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계 카르텔로 몰아 4.6조 삭감하더니
연구 현장 혼란에 여론 역풍 거세게 불자
총선 일주일 앞두고 기존 태도 확 뒤집어
“국가 미래 걸린 과학기술 홀대 심판해야”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6월 28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연구개발(R&D)은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 한마디에 정부는 올해 R&D 예산을 4조 6000억 원 삭감했다. 지난해 31조 1000억 원에서 26조 5000억 원으로 14.7%나 싹뚝 잘라낸 것이다.
정부가 R&D 예산을 삭감한 것은 1991년 이후 33년 만에 처음이다. 외환위기와 금융위기 등 우리 경제가 벼랑에 몰렸을 때도 R&D 예산만은 늘려왔다. 과학기술 투자에 국가 미래가 달려 있다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 일부 의원은 과학계를 카르텔로 몰아 R&D 예산 삭감을 밀어붙였다.
예상대로 후폭풍은 거셌다. 주요 대학 이공계 연구실에 대한 국가 지원이 끊기면서 우수한 연구생들이 떠나고 실험에 필요한 재료를 구하지 못해 기초 연구가 지연되는 일이 벌어졌다. 예산이 줄었다는 소식에 대학원 신입생과 석사, 박사 지원자도 확 줄었다.
연구개발에서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기업들 사정도 마찬가지다. 정부 지원으로 이어가던 연구 사업이 중단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연구가 70~80% 진행된 상황에서 중단되는 사태까지 일어나고 있다.
이처럼 연구 현장에 혼란이 극심하고 유능한 연구자들이 국내를 떠나는 부작용이 커지자 윤석열 정부는 내년 R&D을 대폭 늘리겠다고 했다. 박상욱 과학기술수석은 3일 용산 대통령실 브리핑에서 “R&D 다운 R&D를 위한 정부 R&D 지원방식의 개혁이 완결됐다고 말씀드리긴 어려우나 세계가 기술 경쟁에 뛰어드는 유례없이 빠른 기술 변화의 파고 속에서 개혁 작업에 매달릴 수만은 없는 상황”이라며 “그래서 개혁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내년 R&D 예산을 대폭 증액하고자 한다”고 했다. 대통령실 다른 관계자도 “대통령을 비롯해 경제부처와 혁신본부 등이 목표로 하는 수준에 대한 공감대는 역대 최고 수준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R&D 예산이 주먹구구식, 나눠먹기식이라며 비판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진 태도다. 예산 삭감에 따른 과학계 반발에 더해 총선을 앞두고 여론의 역풍이 거세게 불자 부랴부랴 발표한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실은 R&D 예산 복원도 아니고 총선 때문도 아니라고 했으나 궁색한 설명이다. 역대 최고 수준으로 R&D 예산을 편성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깎였던 예산이 복원될 것이고 내년 R&D 예산 문제가 총선을 코 앞에 두고 발표할 정도로 급한 사안은 아니다.
박상욱 수석은 윤 대통령이 필요할 때 제때 신속하게 지원할 것, 연구자를 믿고 지원하되 국민에게 투명하게 공개할 것, 부처, 연구 기관, 국가 간 장벽을 허물고 글로벌 차원에서 협력, R&D 체계·문화를 퍼스트 무버 R&D로 변화 등 4개 필수요건을 강조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것 역시 R&D 예산 삭감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고 다시 돌려놓기 위한 미사여구에 불과하다.
내년 R&D 예산을 대폭 증액한다지만 이공계 연구생들은 과학기술에 대한 윤석열 정부의 무개념과 홀대로 크게 실망했을 뿐 아니라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최근엔 의과대 정원을 2000명으로 늘리는 이슈로 불안감과 불만이 더 커졌다. 의대가 이공계 인재의 블랙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과학기술인력개발원(KIRD)이 최근 발표한 ‘2023년 KIRD 과학기술 인재개발 활동 조사 보고서’는 R&D 예산 삭감 이후 이공계 연구생들의 실망감과 불안을 보여준다. 보고서는 지난해 9월부터 11월까지 KIRD 교육사업 지원을 받는 과학기술계 재직자 2000명과 석사와 박사과정생, 박사후연구원 등 대학 연구원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를 토대로 작성됐다. 이에 따르면 연구생의 62.2%가 졸업 후 취업에 대한 불안감이 있다고 답했다. 59.9%는 연구 성과에 대한 스트레스가 있다고 응답했다. 2022년 같은 조사에서 각각 58%, 56.9%를 기록했던 것에 비해 4.2%포인트와 3%포인트씩 늘어났다.
주목할 대목은 정부 지원책 관련 설문 내용이다. 정부 지원책을 묻는 질문에 R&D 비용과 연구비 지원 확대를 원한다는 응답이 19.2%로 가장 높았다. 그 뒤를 이은 금전적 지원(9.4%), 학비나 장학금 지원(8.7%), 급여 인상이나 인건비 개선(7.2%)의 2배가 넘었다.
임기철 광주과학기술원(GIST) 총장은 지난달 28일 기자간담회에서 "올해 R&D 예산을 삭감한 건 정부 정책 실패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정부가 지난해 분야별 심층 검토 없이 너무 기술적으로 (예산을) 감축한 면이 있다”며 “전문가 몇 분만 모시고 일주일만 (논의)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명박 정부 때 대통령실 과학기술비서관과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원장 등을 역임한 과학정책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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