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사과·반성 않는 아베, 마쓰노, 기시다

아사히신문 ‘천성인어’에 비친 '양심적 일본’

“우리”가 손을 잡아야 할 일본은 어느 쪽인가?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무소속 윤미향 의원이 지난 1일 일본 도쿄 스미다구에 위치한 요코아미초 공원에서 열린 간토대지진 100주년 조선인희생자추모행사에 참석, 추모비에 헌화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2023.9.3. 연합뉴스 
무소속 윤미향 의원이 지난 1일 일본 도쿄 스미다구에 위치한 요코아미초 공원에서 열린 간토대지진 100주년 조선인희생자추모행사에 참석, 추모비에 헌화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2023.9.3.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은 올해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은 이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파트너입니다. 한·일 양국은 안보와 경제의 협력 파트너로서 미래지향적으로 협력하고 교류해 나가면서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함께 기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3.1절 기념사에서도 이렇게 말했다.

“일본은 과거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그리고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대통령이 얘기하는 ‘일본’은 어떤 일본일까.

‘천성인어’의 일본

<아사히신문>에는 ‘천성인어(天聲人語)’라는 타이틀의 장기 고정 연재칼럼이 있다. 아마도 복수의 원숙한 문장가들이 돌아가며 익명으로 쓰는 듯한 짤막한 에세이가 매일 하나씩 실리는데, 세상 돌아가는 것을 두루 꿰면서 때로 촌철살인의 번뜩이는 생각을 압축적이고 절제된 문장에 담아내 평가가 높다.

9월 6일에 실린 ‘조선인 학살의 기록’이라는 제목의 천성인어를 읽다가, 문득 윤석열 대통령이 말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파트너”로서의 일본은 어떤 일본을 두고 한 말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길지 않은 글이어서 그 전문을 소개한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마쓰노 히로카즈 관방장관이 1일 도쿄에서 정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날 일본 정부는 북한의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지원한 3개 단체와 4명의 개인을 대북 제재 명단에 추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2023.09.01. AP 교도 연합뉴스
일본 정부 대변인인 마쓰노 히로카즈 관방장관이 1일 도쿄에서 정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날 일본 정부는 북한의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지원한 3개 단체와 4명의 개인을 대북 제재 명단에 추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2023.09.01. AP 교도 연합뉴스

"정체를 알 수 없는 으스스한 공기"

손때가 묻은 표현은 되도록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오늘은 솔직히 이렇게 쓴다. 전날의 기사를 보고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동 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에 대해 “정부가 조사해 본 바로는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는 마쓰노 히로카즈 관방장관의 발언이었다.

그럴 리가 없다. 예컨대 정부가 인터넷에 올려 놓은 아시아 역사자료센터에서도 당시의 사법성 자료를 찾을 수 있다. 100년 전의 오늘 6일에는 사이타마 요리이에서 구학영씨가 일본도와 죽창 등을 든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많은 피해 사례 가운데 하나로 나와 있다.

“흥분한 민심은 (략) 순량하고 아무 잘못 없는 이에게도 해를 가했다.” “실로 유감스런 일이다.” 과오를 한탄하는 소리가 들려 오는 듯한 생생한 기술이다.

물론 당시의 자료에도 잘못된 내용이나 확신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연구자나 시민단체가 지금까지 모은 증언 등에 비춰 보면 많은 조선인들이 학살당한 사실은 이제 흔들릴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눈치채지 못한 무지를 부끄러워해야겠지만, 정부는 최근 몇 년 이번과 같은 답변을 국회 등에서 거듭해 온 모양이다. 학살의 유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기록이 없다”는 얘기만 되풀이했다. 그렇게 해서 마치 역사적 사실이 애매하기라도 한 듯한 인상을 퍼뜨린다.

실로 위험하다. 도대체 정부는 무엇을 지키고, 어디를 향해 가려 하는가. 아직 희박한, 그러나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기가 떠돌고 있는 것 같아 견딜 수 없다. 으스스 추워진다.

<조선일보>와 윤석열 정부가 손잡은 일본

이 글에 나오는 대지진 때 억울하게 희생당한 동포 구학영씨 올해 추도행사에는, <조선일보>와 대한민국 정부의 치졸한 ‘매카시 수법’ 마녀사냥 표적이 된 윤미향 의원도 참석했다.

