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료의 나라 ⑥] 법치의 가치, 권력 만끽 아닌 그 제한에 있어
꼬리가 머리를 흔들다
본래 행정사무 업무란 보조적 업무여야 한다. 그리하여 사무 및 관리라는 본연의 업무에 충실함으로써 그 명(名; 이름)과 실(實; 내용)이 부합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현실에서는 전반적으로 행정사무 업무가 오히려 상위에 군림하고 있는 상황이다.
국회사무처가 대표적인 사례다. 독재 권력이 국회를 하수인 혹은 거수기로 전락시키기 위하여 도모한 국회사무처 소속 전문위원의 ‘검토보고’라는 국회 입법관료에게 과도하고 ‘위헌적인’ 권한을 장악하고 있다. 작금에 방통위 사무처를 비롯하여 감사원 사무처, 권익위 사무처, 민주평통 사무처 등등 각종 공공 기관의 ‘사무’처들이 그야말로 기관의 ‘사무’를 완전히 장악한다. 가히 ‘사무처’의 세상이다. 꼬리가 머리를 흔든다. 한편, 법원행정처는 법관의 재판을 보조한다는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 인사관리와 기획조정 업무를 장악하면서 스스로 법관에 대한 감독기관으로 군림하였다.
우리 사회의 관료 조직은 행정사무 부서가 인사와 예산 그리고 각종 사무분담 업무에 의거해 본디 문자 그대로 단순한 행정사무 보조기관이지만 실제로는 상위에 군림하면서 실질적인 주도권을 행사하는 경우가 일반화되었다. 그야말로 주객전도요 본말전도이다. 공공성과 가치와 철학은 사라지고, 대신 오직 사무와 행정 그리고 규정이 우뚝 군림하면서 관치주의가 보편적으로 관철된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는 사실상 관료들이 지배하는 관치(官治), 관헌(官憲) 국가이다. 대한민국은 대표적인 행정 비대 국가다. 정책 하나하나마다 수십 수백 만 명의 이해가 걸려 있다. 관료 집단이 가진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본래 ‘관(官)’이라는 한자어는 宀과 퇴(師의 왼쪽 부분)가 합쳐진 문자로서 宀은 ‘덮다’의 뜻이고 퇴는 眾, 즉 무리 衆의 의미이다. 결국 ‘관(官)’이란 “무리, 백성을 다스리다, 지배하다”는 ‘지배와 군림’의 의미를 갖는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지적해야 할 점은 지금 모든 공무원들이 사력을 다해 도달하고자 하는 ‘관리관’ ‘이사관’ ‘서기관’ ‘사무관’ 등 고위직 명칭은 이른바 ‘갑오개혁’ 등 일제 강점기 직전 일본에 의해 강제 수입된 일제 잔재라는 사실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근대 법제가 입헌군주 국가인 일본의 식민지 강점기에 만들어졌고, 그 뒤에도 그것을 벤치마킹했기 때문에 우리 법제에는 관헌국가적 잔흔이 너무나 많다. 예를 들어, “**을 하고자 하는 자는 허가를 얻어야 한다”는 식으로 행정청의 권한을 간접적으로 규율하는 방식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는 국민을 행정권 발동의 단순한 수동적 존재로 설정하고 있을 뿐이다.
관치 관헌 국가, 민주주의에 반한다
독일의 약사법은 의약품 제조 허가 신청에 대해 행정청은 일정한 사유에 해당할 경우에만 거부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약사법의 경우에는 “의약품 제조를 업(業)으로 하려는 자는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시설기준에 따라 필요한 시설을 갖추고 총리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식품의약품안전처장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약사법 제31조 1항>”라고 규정한다. 이렇게 국민들은 단지 행정처분이 내려지기만을 기다리는 수동적 존재로 전락된다.
봉건국가에서 관료 집단이란 유일한 주권자인 왕의 직속기구로서 행정법만으로도 공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국민주권을 선언한 현대 국가의 민주주의 헌법하에서는 행정법만을 근거로 한 공권력 행사는 불가능하다. 바로 ‘의회유보 원칙’으로서 이는 행정작용 중에서 국민에게 중요하고 본질적인 사항은 의회가 제정하는 법률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즉 국민에게 중요하고 본질적인 사항에 대한 결정은 행정부가 할 수 없으며, 민주적 정당성을 가진 의회가 제정하는 법률에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예를 들어, 국회에서 사업의 근거를 따지는 의원에게 관료들이 “설치법 ○조에 의거한다”라고 답변을 하면 질의를 했던 의원도 “법적 근거가 있었군요”라며 넘어가고 있다. 이렇게 하여 관료 집단은 무한정의 재량권 행사가 가능해지고 행정 만능 관료 지배사회의 철옹성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지속적으로 작동된다.
