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노현의 정치 새판] 비례성 높이는 게 정의로운 선거제
며칠 전 홍준표 대구시장이 본인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국회의장 정치개혁자문위가 비례대표 50인 증원을 전제하는 권고안을 냈다는 보도가 난 직후였다. 그는 쌍심지를 돋우며 결사반대의 뜻을 밝혔다. 그럴 리는 없지만 만약 국힘당이 수용한다면 지도부 퇴진운동을 불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홍 시장의 페북 글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다음날 김기현 당대표와 주호영 원내대표는 입이라도 맞춘 듯이 의원정수 증원에 대한 타협 없는 절대반대 의지를 표명했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심지어 헌법상 국회의원 정수를 200인 이상으로 정한 취지는 299명을 넘으면 안 된다는 뜻이라는 자의적인 해석을 덧붙이며 의원정수 증원 위헌론마저 제기했다. 판사출신이라는 사람이 해도 너무 한다.
실상은 비례대표 확대 반대
김기현 국힘당 대표와 주호영 원내대표가 반대하는 것은 의원정수 증원은 물론이고 그 배후에 숨은 비례대표제다. 정당득표율에 따라 의석수가 정해지는 비례대표제를 지역구의석을 줄이지 않고 강화하려면 의원정수를 늘려서 비례대표의원 수를 늘려야 한다. 국힘당은 의원정수 증원 반대를 내세우면서 실은 비례성을 강화하는 방향의 선거제도 개편안을 모두 반대하는 것이다. 여론조사를 해보면 의원정수 증원에 반대하는 비율이 80% 안팎으로 일관되게 압도한다. 국힘당은 이런 여론조사결과를 내세워서 비례대표제를 반대하고 소선거구제를 결사적으로 옹호한다. 국힘당이 소선거구제 아래서 지난 70년 동안 60년도 넘게 제1당의 지위를 누려왔기 때문일 것이다. 달리는 설명이 안 된다.
나는 김기현 당대표와 주호영 원내대표에게 국힘당이 소선거구제의 불비례성에 더할 나위 없이 된통 당했던 2018년 광역의회 선거결과와 2020년 총선 결과를 상기시켜주고 싶다. 2018년 수도권 광역의회 선거에서 국힘당은 서울, 경기, 인천에서 모두 10% 미만의 의석을 얻어서 교섭단체 구성에도 실패했다. 민주당은 90% 이상을 싹쓸이하며 문자 그대로 일당독재를 했다. 세 군데 모두에서 정당득표율은 5% 차이도 나지 않았다. 2020년 총선에서도 국힘당은 수도권에서 궤멸 수준의 참패를 겪었다. 서울, 경기, 인천에서 각각 국회의석 수의 15% 안팎을 간신히 건지고 85% 안팎 국회의석을 민주당에 몰아줬다. 명목상의 정당득표율 차이는 오히려 국힘당이 0.4% 앞섰는데도 그랬다.
위의 선거결과는 51% 지지율 정당이 49% 지지율 정당을 모든 지역구에서 이길 수 있는, 소선거구제에 고유한 이론적 불비례성이 현실세계에서 그대로 나타난 선거참사다. 이 정도로 무지막지한 부정의와 억울함을 겪었으면 국힘당이 정신 차리고 소선거구제를 버리고 비례성이 보장되는 정의로운 선거제도로 바꾸자고 농성을 해도 시원찮을 것만 같다. 하지만 국힘당은 아직도 막무가내로 소선거구제를 고집한다. 2018년이나 2020년은 대통령 탄핵과 코로나 방역으로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하고 소선거구제가 국힘당에 유리하다고 굳게 믿는 게 틀림없다. 영남 인구가 호남 인구의 2배가 넘기 때문에 수도권만 반을 잘라먹으면 무조건 소선거구제가 국힘당에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탓일 게다.
