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심서 팔레스타인 희생자 애도 시위
지구촌 곳곳 연대…"승자없는 전쟁 멈춰야"
"암흑 속 학살 벌어져…이스라엘 철수하라"
팔레스타인인 아벳 "평화로운 삶 살고싶어"
"한국 미디어, 이스라엘 아닌 진실 보여야"
현대 물질 사회에서 신발은 인간 개개인의 개성을 보여준다. 신발은 단지 발을 보호하고 보행에 도움을 주는 기능적 관점에서만 머물지 그치지 않고, 그가 어디를 가고, 누구를 만나고, 어떤 활동을 하는지를 보여준다. 때때로 번쩍이는 신발을 통해 한 사람의 기분을 느낄 수도 있고, 닳아빠진 밑창을 통해선 어떤 이의 치열하고 성실한 삶의 단면을 엿보기도 한다. 신발에는 한 인간의 '생'이 담겨 있다.
첫 눈이 예보된 17일 오전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 광장에 2000켤레의 신발이 줄지어 놓였다. 성인 손바닥만 하거나 그보다 작은 아동용 운동화부터 성인용 브랜드 운동화, 검정색 남성 구두, 빨간 뾰족구두, 알록달록 장화까지, 주인 모를 각양각색의 개성 있는 신발 위에 군데군데 하얀 국화가 올려졌다.
신발이 하나씩 놓이던 시각, 광장 한편에 설치된 스피커에선 슬픈 곡조의 아랍권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한 시민 활동가에게 어떤 노래인지 물어보니,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병원에서 의료진이 "우린 떠나지 않겠다"며 함께 부른 노래와 가자지구 북부 자발리아 난민 캠프에서 살해당한 11살 꼬마소녀 가수의 노래라고 한다.
작은 글씨가 빼곡한 하얀 펼침막도 내걸렸다. 지난달 7일부터 26일까지 이스라엘에 의해 살해 당한 가자지구 주민 6747명과 시신이 훼손돼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281명의 명단이었다. 아랍어로 적힌 이름 옆엔 72세 노인부터 0세 신생아까지 희생자 나이가 적혀 있었다. 성씨가 같은 것들도 포함됐는데, 한 일가에선 44명이 한꺼번에 숨을 거둔 사례를 표현했다고 한다.
이스라엘의 공습과 지상 공격으로 최소 1만 1300명의 팔레스타인인 사망자(가자 보건부 집계)가 발생했으며, 지금도 팔레스타인 어린이가 10분에 1명씩 죽고 있다.
이러한 참상이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미국 뉴욕·워싱턴,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독일 베를린·뮌헨, 이탈리아 밀라노·로마, 스페인 바르셀로나 등에선 가자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습과 지상 공격을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팔레스타인 연대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에 대한 연대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105개 단체가 연대한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한국 시민사회 긴급행동'은 이날 오전 '모든 희생자를 애도하는 신발들의 시위'를 했다. 보신각 앞 광장에 놓인 2000켤레 신발은 이번 시위를 위해 긴급행동 측에서 설치한 것들이다.
신발은 이스라엘에 의해 살해 당한 희생자들을 의미한다. 1000명, 3000명, 5000명, 1만 명…, 매일 가자와 서안 지구의 사망자가 정확하지 않은 '숫자'로 전 세계에 타전되지만, 숫자로만 표현된 그들 각자가 누군가의 가족이자 친구이고, 하나의 우주이자 존엄한 생명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학살 중단을 요구하기 위해 신발을 설치했다.
2000켤레 신발은 지난 일주일 초등학교와 아파트, 성당과 교회, 상점 등 전국 각지에서 시민들이 택배로 보내준 것이다. 직접 가져다 준 시민도 있었다. 평화 운동의 상징인 제주 강정마을과 경북 성주 소성리에서도 보내왔다. 실제 모인 신발은 3000켤레지만 공간 제약으로 2000켤레만 놓이게 됐다. 신발은 이스라엘 봉쇄로 인해 구호물품으로는 보낼 수 없어 시위를 마친 이후 재활용하거나 기증할 예정이다.
학생 NGO '렛츠 피스(Let's Peace)'에서 활동하는 숲나학교 재학생 진영인(18) 양도 이번 시위를 위해 신발을 기증했다. 진 양은 "어디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정도가 다르다는 것은 부당하다 생각한다"며 "같은 나이, 또래 학생들이 총을 들고 전쟁에 참여한다는 게, 학교와 병원이 폭격을 맞아 제대로 된 교육과 진료를 받을 수 없다는 게, 어린 나이에 끔찍한 상황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너무나도 슬프다"고 했다.
