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노동자 '분신 방조' 음모론 반복, 한술 더 떠
비판을 정치 공세로 몰아 역공…프레임 전환 시도
운동권→검사→보수당 의원 변신…극단적 우경화
노동계 분쇄 초강경 노선, '포스트 윤석열' 노린 듯
야 4당 의원 108명 "퇴진하라" 이례적 공동 성명
원희룡 "엉뚱한 번지수로 날 공격해…뭐가 문제냐"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도대체 사람이란 동물은 어디까지 변할 수 있는 건가?"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을 향해 내뱉은 김의겸 의원의 탄식이다. 한때 운동권이었던 원 장관을 두고 요즘 야권 의원들은 소속 정당을 막론하고 비슷한 분노와 개탄을 쏟아내고 있다. "먼저 사람이 돼라" "사람은 못 돼도 괴물은 되지 말라"는 것인데, 원 장관의 반응은 사람보다는 괴물에 가까워 보인다.
윤석열 정부의 대대적인 '건폭' 탄압에 고통받던 양회동 건설노조 강원건설지부 3지대장의 죽음을 놓고 조선일보와 함께 '분신 방조' 의혹을 제기했던 원 장관은 이에 대해 사과는커녕 일말의 성찰도 없는 상태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YTN 기자가 "동료 목격자는 양 지대장의 분신을 만류했다"고 증언했고, 경찰도 "자살 방조 정황은 없다"고 밝혔지만 원 장관은 마이동풍이다. 이 사건을 수사했던 강릉경찰서 측은 지난달 "양 씨가 주변 바닥 등에 먼저 시너를 뿌리고 손에 라이터를 든 채 동료와 주위 사람들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한 뒤 분신한 것"이라며 "바닥에 시너가 뿌려진 상황에서 곁에 다가갔다면 말리던 사람도 함께 위험에 처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그런데도 원 장관은 "내 말에 무슨 문제가 있냐"면서 심지어 자신을 향한 거센 비판을 야당의 정치 공세로 규정하고 역공까지 가하고 있다. 이 같은 적반하장과 영악한 프레임 전환 시도는 대학 운동권→서울지검 검사→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 변신을 거듭하며 갈수록 우경화한 그의 처세술을 반영하는 듯하다. 조직 내에서 정체성을 의심받는 전향자일수록 이를 불식시키기 위해 더 극단으로 치닫는 경향이 있는데 이에 해당하는 사례일 수도 있다.
원 장관은 노동계 분쇄에 앞장서는 초강경 이미지로 보수층 지지를 끌어모아 '포스트 윤석열'을 도모하겠다는 나름의 총선·대선 전략을 가동 중인 것으로 관측된다. 그러나 나가도 너무 나간 그의 행보는 격렬한 비토층도 함께 양산하고 있어 대중 정치인으로서 자충수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기본소득당, 진보당 등 원내 야 4당 국회의원 108명은 19일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후안무치한 패륜 발언을 사죄하고 퇴진하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국무위원의 특정 발언을 이유로 이렇게 많은 의원이 공동 성명을 통해 사퇴를 요구한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이들 의원은 성명서에서 "지난 6월 13일 국회 대정부질문 과정에서 원희룡 장관은 건설노동자 고 양회동 열사의 분신 현장에 있었던 건설노조의 동료 간부가 분신을 방조·방치했다는 끔찍하기 짝이 없는 음모론을 재반복했다"며 "음모론은 기본적인 사실 관계도 확인하지 않은 가짜뉴스임이 곧 밝혀졌다. 양회동 열사가 남긴 여러 유서 역시 본인의 필적임이 확인됐다"고 지적했다.
이어 "건설노동자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주무 부처인 국토교통부의 수장이 이미 가짜뉴스로 판명난 사안에 대해 잘못을 사과하기는커녕 적반하장식 발언을 반복해 참으로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정상적인 사고와 최소한의 윤리의식을 가진 인간이라면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제아무리 정부가 건설노동자를 사회악으로 몰아 탄압하자고 해도 지켜야 할 금도가 있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는 법 아닌가?"라고 분노를 표시했다.
그러면서 "고 양회동 열사의 분신은 정당한 노동조합 활동과 노동운동에 대한 정부의 '건폭 몰이' 탄압 수사에 목숨으로 항거한 것"이라며 "원희룡 장관은 억울한 수사에 목숨으로 항거한 양회동 열사의 명예를 훼손하고 유족들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긴 데 대해 즉각 사과하라"고 촉구했다. 아울러 "건설노조와 건설노동자를 패륜 집단으로 몰아 노동 탄압을 정당화하려는 교활한 술책을 포기하고 자진 사퇴하라"면서 "그것이 인간으로서 남아 있을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민주당 을지로위원회 위원장인 박주민 의원과 강민정·최혜영 의원, 정의당 심상정·이은주, 진보당 강성희 의원 등은 국회에서 따로 기자회견을 열어 성명서를 낭독했다. 이 자리에서 심상정 의원은 "주무부처 장관이 죽음에 조의를 표하는 대신 특정 언론의 악의적 보도를 근거로 현장에 있던 고인의 동료를 분신 방조자로 몰았다"며 "건폭 몰이로 노동자 자존심을 짓뭉개 죽음으로 몰아넣더니, 이제는 옆에 있던 생사람까지 잡을 생각이냐"고 질타했다. 강성희 의원은 "원내 야 4당은 이미 국회 과반수를 넘어서는 의석을 갖고 있어 윤석열 정권의 건설노조 탄압 선봉장인 원 장관 탄핵도 가능하다"고 해 탄핵소추안 발의 가능성까지 시사했다.