마쓰노 히로카즈 관방장관은 기시다 후미오 정권 대변인이자 실세다. 그는 이 글이 지적한 대로 100년 전 관동 대지진 때 6천명이 넘는다는 조선인들이 억울하게 학살당한 사실을 입증할 기록이 없다는 주장을 반복해 왔다. 기록이 없으니 학살사실을 공식확인할 수도 없고 사죄와 배상도, 정부 차원의 추모행사도 재발방지 약속도 할 수 없다는 것이 기시다 정부가 내세우는 논리다.

글 쓴이가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지적했듯이 마쓰노 장관의 주장은 명백한 거짓말이다. 지역 연구자들이 찾아낸 구체적인 학살기록들이 몇 차례 보도되기도 했지만, 인터넷에도 떠 있는 일본정부 공식 문서만 잠시 살펴 봐도 그때의 조선인 학살 사실들을 생생하게 전하는 기록들을 확인할 수 있다. 기록을 찾지 못한 것이 아니라 찾지 않은 것이고, 찾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런 마쓰노가 대표하는 일본정부는 도대체 무슨 가치를 지키려 하며 어디를 향해 가려 하는 것인가, 라고 천성인어 필자는 묻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을 떠돌고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기”, 불길한 분위기에 으스스한 한기를 느낀다.

 

일본 간토(關東)대지진 발생 100년을 맞은 1일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도쿄에서 방재훈련 관련 연설을 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간토대지진이 발생한 9월 1일을 '재해의 날'로 지정해 매년 재해 대응 훈련과 행사 등을 치른다. 2023.09.01. AP 교도 연합뉴스
일본 간토(關東)대지진 발생 100년을 맞은 1일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도쿄에서 방재훈련 관련 연설을 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간토대지진이 발생한 9월 1일을 '재해의 날'로 지정해 매년 재해 대응 훈련과 행사 등을 치른다. 2023.09.01. AP 교도 연합뉴스

아베와 마쓰노와 기시다의 일본

억울하게 학살당한 동포들의 100주기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윤석열 정부와 <조선일보>가 얘기하는 일본은 학살사실을 제대로 드러내고 바로잡으라는 ‘천성인어’의 일본이 아니라 그것을 감추고 왜곡하는 마쓰노와 기시다의 일본이다. 관동 대지진 학살뿐만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강제동원(징병 징용) 피해자들, 동학농민과 의병, 명성황후 민씨에 대한 반인도적 잔혹행위, 그리고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배 역사 전체에 대해서도 마쓰노와 기시다의 일본은 사실 자체를 제대로 인정한 적조차 없다.

그런 마쓰노와 기시다의 일본이 과연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파트너”가 될 수 있나? 그런 일본을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그리고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로 삼는 게 옳은가?

마쓰노와 기시다의 일본, 아베 신조의 일본은 “우리”에 대해서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메이지 이후의 일본 제국주의 침략정책에 희생당한 ‘류큐 왕국’(오키나와), 대만 등 옛 피식민 희생자들도 마찬가지다.

‘헤노코 매립(관련 소송) 오키나와 패소’라는 제목이 달린 9월 5일의 천성인어 전문도 소개해 보겠다.

 

오키나와 남서부의 미 해병대 후텐마 기지가 이전해 갈 오키나와 북동부의 나고 시 헤노코 해안. 일본 최고재판소는 지난 4일 이곳에 대한 기지건설 토목공사를 재개할 수 있는 판결을 내렸다. 2023.05.02. AP 교도 연합뉴스
오키나와 남서부의 미 해병대 후텐마 기지가 이전해 갈 오키나와 북동부의 나고 시 헤노코 해안. 일본 최고재판소는 지난 4일 이곳에 대한 기지건설 토목공사를 재개할 수 있는 판결을 내렸다. 2023.05.02. AP 교도 연합뉴스

미군기지 식민지 오키나와

오키나와 현의 오타 마사히데 지사가 최고재판소(대법원)에서 낭독한 의견서를 완성한 것은 개정하기 2시간 전이었다. 사법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초안에 가필을 계속해 원고용지로 173행이나 됐다. 1996년의 미군기지를 둘러싼 대리서명 소송 때의 일이다.

오키나와 역사를 메이지 정부에 의한 ‘류큐 처분’까지 거슬러 올라가 설파하면서 “지역의 의지에 반해 중앙정부 정책이 우선적으로 강행되는 것이 그 뒤에도 일관되게 보인다”고 말했다. 판결은 지사의 패소였다.