그는 "가자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상황에 놓여 있고, 옆에 있는 사람이 목숨을 잃어도 애도의 시간조차 가지지 못한 채 도망가야 하는 게 현실"이라며 "인간의 존엄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전쟁은 서로에 대한 증오와 폭력만을 낳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도대체 전쟁은 누구를 위한 것이냐"며 "승자없는 전쟁을 멈추고 공생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했다.
시위 현장에서는 가자의 비극을 전하는 목소리도 이어졌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전진한 씨는 "며칠 전 온라인 회의에서 팔레스타인 의사를 만났는데, 너무나 많은 환자들과 의료진이 죽고 있다고 했다"며 "그는 당장 이스라엘의 공격을 중단시키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모든 노력을 다 해달라고 호소했다"고 전했다.
이스라엘은 지난달 가자지구 알아흘리 병원를 폭격해 500명이 넘게 사망했다. 최근 알시파 병원 인근에 금지무기인 '백린탄'을 투하했다고도 전해진다. 인화성 물질인 백린을 이용한 무기로, 뼈와 살이 녹는 화상으로 사망에 이르게 한다. 국제협약은 이 잔혹한 무기의 민간인 지역 사용을 금지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이 이를 병원 인근에서 사용한 것이다.
드론과 저격수 공격으로 병원 의료진, 환자 중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증언도 이어지고 있다. 또 연료 부족으로 인큐베이터 가동도 어려운 상황에서 태양광 패널이 파괴됐다. 지난 15일에는 하마스 해체를 명분으로 이스라엘 방위군이 알시파 병원 내부에 탱크를 진입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가자 북부에는 알아흘리 병원만 유일하게 가동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전 씨는 "이스라엘은 병원 대피령을 내렸는데 세계보건기구가 한 달 전 지적했듯 중환자와 신생아에게 병원을 떠나라는 건 사형선고"라며 "얼마나 죽고있는지 알 수도 없다. 10일부터 가자지구 통신이 완전히 마비돼 사망자 숫자도 집계되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는 "진실이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채로 폐허와 암흑 속에서 학살이 벌어지고 있다"며 "이게 인종청소가 아니면 무엇이냐"고 했다.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이 대사관 인근에 걸린 정의당·녹색당·노동당의 팔레스타인 연대 구호 현수막을 "심각한 증오 표현"이라며 철거를 요구한 데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이들 진보정당이 건 현수막에는 '요르단강에서 지중해까지, 팔레스타인은 해방되리라(From the river to the sea, Palestine will be free)'라는 문구 등이 적혀있다.
녹색당 김찬휘 대표는 "도대체 '심각한 증오 표현'은 누가 하고 있느냐"며 "강에서 바다까지 이스라엘의 권리만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이스라엘 정부와 이스라엘 극우 세력들이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공격에 대해) 자위의 행동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10분마다 팔레스타인 아동 1명을 살해하고 의료진 192명을 살해한 것이 자위냐"며, 이스라엘의 즉각 철수를 주장했다.
이날 '희생자를 애도하는 신발 시위'에 참여한 30여 명의 시민과 활동가들은 "이스라엘은 학살을 중단하라(Stop the genocide)" "이스라엘은 즉각 휴전에 응하라(Cease fire now) "팔레스타인에 자유를(Free Palestine)" 등의 구호를 한국어와 영어로 각각 외쳤다.
집회 중간에 한국에 거주 중인 팔레스타인인도 참여해 함께 구호를 외쳤다. 그는 한 손에 팔레스타인 국기를 들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출신 아벳(Abed)은 <시민언론 민들레> 기자와 만나 "한국의 민주 시민들에게 이스라엘의 프로파간다(선전)에 귀를 닫고 우리를 도와달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며 "한국의 미디어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가자의 진실을 보여줘야 한다. 우리는 이스라엘로부터 75년 점령당하고 학살당하고 있다. 우리는 평화로운 삶을 살고 싶다. 우리가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한국인들이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한편 '희생자를 애도하는 신발 시위'는 이날 하루 보신각 앞 광장에서 열린다. 연대를 원하는 누구나 꽃과 메모지 등으로 애도의 마음을 나눌 수 있으며, 가자지구 긴급지원 모금도 받는다. 오후 7시부터는 '추모의 밤' 행사도 열린다. 팔레스타인 국기 색상의 LED 촛불을 설치하고 공연, 추모시 낭송, 이스라엘 대사관에 보낼 엽서 쓰기 등이 진행된다.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한국 시민사회 긴급행동'은 오는 26일 이스라엘 대사관 인근에서 3차 집회를 갖는다. 긴급행동은 지난달 22일과 이달 4일 두 차례에 걸쳐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 중단과 철수를 촉구하는 집회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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