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잔재가 청산되지 않고 오히려 강화된 이 땅의 관료제

소준섭 전 국회도서관 조사관
소준섭 전 국회도서관 조사관

<연재를 시작하며>

관료 문제에 무능한 진보 진영

모두가 인정하듯, 지금의 정부는 문재인 정부의 직접적 결과물이다. 전 정부는 ‘검찰총장 윤석열 문제’ 해결에 완전히 실패하였고, 이 과정을 통해 결국 검찰총장은 대통령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홍남기 기재부 장관을 위시한 기재부나 감사원장 문제 역시 사실상 속수무책이었다. 법원 개혁에 대한 사회적 열망은 대단히 높았지만,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단 한 치의 진전도 보여주지 못했다. 관료 문제에 대한 무능이 그대로 드러났고, 이는 보수 세력이 승리한 굳건한 토대로 작동되었다.

대통령이라는 권력은 온 세상을 쥐락펴락하면서 군림한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대통령이란 결국 5년 뒤 물러난다. 더구나 초반을 지나면 곧바로 레임덕에 빠진다. 우리나라에서 사람들이 이름을 기억하는 장관은 거의 없을 만큼 너무도 수시로 바뀐다. ‘책임 장관’이란 애초부터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관료들은 바뀌지 않은 채 언제나 ‘상수’로서 의연하게 온존하면서 그 핵심적인 자리를 장악한다. 이렇게 하여 결국 행정부 부처의 실질적 주인은 관료일 수밖에 없다. 환경정책이나 노동정책도 대통령과 장관이 명령하고 지휘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겉으로 드러나는 몇몇 가지 정책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정책들을 관료들이 행사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집권자들이 공무원들에게 ‘지시’하는 모습만을 보게 되지만, 장기적으로 그리고 실질적 내용으로 보면 결국 관료들의 종합적인 ‘지휘’ 과정이다.

정권은 유한하되, 관권(官權)은 영원하다

오늘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이제 이 나라 관료 조직은 강력한 정치권력 집단으로 성장해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와 집권 정당의 정책실현 책임자인 각 부처 장관의 기능을 침식하고, 나아가 사실상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는 ‘관료정치’로 군림하고 있는 형상이다. 이 땅의 정치, 경제, 사회 등등 모든 분야에서 기득권이 고착화되고 보수화가 강화되며 한 치의 변화와 개선조차도 어려워지기만 하는 것은 바로 이 사회가 근본적으로 관료지배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인류를 멸종 위기로 몰아넣고 있는 현재의 심각한 기후 위기의 문제에서도 관료집단은 당연히 아무 의식 없이 그저 규정과 관행만을 내세우면서 모르쇠와 시간끌기로 일관할 뿐이다. 참으로 암담하기 그지없다. 이태원과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 바처럼 인간의 가장 소중한 생명과 안전에 전혀 가치를 두지 않는다. 암울하고 불행한 사회다. 이런 비정하고 무자비한 사회를 구축하고 가속화시켜온 데 이 나라 관료집단이 중요한 요인 중 하나다. 변함없이 집권 정치세력과 대자본 그리고 미국이라는 강자를 추종하고 오로지 승진과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결국 언제나 기득권 옹호에 충실하였다.

명백한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관료개혁 없이는 우리 사회의 어느 것 하나도 바뀔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럴 때 우리의 미래 역시 없다. 우리의 미래를 이들 낡은 관료조직에 맡길 수 없다. 이제 우리 자신들의 생존을 위하여 관료집단을 새롭게 바꿔내야 한다.