“나는 사법의 정당한 판단을 너무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저서 <오키나와의 결단>에 남아 있는 오타 씨의 쓸쓸한 술회를 지금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으로 거듭 읽고 있다. 나고 시 헤노코의 (미군기지 선설을 위한) 매립을 둘러싼 소송에서 최고재판소는 현의 호소를 물리쳤다.

현이 취한 ‘매립 불허’ 조치의 내용에 대해서도, 오키나와 미군기지의 현재상황에 대해서도 판결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결과는 예상된 것이라곤 하나 너무 냉담한 데에 놀랐다.

오키나와 기지 부담의 무게에 본토가 눈을 뜨는 계기가 된 소녀 성폭행 사건이 일어난 것은 1995년의 어제인 9월 4일이었다. 아니 정말로 눈을 떴다고 할 수 있을까. 오키나와는 그때부터 “기지는 전국이 함께 부담해야 한다”고 호소해 왔다. 하지만 사건 뒤 28년이 지났지만 미군 전용시설의 7할이 오키나와에 집중된 구도는 바뀌지 않았다.

행정 입법 사법이라는 벽에 몇 겹이나 둘러싸여 아직까지도 소망이 실현될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또 한 겹 벽이 더해졌다. 오키나와 사람들과 함께 벽 앞에 선다.

 

오키나와 북동부 나고 시의 헤노코 해안지대에 건설 중인 미군기지.  2023.05.02. AP 교도 연합뉴스
오키나와 북동부 나고 시의 헤노코 해안지대에 건설 중인 미군기지.  2023.05.02. AP 교도 연합뉴스

비슷한 수난을 당한 독도

이 글에 나오는 ‘류큐 처분’이란 독립 류큐 왕국을 일본의 일개 현으로 복속시킨 1872년의 류큐번 설치에서 1879년 오키나와 현 설치까지의 일련의 일본제국 시책을 가리킨다. 근대 일본이 가장 먼저 식민지로 만든 땅이 류큐다. 일본 패전 뒤 미국 등 연합국은 류큐와 센카쿠열도 등을 중국에 복속(장제스가 있었으므로)시키기로 했으나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중국이 공산화하자 미국은 결국 모든 것을 일본에 몰아주고 전범국 일본을 최대의 동맹국으로 삼았다. 독도가 애꿎게 ‘다케시마’라는 낯선 이름으로 일본의 ‘영토분쟁’ 리스트에 올라간 것도 그 때문이다.

일본의 오키나와 지배 자체에 분노했던 오타 마사히데 지사는 주일 미군 기지들이 작은 오키나와에 집중돼 있는 현실을 바꾸려고 애썼으나 완강한 미군과 자민당의 완력 앞에 좌절당했다. 1995년 미 해병대원들의 현지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 이후 지금까지 오키나와 현민들의 절대다수는 오타 마사히데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헤노코로의 후텐마 기지 이전에 반대해 왔다. 하지만 미군과 자민당 정부는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자신들의 계획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최고재판소 판결에 따라 공사를 재개할 수 있게 된 오키나와 나고 시의 헤노코 해안 미군기지 건설공사 현장. 2023.09.04. AP 교도 연합뉴스
최고재판소 판결에 따라 공사를 재개할 수 있게 된 오키나와 나고 시의 헤노코 해안 미군기지 건설공사 현장. 2023.09.04. AP 교도 연합뉴스

“우리”가 손잡아야 할 ‘다른 일본’

일본 자민당 등 집권세력 눈에 오키나와와 대만, 그리고 조선(한반도)은 별로 다르지 않게 비칠 것이다. 그들은 미국을 등에 업고 여전히 옛 식민지들을 자신들의 관할지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 패전과 함께 군국일본 잔재세력인 그들은 청산됐어야 했다. 그랬다면 동아시아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자신들의 냉전정책을 위해 그들을 다시 전후 일본의 지배자로 만들었다. 마쓰노와 기시다와 아베는 그들의 직계 후예들이다.

윤석열 정부와 <조선일보>가 얘기하는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파트너”,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그리고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는 ‘천성인어’의 일본이 아니라 마쓰노와 기시다와 아베의 일본이다.

“우리”가 손잡아야 할 일본은 그들의 일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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