관료들은 재량이 주어지는 규제 권한과 예산 배분권을 통하여 각종 인허가의 취소 혹은 보조금 삭감 등의 조치로써 상시적으로 모든 ‘민간인’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또 보복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나라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관(官)주주의다. 정치적으로 임명되는 장관들은 언제나 ‘손님’일 뿐이다. 물론 겉으로는 관료들로부터 항상 ‘융숭한’ 대접은 받는다.
1980년대 길고 길었던 군사정권이 마침내 종식된 뒤 ‘법’과 ‘규정’이 사회를 지배하는 ’87 체제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법치주의’의 명분하에 관료 집단의 지배력은 급속하게 강화되었고 일상화되었다. 하지만 이렇듯 ‘시험 권력’이 ‘선출 권력’을 사실상 조종하고 지배하는 이러한 사회는 민주주의가 실종된 사회다.
황제와 아전이 천하를 ‘공치(共治)’하다
중국의 전통 정치에는 관(官) -관리와 리(吏) -아전의 구분이 있었다. 원래 중국의 관리 제도에는 이 양자가 구분되지 않았으나 한족을 차별한 몽골의 원나라 시대에 정부 고위직은 모두 몽골인이 담당할 때 중국인을 서리(胥吏)로 뽑아 보좌하도록 한 뒤로 명나라 시대부터 관리와 아전의 구분은 보편화되었다.
이들 아전이나 서리는 관리로 승진할 수 없었다. 이들은 정부 기구의 가장 하위의 계급으로서 사실 관부(官府)의 정식 관원으로도 인정받지 못했지만 동시에 반드시 관부의 허가를 얻어야만 했다. 그리고 사회적 지위가 낮아 일반적으로 멸시를 받는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이들 아전들이 정치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히 큰 것이었다. 이들은 인명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었고, 세금을 더 걷을 수도 덜 걷을 수도 있었으며, 어떤 공사든지 중단시킬 수도 있었고 아니면 더 크게 짓도록 할 수도 있었다. 반면 과거를 급제하여 중앙에서 파견된 고위관리들은 오직 상층 관리들을 다스리기 위한 직위였고, 모든 사무는 이들 아전에게 넘겼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지방에서 극심했다. 아전들은 지방의 실제 정황에 매우 정통했고 관아의 하부 행정 역시 오직 아전들만이 이해하고 처리해낼 수 있었으므로 지방으로 파견되는 관리들은 이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독서인’들은 도무지 이들과 비교될 수 없었다. 시(詩)나 부(賦)와 같은 ‘탁상공론’만으로 시험을 보는 과거에 합격한 ‘독서인’들은 대부분 실무적인 행정능력을 갖출 수 없었고, 그러므로 현지 아전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관약이강(官弱吏强)’ 현상이 일반화되었다.
각 아문의 각종 조문들도 모두 아전들이 제정하였다. 조례의 제정은 대부분 이들의 의지가 조정(朝廷)의 의지로 전화되었고, 지방 관리의 임명은 대개 이부(吏部) 서리가 결정하였다. 특히 이들은 오랜 기간 특정한 한 곳의 지방에 근무하기 때문에 지방 토착세력과 반근착절, 결탁하여 당우(黨羽)를 조장했다. 또한 무슨 일이든 법조문의 ‘규정’만에 따라 처리하고 조문마다 그리고 글자마다 아래위로 따졌기 때문에 각종 사무 처리는 더욱 늦어졌다. 오늘날까지 이러한 현상은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지만, 사실상 실제적인 일체의 사무에 있어 이들 아전들이 전문가였고, 따라서 그 처리는 전적으로 이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 명말청초의 대학자인 황종희(黃宗羲)는 이러한 현상을 빗대어 “천하에 아전(吏)의 법만 있고 조정의 법은 없다”고 풍자하였다. 그리하여 사실상 ‘아전 독재’였다. 그러나 승진도 할 수 없는 이들 하급 관리들은 사회적으로 온갖 천대를 받았다. 그리고 이들 스스로도 등급이 낮고 천하다고 자인하면서 체면을 차리지 않고 갖은 부패와 악폐를 저질렀다.