 

서울 서초동 검찰청사에 내걸린 검찰 깃발. 연합뉴스
서울 서초동 검찰청사에 내걸린 검찰 깃발. 연합뉴스

1. 프롤로그

- 우리 사회의 실질적지배자, 관료

우리 사회의 상층 혹은 지배층은 대개 명문대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다녀왔으며 학군이 좋은 강남 고급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이들 상층공공성(公共性)’에 대한 의식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가 다반사라는 사실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타인에 대한 배려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 없고, 오직 금전 만능주의와 출세 지상주의의 기준만을 잣대로 삼은 채 권세를 휘두르며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이 많다. 또 이 나라 이 사회를 자신들이 일으켜 세웠고자신들이야말로 언제나 정의이고 주인이라는 논리 비약으로 일관하면서 반면 일반 대중들은 개돼지로 깔보는 근거 없는 우월감을 지니며 시대착오적인 극우 사고방식으로 충만된 인사들이 대단히 많다. 대체로 미국에는 특별한 애정을 지니며 미국인들보다 더 미국을 애호하고 일본에도 변함없는 우호적인 경향성을 놓지 않는다. 이들 주변에는 룸싸롱과 조폭 문화에서나 볼 수 있는 언행 그리고 천박한 졸부로서의 이미지도 아른거린다. 많은 사람들이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교양있는 그러한 상류사회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우리 사회의 상층, 지배층이 당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이들이 보유한 부()와 사회적 지위 그리고 학력은 비단 본인 세대만이 아니라 우월한 그 영향력을 토대로 하여 다음 세대로 그대로 세습되고 있으며 더욱더 강화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 사회에서 상층 혹은 지배층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재벌이라 칭해지는 대자본, 거물 보수 정치인 그리고 고위 관료 등을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일찍이 시인 김지하는 <오적(五賊)>에서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5적으로 지목한 바 있었다. () 장성이 지목된 것이 지금 시점에서 보자면 좀 특이하지만, 당시 박정희 군사정권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장차관은 대부분 정치인이나 관료 출신 혹은 교수들이니 굳이 따로 별도 범주로 구분할 필요는 없을 일이다.

관료 시스템이야말로 우리 사회 상층의 이익, 기득권을 보장하는 구조적인 기제(機制)로서 작동된다(최소한 결과적으로는 그렇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다. 동시에 이들 관료집단의 상층인 고위 관료층은 특별하게 서열화된 우리 사회의 상층이자 지배층으로서 확실하게 자리잡고 있다. 고위 관료층의 선두에는 독점적 기소권과 수사권을 장악한 검찰이 자리를 잡고 있고, 법관과 기재부 등이 바로 그 뒤를 잇는다.

이렇게 하여 대자본과 거물 정치인, 고위 검찰과 법원 그리고 기재부(전관 포함) 등 고위 관료 그리고 보수 언론은 이 사회의 지배층으로서 일종의 특권 동맹을 구축한다. 특권 동맹에서 대형 로펌을 비롯하여 금융 관계기관과 국세청 등이 하위 동맹의 네트워크에 포섭된다.

87년 체제’, 관료의 나라 그리고 검찰의 시대

1987, 6월항쟁으로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진 군부독재 권력이 붕괴되었다. 이제 한국 사회는 총칼의 지배대신 최소한 형식적으로는 법의 지배’,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법과 제도의 지배라는 시스템으로 변화되었다. 이른바 ‘87년 체제이다. 법과 제도 그리고 규정의 지배라는, 최소한 겉으로 봐서는 그럴듯한 이 시스템을 토대로 관료집단의 힘은 갈수록 급속도로 강화되었고, 그렇게 군인들에 의한 철권통치의 나라는 확실하게 관료의 나라로 변모하였다. 그리하여 총칼이라는 노골적인 무력의 지배가 사라진 가운데 이제 사회는 법치가 명분으로 앞세워지면서 운용되었다.