앞서 원 장관은 지난 13일 국회 경제 분야 대정부질문에서 "지금도 양회동 씨의 죽음이 기획 분신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심상정 의원 질문에 "저는 그렇게 주장한 바 없다"면서 "(제 페이스북 글은) 고인의 죽음에 대한 평가는 아니고, 그 현장에 있었던 부위원장이 1분 가까이 수수방관한 행위에 대해 의문이 드는 것을 제 나름대로 짚고 가야겠다고 해서 표현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원 장관은 지난달 17일 페이스북에 "자신의 동료가 시너를 몸에 뿌리고 불을 붙이던 현장에 있던 건설노조 간부가 이를 말리지 않고 한참 동안 바라만 봤다는 (조선일보) 보도가 있었다"며 "혹시나 동료의 죽음을 투쟁의 동력으로 이용하려 했던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는 글을 남긴 바 있다.
원 장관은 심 의원에게 "기획이라든지, 방조라든지, 이런 얘기는 전부 저를 엉뚱한 번지수로 끌고 가서 공격하려고 짠 프레임"이라고까지 주장했다. 심 의원이 본회의장 방청석에 있는 유족들을 가리켜 "저 위에 유족들이 와 있으니 말씀 좀 삼가라"고 당부했음에도 원 장관은 전혀 거리낌 없이 "저는 지금도 역시 석연치 않은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면서 "지금도 기억이 안 납니까? (당시 현장에 있던) 부위원장님? 지금도 기억이 안 나십니까?"라고 태연한 얼굴로 되물었다.
격분한 심 의원이 "이건 패륜이다. 정치인 전에 인간이 돼야 한다. 죽음마저 정치 선동으로 이용하는 시대는 끝내야 한다"고 질책했으나 원 장관은 "옆에 있던 부위원장의 수수방관을 지적한 것이다. 왜 억지로 초점을 엉뚱하게 몰아가느냐"고 따졌다. 이 같은 원 장관 태도에 야당 의원석에서는 고성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원 장관은 이날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민주당 민병덕 의원이 같은 취지로 "사과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을 때도 "저는 고 양회동 씨의 죽음 그 자체에 대해서는 평가하거나 언급한 사실이 없다"며 "제가 고인에 대한 명예를 훼손한다거나 고인의 죽음에 대한 평가를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 그러한 요구나 비난은 과녁을 잘못 잡은 것"이라고 답했다.
"경찰이 자살 방조 정황이 없다고 일축했는데 그래도 인정 안 한다는 거냐"고 민 의원이 재차 묻자 원 장관은 "그 부위원장이 왜 10여m나 떨어져 있으면서 왜 다가가지도 않았고 말리지도 않았느냐"며 "실제 그 후에 여러 가지 진술들이 보도된 것을 종합해 보면 본인은 결정적인 시간대에는 기억이 안 난다는 말로 넘어가고 있다. 기억이 안 난다, 이거 어디서 자주 듣던 이야기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이처럼 원 장관은 고인에 대해서는 물론, 분신을 막지 못해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해당 부위원장을 향해서도 마치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듯 몰아붙이며 2차 가해를 서슴지 않았다. 이에 민주당 이소영 원내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비정한 괴물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냐"고 했고, 정의당 위선희 대변인은 "유가족 앞에서 사자 명예훼손을 하고, 고인의 분신을 지켜보고 정신을 잃었던 동료 노동자를 다그치기까지 했다. 인간인가? 사람인가?"라며 "정치적으로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국민을 적대하고 때리고 죽이는 그야말로 파렴치한 장관"이라고 통분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원 장관은 음모론적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고 있다. 그는 19일 국회에서 기자들이 야당의 사과·사퇴 요구에 대한 입장을 묻자 "도대체 어느 부분이 패륜이고 문제가 된다는 것이냐"면서 "이건 초등학교 수준의 읽기만 하더라도 전혀 근거가 없는 그런 것이 명백한데 이걸 갖고 자신들이 국민들로부터 수세에 몰린 여론을 벗어나기 위해 저를 끌어들이고 공격하는 것에 대해 기가 찰 따름"이라고 항변했다.
김의겸 의원은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원희룡과 가까운 사이는 아니다. 그래도 오랫동안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지켜봤다"며 "그런데 그의 입에서 '분신 방조 음모론'이 나오는 걸 보고는 맥이 탁 풀린다"고 토로했다. 김 의원처럼 '아득한 현기증'을 느끼는 수많은 이들이 "우리 사람은 되기 힘들어도 괴물은 되지 말고 살자"고 호소하고 있지만, 원 장관은 그대로 괴물이 되는 길을 택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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