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의 눈] 지금 정국은 1991년의 데자뷔 같아
정권 폭압 통치로 분신하자 저항 세력 도덕성 공격
“죽음 굿판 거둬라” 조선일보, 이번엔 “불 안꺼” 보도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인기 없는 정권이 만회를 위해 공격 대상을 찾는다→탄압이 거세지자 국민이 저항한다→ 폭압의 희생자가 나오자 이에 항의한 분신 사태가 일어난다→정권이 분신 사태로 타격을 입자 저항 세력의 도덕성을 공격한다→정권의 움직임을 미디어가 지원한다.’
요즘 건설노조에 대한 공격과 분신 사태를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언젠가 본 듯한 흐름이다. 바로 노태우 정권 당시인 1991년 5월 정국과 흡사하다.
1991년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 운동이 가장 격렬하게 일어난 때다. 5월 정국은 4월 26일 명지대생 강경대 씨의 죽음으로 촉발됐다. 경찰이 학내 시위 뒤 교문 밖으로 나가던 시위대를 강경 진압해 강 씨가 숨졌다. 정권의 폭압으로 사망자가 발생하자 전국에서 이에 항의하는 분신이 이어졌다. 박승희, 김영균, 천세용 씨 등 10명이 넘게 극단적 선택을 했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씨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김 씨의 분신 뒤 경찰은 전민련 동료인 강기훈 씨를 유서 대필 혐의로 수사했다. 처음 들어보는 ‘자살방조죄’가 적용됐다. 강 씨는 결국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하지만 2008년 재심을 청구해 2015년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궁지에 몰렸던 노태우 정권은 이 사건을 계기로 정세를 한 번에 뒤집었다. 여기에 정원식 총리에 대한 계란 투척 사건이 더해져 민주화운동 세력을 비도덕적인 집단으로 낙인찍는 데 성공했다. 분위기를 바꿀 명분을 만든 정권은 위기를 모면했다.
노태우 정권은 1989년 공안 통치를 시작했다. 1987년 이후 민주화 요구가 거세지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범죄와의 전쟁’도 이런 흐름의 일환이었다.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강경대 사건이 터졌다. 강기훈 사건 당시 법무부 장관은 김기춘, 담당 검사는 곽상도 전 국민의힘 의원이었다.
언론이 정국 변화에 큰 역할을 했다. 조선일보는 1991년 5월 5일자 지면에 ‘죽음의 굿판 거둬치워라, 환상을 갖고 누굴 선동하려하나’라는 제목의 김지하 시인 기고를 단독으로 실었다. 분신 사태의 정치적 배후를 의심하는 이 글로 인해 민주화 세력에 대한 여론이 나빠졌다.
취임 초반부터 지지율이 낮았던 현 정권은 화물, 건설 노조를 ‘사회악’으로 규정하며 지지층 결집에 성공했다. 이에 저항해 건설 노조의 불행한 일이 벌어지자 조선일보(기사 ‘건설노조원 분신 순간, 함께 있던 간부는 막지도 불 끄지도 않았다’)가 나서서 도덕적 결함을 제기했다. 검사 출신인 원희룡 장관은 해당 보도를 인용해 다시 건설노조를 공격하고 있다. 시계는 30년 전 군사 정권 때로 돌아간 느낌이다.
1991년 5월 항쟁은 결과적으로 패배했다. 폭압적 군사 정권을 몰아내려는 국민의 열망은 좌절됐다. 가수 정태춘 씨는 5월 항쟁의 패배감과 회한을 노래에 담았다. ‘92년 장마, 종로에서’에는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라는 가사가 담겼다.
현재 진행형인 ‘분신 사건’은 1991년과 결말이 다를 수 있다. 정권의 공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최근 서울에서 열린 건설노조의 집회와 관련해 윤희근 경찰청장은 18일 “이번 불법집회에 대해 신속하고 단호하게 수사하겠다”며 “건설노조 위원장 등 집행부 5명에 대해 25일까지 출석하도록 요구했다”고 밝혔다. 경찰이 분신과 관련해 조선일보가 제기한 자살방조죄를 적용할 여지도 남아있다. ‘죽음 주변에 대한 압수수색’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다른 보수 매체의 보도도 이어지고 있다. 중앙일보는 18일자 사설에서 건설노조 집회에 대해 ‘술판과 방뇨의 흔적이 낭자했다’는 선정적인 표현으로 비난했다.
1991년 당시 위세가 대단했던 조선일보 등 레거시(전통) 미디어의 영향력은 예전만 못하다. 반면 대중은 전통 미디어 편식에서 벗어나 유튜브, SNS 등에서 정보를 얻는다. 한국언론진흥재단 ‘2022 언론수용자 조사’에 따르면 종이신문 이용률(9.7%)은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20.0%)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다양한 관점을 가진 대안 언론도 여럿 출연했다.
건설노조도 움직인다. 건설노조 100인 변호인단은 조선일보 기사와 관련해 명예훼손 고소, 기사 삭제, 정정 보도 청구 등을 진행할 예정이다. 유족과 건설노조 동료에게 왜곡 보도를 통해 정신적 고통을 줬다며 손해배상 등의 책임도 묻는다. 삶이 계속되는 한 약자는 싸움을 멈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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