이렇게 법치가 강조되는 가운데 관료집단 중에서도 검찰과 법원의 특권화 추세는 특별히 두드러진 것이었다. 이는 검찰개혁과 법원개혁이 오늘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핵심적인 시대적 해결과제로 부상했다는 점을 의미하고 있다. 특히 세계 검찰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기소권과 영장청구권을 독점하고 수사기관인 경찰조직도 사실상 검찰의 하부기관의 현실에서 수사권까지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이 땅의 검찰은 가히 무소불위 ()특권의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다. 군사정권 시기에 횡행했던 불법들이 크게 감소하면서 최소한 외면상으로는 이제 법치의 시대인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그러나 이렇듯 견제되지 않는 권력이란 민주주의 기본과 원칙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었다. 검찰의 적지 않은 기소와 수사들이 자의적으로 남용되고 선택적으로행사되어 왔다는 비판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대한민국에서 검찰의 힘은 가히 대통령에 맞설 수 있는 것이었다. 마침내 검찰은 축적시켜온 그 막강한 권력을 기반으로 하여 이 나라 최고의 권좌에 오르기에 이르렀다. 국가의 주요 요직은 검찰 출신으로 임명되면서 검찰공화국이라는 말이 회자된다.

시사주간지 <시사인>은 윤석열 정부 출범 반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정부의 100대 요직 중 80명이 관료 출신이며 그중 검찰 출신은 11명이라고 보도했다(관료와 검찰로 채워진 윤석열 정부 100대 요직”, <시사인>, 2022, 9, 28. 784).

바야흐로 관료의 나라’, ‘검찰의 시대.
 
'대장동 일당'에게서 아들 퇴직금 등의 명목으로 거액의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곽상도 전 국회의원이 8일 오후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 공판을 마친 후 법정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대장동 일당'에게서 아들 퇴직금 등의 명목으로 거액의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곽상도 전 국회의원이 8일 오후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 공판을 마친 후 법정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대장동 일당, “우리 힘의 근원은 검찰

가히 검찰 권력의 전성시대이다. 이를 역설적으로 웅변해주는 것은 바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대장동 사건이다. <뉴스타파> 봉지욱 기자의 취재에 따르면, 대장동 사건의 핵심 관련자인 남욱과 정영학은 녹취록에서 우리 힘의 근원은 검찰이라 말했고, 곽상도 전 의원 아들에게 준 50억 원 사건으로 불거진 ‘50억 클럽이 대부분 검사장급 이상 다섯 명의 전직 고위 검찰 출신이며(사실 곽상도 전 의원 역시 검찰 출신이다), 이들을 통해 남욱 등이 사업자로 되기 전에 관련된 몇 건의 사법 리스크를 해결했다.

특히 박영수 특검은 대장동 사건의 주범김만배를 대장동 사업에 참여시킨 뒤 그가 초기 화천대유를 만들 때 5억 원을 주는 등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주진우 라이브] 봉지욱 기자 김만배, 최서원 통해 은행권 문제 해결했다수사해야’”, KBS NEWS, 2023118. “남욱·정영학 우리 힘의 근원은 검찰... 만배형 박영수가 불러왔다’”, 오마이뉴스, 2023112).

이는 이미 대장동 사건에 단순히 관련된 정도가 아니라 전체 사업을 기획, 지휘하는 주역으로 나선 것으로서 이전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권 당시 군인 출신 실세들이 각종 이권 사업을 주도하고 개입했던 행태를 그대로 연상시키는 행태이다.
 

이 나라 관료제는 일제 잔재와 박정희 잔재의 유산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1894년 조선에서 발발한 동학농민혁명을 빌미로 삼아 조선에 무단 진출하여 청나라와 전쟁을 감행하였다. 그들은 동시에 군대를 동원하여 불법적으로 경복궁을 습격, 서쪽 영추문을 부수고 침입하여 점령하고 고종을 감금하였다. 당시 일본공사 오토리(大鳥) 공사는 조선 정부에게 이른바 <내정개혁방안 강령 5개조>를 강요하였다. 동시에 스기무라(杉村) 서기관은 대원군과 직접 접촉하면서 강박하고 회유하였다. 일제의 이 행위들은 1876년 강화도 침입 이후 20년에 걸쳐 조선 침략과 정복을 준비하고 치밀한 연구 끝에 나온 산물이었다.

