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대통령, 과학수도 대전 찾아 '아무말 잔치'
당장 예산 깎여 이공계 연구원들 보따리 싸는데
“석사 80만원, 박사 110만원 빠짐없이 지급”
무슨 돈으로, 언제부터 주는지 기약도 없어
# 국내 모 대학 대학원에서 바이오 학과 석과 과정 중인 K씨는 지도교수로부터 3월까지 연구비를 받을 수 없다는 통지를 받았다. 그가 속한 연구실은 폐암과 자폐증 환자 유전자 정보를 인공지능(AI) 알고리즘으로 분석해 치료나 신약 개발을 제안하는 연구를 수행 중이다. 그가 속한 랩실(연구실)은 대형 병원과 협업하고 있다. 석사 과정 연구원은 세전으로 매달 220만 원의 연구비를 받아왔다. 그런데 정부가 올해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연구개발(R&D) 예산을 4조 6000억 원을 삭감하며 연구비 예산 집행이 지연되고 있다. K씨는 “연구비를 늦게 받는 것도 기분이 좋지 않지만 연구비가 많이 줄어든다고 해 더 걱정”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 구본경 기초과학연구원(IBS) 생명과학클러스터 유전체 교정 연구단장은 지난 15일 대덕넷에 이런 글을 올렸다.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으로 몇 년간 고락을 같이하며 손발을 맞춰오던 선임연구원이 2명이나 곁을 떠난다. 우리 연구단으로선 마치 '탑건' 같은 숙련된 연구 파트너를 잃게 됐으니 글로벌 주도권을 쥐고 있던 연구에 차질이 불가피하다.”
정부가 올해 연구개발(R&D) 예산을 삭감한 후폭풍이 거세게 불고 있다. 이공계 대학원생들이 받던 연구비가 삭감되고 중소기업과 정부출연연구소들이 수년간 연구했던 과제를 중단해야 할 상황에 몰려있다. 생활하기 힘들 만큼 수입이 줄어든 연구원들은 연구소를 떠나 해외로 나갈 방도를 찾고 있다.
이런 와중에 윤 대통령은 16일 ‘대한민국을 혁신하는 과학 수도 대전’을 주제로 열린 12번째 민생토론회에서 “우리 이공계 학생들이 학비나 생활비 걱정을 덜고 학업과 연구에 매진할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펼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연구생활장학금 제도를 도입해 국가 연구개발에 참여하는 모든 전일제 이공계 대학원생들에게 석사는 매월 최소 80만 원, 박사는 매월 최소 110만 원을 빠짐없이 지원할 것”이라며 선심 쓰듯 말했다. 이공계 대학원생들은 생활비가 모자라 연구를 접을 판인데 이런 현실을 제대로 알고 하는 이야기인지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 14일 올해 글로벌 R&D 예산을 1조 8000억 원으로 늘리고 해외 인재를 국내로 유치하기 위한 지원 서비스를 도입하겠다고 했다. 정작 국내 과학 인재들은 연구비 삭감으로 기초 생활이 힘들어 해외로 발길을 돌리려고 하는데 해외 인재를 유치하겠다는 것은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격’이다.
정부는 지난해 윤 대통령이 맥락도 없이 '과학계 카르텔' 운운하자 올해 R&D 예산을 4조 6000억 원 삭감했다. 그나마도 5조 원 이상 줄이려다가 야당 반대로 삭감액을 찔끔 줄였다. 윤 대통령은 지난 7일 사전 녹화 후 방영된 KBS 대담에서 “과학 대통령으로 국민에게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연구비가 삭감돼 연구실을 떠날 수밖에 없는 연구원들은 대통령의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지난해 9월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은 정부가 R&D 예산을 삭감하겠다고 발표한 직후 이런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윤석열 정부의 총체적인 R&D 예산 삭감은 대학원생 학생연구원의 경제적 여건을 더욱 취약하게 만드는 정책이다. 위로부터의 구조조정에서 가장 위태로운 존재는 비정규직이자 외부 인력인 대학원생 학생연구원이다.” 이들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연구실마다 예산이 줄면서 연구생들이 생활고를 호소하고 박사 후 연구원(포닥)들의 권고사직도 늘고 있다.
대학원생노조에 따르면 예산 집계가 완료된 2022년 대비 올해의 R&D 예산 삭감액은 서울대 315억 원, KAIST 349억 원, 포스텍 57억 원, 연세대 90억 원, 고려대 105억 원, 성균관대 159억 원, 한양대 121억 원이었다고 한국경제가 지난 12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1년에서 6년 단위로 진행 중인 기초연구 사업의 예산이 최대 40% 가까이 줄고 바이오와 반도체, 항공우주, 인공지능 등 윤석열 정부가 전략 분야로 밀고 있는 연구 예산도 전년 대비 70~90% 삭감될 예정”이라고 전했다.
비상이 걸린 곳은 이공계 대학원만이 아니다. 중소기업도 정부 지원이 줄어 수년간 지속했던 연구개발 사업을 접어야 할 판이다. 중소벤처기업부는 올해 R&D 사업을 기존 51개에서 12개로 대폭 줄이기로 했다. 정부는 “사업 간 유사·중복, 단기 현안 등 비효율적 요소 개선을 위해 축소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지원이 끊긴 연구 사업 중 상당수는 중단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폐지 대상(협약 변경 대상) 기업 수는 2400여 개에 달한다. 이제 막 연구를 시작한 곳은 그나마 타격이 덜 하겠지만 기초 연구를 끝내고 실증단계에 들어선 사업은 매몰 비용이 적지 않을 것이다.
지난달 25일 임명된 박상욱 대통령실 과학기술 수석(서울대 과학학과 교수)은 최근 중앙일보와 인터뷰하며 윤석열 정부의 R&D 예산 삭감이 실책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그는 “정상적인 상황에서 R&D 예산이 깎인 건 이번이 처음이고 이례적 상황”이라고 실토했다. 윤 대통령과 예산 삭감을 주도한 기획재정부는 잘못을 인정하고 어떻게든 올해 R&D 예산을 복원시켜야 한다. ‘병 주고 약 주는’ 위선적 정책으로 실책을 덮으려고 하면 더 큰 부작용만 초래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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