기 대회, 아름다운 제주말 찾기 공모전 등도 개최하는 한편 초중생을 대상으로 한 제주어 교육과 일반인 상대의 제주어 강좌도 실시하고 있다. 올해는 고향사랑기부제 기금사업으로 제주어 보존 지원사업을 검토하고 있으며, 제주도의회는 제주어박물관 건립을 추진 중이다.
최근 들어 제주어를 제목으로 내세우거나 제주어 대사가 등장하는 TV 드라마도 잇따라 등장해 제주어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2015년 MBC의 ‘맨도롱 또똣’, 2022년 tvN ‘우리들의 블루스’와 제주MBC ‘가문잔치, 나의 탐라는 결혼’, 지난달 종영한 JTBC의 ‘웰컴투 삼달리’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방송사가 ‘맨도롱 또똣’을 ‘기분 좋게 따뜻한’이란 뜻이라고 소개하자 의미가 다르다며 항의가 빗발쳤다. 국립국어원이 나서서 ‘매지근 따뜻하다는 의미’라고 풀이했지만 논쟁은 가라앉지 않았다. 제주어는 물론 각 지역 방언에는 표준어로 옮길 수 없는 고유한 뉘앙스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제주어 전문가들은 제목의 ‘또똣’도 ‘ᄄᆞᄄᆞᆺ’으로 바꿔야 실제 발음을 그대로 살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중세 국어에 쓰이다가 사라진 아래아(ㆍ)는 ‘ㅏ’와 ‘ㅗ’ 사이의 음가를 지니고 있는데, 제주어에는 아직도 남아 있다. 아래아를 포함해 제주어를 온전히 표기할 수 있도록 컴퓨터 지원 체계를 마련하자는 목소리도 높다.
제주도 덕분에 우리나라의 관광자원과 문화유산이 풍부해졌다는 사실에는 누구나 고개를 끄덕인다. 만일 제주어가 소멸되면 육지와 확연히 구별되는 제주도의 특성과 제주도민이 오랫동안 지키고 가꿔온 고유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만다.
제주의 아이들에게 학교에서 제주어를 가르칠 필요가 있다. 제주 토박이 가정에서는 부모가 제주어를 자주 써서 자녀가 자연스럽게 익히도록 하고. 육지인들도 사투리에 대한 편견을 접고 제주어 지키기를 응원하자. 제주도가 우리 국토의 보물섬이라면 제주어는 우리 문화 생태계의 보배로운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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