일제 잔재가 청산되지 않고 오히려 강화된 이 땅의 관료제

이 과정에서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었고, <의정부 관제안>1894628일 가결되었으며 720일에 정식으로 시행되었다. 일본식 관료제도의 도입이었다. 관제 개혁에 서기관을 비롯하여 사무관, 주사, 서기 등 새로운 관제에 의한 명칭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실제로도 그 무렵 새로 부임한 지방관은 조선의 국왕이 아니라 일본에 의해 임명받았다는 비난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갑오경장 뒤 대원군을 축출하고 같은 날 제정, 공포한 것은 바로 칙령 제1<공문식(公文式)>이었다. <공문식>에 의하여 칙령과 의정부령, 각부령(各部令) 등 근대적 법령이 등장하였다. 공문서제도를 근대적으로 개편한다는 명분이었고, 이에 따라 문서 사무 역시 일본을 그대로 모방하였다. 그리하여 기안문(起案文)을 비롯한 모든 공문서에 일본 메이지(明治) 시대에 대일본제국 헌법을 비롯하여 강력한 권위가 요구되는법령의 문장이나 교과서 등에서 이른바 문어(文語)’체를 강제로 적용시켜 문장의 끝은 ‘~으로 맺도록 하였다. 본래 구한말 시기에 순한문 문장의 시기를 지나 한글이 사용되던 초기에는 거의 모든 글이 ‘~니라로 끝맺음을 하고 있었다. 반면 일본의 문어문장들은 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함(天皇陸海軍統帥, 대일본제국헌법11)” 등의 형식으로 끝을 맺고 있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를 생략하고 ‘~’, ‘~으로 문장을 맺는 형태였다.

친일 청산이 이뤄지지 않은 미군정, 이승만 시기

해방 이후 남한 단독정부 수립 이전까지 3년간 남한을 통치한 미군정은 친일파 숙청은 군정의 업무가 아니라고 일축했다. 그들에게 해방된 약소국의 민족 감정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친일 관료와 경찰, 군인은 자리를 그대로 이어받거나 오히려 승진했다. 미국에게는 치안 유지와 소련과의 냉전체제 경쟁이 중요했다. 친일부역자 처단보다 어디까지나 좌파 세력의 척결이 시급했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 역시 마찬가지였다. 19459월 스탈린은 민족주의적 감정에 호소해 친일파 청산 문제를 통해 대중의 정치적 지지를 끌어내라는 비밀 지령을 좌익 세력에게 내려보냈다.

해방 후 남한에는 친일파 청산을 위하여 반민특위가 설치되었다. 반민법 제5조는 친일 경력이 있는 사람은 공무원이 될 수 없다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이승만의 정치적 기반을 뿌리째 흔드는 반민법은 반민특위와 이승만의 숙명적 대결은 필연적이었다. 결국 이승만 정부 치하에서 반민특위는 무력화되고 결국 해체되고 말았다.

194966, 40여 명의 경찰관이 반민특위를 습격, 35명의 특위 인사를 붙잡아 고문한 사건은 이승만의 지시와 김태선 시경국장의 지휘 아래 조직적으로 이뤄졌다. 이승만은 69일 회견에서 내가 특별경찰대를 해산시키라고 경찰에 명령했다고 실토했다. 결국 대통령을 등에 업은 친일 경찰이 국회를 기반으로 한 특위를 무력화한 것이다.

이승만은 국내 기반이 없는 자신의 정치적 우군이 친일 세력이고, 민족의 절반을 차지하는 친일 부역자 처벌은 분열과 혼란을 초래하는 부질없는 짓이라고 천명하였다. 경찰과 군 간부 대부분이 친일 부역자였다. 경찰의 경우 194610월까지 임명된 서울 시내 10개 경찰서장 중 9명이 친일 경찰 출신이었다. 194611월까지 경찰 간부 비율을 보면 경위 이상 1157명 중 82%949명이 일제강점기 경찰 경력자였다. 하위직의 30%도 경력자였다. 군대 역시 일본군과 만주군에 복무했던 친일파들이 군의 요직을 완전히 장악했다.