법을 너무 잘 알았던 것이 ‘아전’들의 가장 큰 문제였다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 이래 황권(皇權)을 강화시키는 중요한 정책은 우선 중앙에서 각종 방법으로 재상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다음으로 지방에서는 각종 방식으로 지방 장관의 권한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방법은 지방 장관의 임기를 엄격하게 제한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근본적으로 지방 정무에 숙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아전들의 경우, 본래 사회적 지위가 낮고 또 독서인(讀書人)들처럼 대의명분이나 대중에 대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여 영원히 황제와 어깨를 겨누면서 세력화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황제는 기꺼이 이들 아전들과 천하를 함께 통치, 즉 ‘공치(共治)’하였다.
흔히 과거 중국에서는 법이 없고 중국인들은 법을 몰랐다고 평가하곤 한다. 그러나 사실 중국 정치의 전통적인 잘못은 이렇듯 너무 법을 잘 알아서 발생하였다. 조선 역시 완전히 동일한 실정이었고,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도 일상화된, 너무 익숙한 데쟈뷰다.
진시황의 엄혹한 ‘법치’, 제국을 멸망에 이르게 하다
중국의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하고도 ‘분서갱유’ 등 여전히 형벌과 힘에만 의존하였고 그러면서 스스로 몰락해갔다. 진시황 사후 권신(權臣) 조고(趙高)는 더욱 가혹한 ‘법치’를 휘둘렀다. 당시 거리를 지나는 사람 중 형벌을 받은 자가 반이나 되고 처형 받아 죽은 시체가 매일 길바닥에 쌓였을 정도였다. 이렇게 가혹하게 법을 운용하는 관리는 도리어 ‘충신’으로 치켜 세워졌다. 하지만 역사는 그들을 정확하게 ‘혹리(酷吏)’라 칭했다.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은 이 시기의 ‘법치’에 대해 이렇게 평론하고 있다.
“법률은 국가를 다스리는 하나의 도구이기는 하지만, 나라의 정치가 깨끗한가 아니면 혼탁한가를 결정하는 근본은 아니다. 옛날 진나라는 법망이 그렇게 치밀했건만 온갖 간사함과 거짓이 끊임없이 벌어졌으며 극한에 이르렀다. 그래서 상하 모두가 서로 속이게 되어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망국의 길로 치달았다. 도덕과 교육을 말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직위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치국(治國)의 도란 도덕의 제창에 있는 것이지 결코 엄혹한 법률의 실행에 있는 것이 아니다.”
동양의 고전 <관자(管子)>는 “법이란 천하의 정식(程式; 규격, 격식)이며 만사의 의표(儀表)이다”라고 하였다. 법률이란 사회의 각종 행위를 측정하는 기본 규범이라는 의미이다. 법률의 생명은 동일한 것은 동일하게, 상이한 것은 상이하게 취급하며 각자에게 올바르게 그 몫을 구현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법률은 무엇이 동일하고 어떠한 것이 상이한지를 끊임없이 분별한다. 법률이란 모든 사람이 신분을 포함하는 어떠한 차별도 없이 똑같이 지켜야 하는 것이다. 만약 법률이 권한을 쥔 자들의 마음대로 “선택적으로” 적용되게 되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그 법은 이미 신뢰를 잃게 된다. 법을 집행하는 사람은 법률을 집행하는 표준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자의적으로 법률을 집행하게 되면 곧 법의 권위는 무너지게 되고 그리하여 사회는 커다란 혼란에 빠지게 된다.
본래 법률의 목적 중 하나는 권력에 대한 제한과 억제에 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것이 바로 법률의 목적이며 핵심이다. 법률이 지배하는 ‘법치’에서 ‘권력의 자유’는 규칙에 의하여 저지되며, 이러한 규칙은 권력자가 의회에 의해 제정된 법률이 규정한 바 일정한 행위 방식, 절차에 의거하여 행사하도록 강제한다. 권력의 남용을 억제하고 국민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법치’를 내세우는 최고 권력자가 입만 열면 ‘자유’를 주창하고 애호하는 상황은 대단히 우려스러운 일이다. 법치의 가치란 ‘권력의 자유’를 제한하는 데 있는 것이지 그것을 만끽하는 데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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