미군정은 효율적인 남한 통치를 위해 숙달된 관료와 경찰 등이 필요했고,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 협력하거나 일본으로부터 수혜를 받은 자들과의 이해관계의 일치는 이 땅에 일제 잔재 청산을 원천적으로 막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박정희, 관료조직을 전시동원 체제의 실행조직으로 만들다

이러한 상황은 박정희 군사정부에 이르러 오히려 더욱 강화되었다. 분단에 기인하고 있는 냉전은 남한에 반공국가의 수립을 가져왔고, 친일파는 반공의 우산 아래 자신들의 신분을 세탁하고 유지하며 오히려 국가의 요직에 진출하였다. 이렇게 친일과 반공은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하면서 군사쿠데타 세력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 강화하기 위한 유용한 도구였다. 냉전 이데올로기의 강화와 재벌 위주의 경제성장 정책은 군사정권 유지의 두 축이었다.

더구나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시절 일제의 전시동원 체제를 이상적 체제로 상정하고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일찍이 1931년 만주 침략을 신호탄으로 하여 1937년에는 중일 전쟁을 일으켰으며, 1941년에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일제는 대륙 침략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 조선에서도 전시 동원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국가 총동원이란 전시에 전쟁 수행을 달성하기 위해 모든 인적 및 물적 자원을 동원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이에 따라 전시에 국가 총동원상 필요할 때에는 제국 신민을 징용하여 총동원 업무에 종사하게 할 수 있도록 하였다.

19615.16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는 국가 전체의 전시동원 체제를 지향하면서 공무원 조직을 그것을 실행시키는 핵심조직으로 삼고자 하였다. 공무원 조직은 사실상 2의 군대조직으로서 그가 지향했던 전시동원 체제의 실행 조직이었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먼저 이승만 정부 시기 공무원 임용에 일반적이었던 정실주의와 엽관주의를 철폐하고 임용제도를 자격시험제에서 채용시험제로 전환하였다. 이는 평생 일본을 롤모델로 삼았던 박정희가 시험에 의한 일본의 공무원 채용 방식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다. 공무원 채용시험은 공개경쟁 채용(공채)’특별채용으로 구분되었다. 이어 행정고시, 외무고시, 기술고시 등의 채용 고시와 특별승진 시험, 공개경쟁 승진시험, 외부채용을 위한 특별채용시험이 제도화되었다.

이와 동시에 권고에 의한 면직 금지, 직제 및 정원 개폐와 예산감소에 따라 면직된 공무원을 신규 채용하는 등 공무원의 신분보장을 강화하였다. 또한 국가공무원법을 개정하여 법령에 의하지 아니하는 한 본인의 의사에 반한 신분상의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하여 공무원에 대한 신분보장을 규정하였다. 이렇게 이 땅의 관료조직은 박정희 권력의 충견(忠犬) 조직으로서 양육되었다. 그리하여 이 땅의 관료집단은 일제 잔재에 더하여 박정희 잔재가 덧씌워졌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관계자들이 23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경실련에서 관피아 실태 발표 및 공직자윤리법 개정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3.3.23 연합뉴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관계자들이 23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경실련에서 관피아 실태 발표 및 공직자윤리법 개정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3.3.23 연합뉴스

이어 전두환 군사정권은 박정희 정부를 계승하였다. 그는 공무원의 직위해제와 직권면직제도를 개선하여 직무수행능력 부족을 이유로 직위해제 처분을 할 수 없게 하는 등 신분보장 제도를 보다 강화하였다.

결국 지금 이 나라의 관료제도는 그 용어들과 명칭부터 사고방식 그리고 각종 관행 및 시스템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일제 잔재와 더불어 박정희 잔재가 반근착절(盤根錯節), 철저하게 결합하여 응결된 유산이다. 그것들은 전혀 청산의 과정이 결여된 채 오히려 더욱 강화되었고 확대재생산되어 왔을 뿐이다. 그렇게 우리 사회의 심각한 모순은 해결되지 못하고 계속 온존되고 축적되었던 것이었다.

관료주의를 오히려 강화시키고 있는 진보 진영

국회가 전에 추진했던 일하는 국회의 구상 중에 법안 체계·자구 심사는 국회사무처 또는 입법조사처 내 전문검토기구가 맡는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제까지 우리 국회는 이런 식으로 의원들의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현실적판단으로 혹은 높으신 내가 그런 귀찮은 일까지 해야 하나!”라는 권위주의와 귀차니즘으로 많은 일을 공무원, 관료에게 떠맡기는행태가 관행화되어왔다. 그러나 만약 이런 방식에 의하여 법사위 체계·자구 심사권을 국회 공무원에게 넘기게 되면 결국 그 권한을 장악한 국회 관료들의 힘만 키우게 되고 이로부터 온갖 왜곡과 폐단이 발생하게 된다.

세계 모든 나라 의회는 각 상임위에서 소관 법률안에 대한 체계·자구 심사를 의원들이 직접 수행한다. 가령 미국 의회에서는 각 상임위원회 내에 축조심사회의(Mark up)’가 구성되어 여기에서 수정안 작업과 체계ㆍ자구 심사의 기능을 수행한다.

무릇 자신의 권한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게되면, 결국 그 사람에게 거꾸로 지배당하는법이다. 이런 식으로 공무원들에게 심판관의 권위와 권한을 넘겨주게 되면, 거꾸로 공무원들이 주인이고 의원은 그 허락을 받는 하부로 전락하게 되기 마련이다. 만약 이 구상대로 진행하게 되면 반드시 법안 체계·자구 심사라는 업무를 내세운 또 하나의 무소불위의 강력한 관료집단이 형성되고 군림하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 지점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법안 체계·자구 심사는 국회사무처 또는 입법조사처 내 전문검토기구가 맡는다.”는 내용이 대표적인 진보적 시민운동단체인 참여연대가 제안하고 추진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여야가 법제사법위의 체계자구심사권 오남용 문제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도 알았으니, 이제 국회에 이렇게 요구해보면 어떨까요? 2. 국회 법제전담기구인 법제실에 체계와 자구 심사를 맡기면 돼!(참여연대, “국회의 절대반지는 법사위 체계자구 심사권?”, 2022. 6. 22, <오마이뉴스>).

우리 사회는 세계의 모든 의회에서 의원들처럼 마땅히 국회의원 자신들이 수행해야 하는 원칙과 기본을 무시하면서, 그것도 진보적 시민운동을 지향하고 실천한다는 곳에서조차 열심히 주장하고 있다. 얼마나 우리 사회 전체가 관료주의 문제에 둔감한지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증거이다. 참으로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면서 협심하여 우리 사회의 관료주의를 강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원칙을 무시한 이러한 임시변통 미봉책으로 일관하는 관행들이야말로 그간 우리 사회에서 각종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왜곡시키는 주범이었다. 본래 국회 전문위원 검토보고도 이렇게 원칙과 기본을 무시하고 미봉책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언젠가 유명한 한 환경운동가가 산림청의 대규모 벌목이 환경을 극도로 해치는 행위이며, 그것은 산림청 이익에 의해 추진된다는 글을 발표하자 자칭타칭 정책통으로 알려진 운동권 출신의 한 국회의원은 산림청 관료들이 제공한 것으로 보이는 자료와 통계를 근거로 하는 반론을 썼다. 물론 사실에 부합하지 않은 틀린글이었다. 야당이 된 지금도 산림청 관료들의 자료들을 그토록 신뢰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진보 진영의 관료에 대한 인식 수준, 관료에 대한 시각 그리고 그들과의 관계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현 주소다. 운동권 출신으로 국무총리를 지낸 김부겸도 관료에 대해 No를 한 적이 없었다.

<필자소개>

1970년대 말부터 90년대 중반까지 <광주백서>와 <학생운동의 전망>의  팸플릿을 집필하는 등 학생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몸담았으며, 90년대 말 중국 상하이 푸단(復旦)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2004년 국제관계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회도서관 조사관으로 근무했다. <변이 국회의원의 탄생>(2019), <대한민국 민주주의처방전>(2015), <사마천 사기 56>(2016), <논어>(2018), <도덕경>(2019) <이상한 영어 사전>(2022)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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