그래도 집권 경험이 50년도 넘는 공당이 순전히 유불리만 얄팍하게 계산할 리는 없고 뭔가 논리가 있을 것이다. 홍준표 시장의 페북 글이 의원정수 증원에 절대 반대하는 논리를 제공한다. 세 가지다. 첫째, 미국은 인구가 3억 2000만인데도 의원 수가 하원 435명, 상원 100명, 총535명에 지나지 않는바, 미국 하원 기준을 적용하면 우리나라는 국회의원을 300명이 아니라 80명만 가지면 된다는 것이다. 둘째, 비례대표의원은 사실상 ‘임명직 국회의원’이라는 것이다. 셋째, 비례대표제는 내각제에나 어울리지 대통령제와는 맞지 않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자당 유불리 계산에 갇히지 말길
홍 시장이 우리나라 국회의원 300인을 미국 연방상하원의원 총535명(상원 100명과 하원 435명)과 비교한 것은 범주 오류를 범한 것이다. 미국에서 형벌이나 조세를 부과하는 법률제정권자는 원칙적으로 50개 주(state)의 상하원의원들이다. 연방의 관할권은 보충성의 원칙에 따라 원칙적으로 외교안보와 주간통상에 국한된다. 연방상하원의원은 연방관할권 안에서만 입법자다. 미국의 주를 state(국가)라고 부르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미국의 50개 주는 하나하나가 국가라고 봐야 한다.
미국의 주는 어떤 의미에서도 우리나라의 지방자치단체나 지방정부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지방자치단체가 국가 아래에 있듯이 미국에서도 시티, 카운티, 보로우, 타운 등 지방자치단체(지방정부)는 모두 주정부 아래에 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나라에서 국회의원만이 독점적으로 갖고 있는 법률제정권, 조세부과권, 예산통제권, 국정조사권, 인사동의권, 탄핵권 등을 두루 가진 미국 사람은 미 연방상하원의원은 물론이고 50개 주의 상하원의원 전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나라 국회의원 300인은 미국으로 치자면 연방상하원의원 전원과 50개주 상하원의원 전원이 가진 권한을 독점 행사한다.
우리나라 국회의원에 비하면 미국의 연방의원이나 주의원은 사실 별거 아니다. 미국의 국회의원은 연방의원 아니면 주의원이지 둘 다 겸하지 못한다. 특정 주의 주의원이지 다른 주의 주의원을 겸하지 못한다. 그것도 상원의원 아니면 하원의원이지 둘 다 겸하지 못한다. 우리나라 국회의원은 미국으로 치면 연방의원과 50개 주의원을 겸하고 연방과 50개 주의 모든 의회에서 상원의원과 하원의원을 겸한다.
이제 우리나라 국회의원이 얼마나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는지, 그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기에는 얼마나 사람 수가 모자라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게다. 이게 다 홍준표 시장 덕분이다. 유감스럽게도 홍 시장은 이런 사실을 잘 몰랐던 것 같다. 아니면 국회의원의 희소가치와 특권을 유지하려고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 그냥 지나칠 뻔했다. 미국 50개 주에는 주 상원의원이 총1973명, 주 하원의원이 총5413명으로 총7386명이고 연방 상하원의원 535명까지 보태면 7921명이다. 미국에서 7921명이 하는 일을 한국에서 300인이 하는 셈이다. 인구비례로 치면 총 1288명이 필요하다. 홍 시장이 미국 기준을 마치 글로벌 스탠더드 또는 OECD 스탠더드처럼 인용했기 때문에 하는 말인데 미국 기준을 따르자면 우리나라 국회의원 수는 터무니없이 작다.
그러니 최소한 향후 4년 동안 국회의원 관련 예산을 현 상태에서 동결하는 조건으로 비례대표를 30명이나 50명 늘린다고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오히려 국민대표기관의 대표성이 높아지고 다양성이 늘어나며 행정 감시역량이 강화된다. 무엇보다도 그래야 연동형비례대표제 아래서 각 정당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민심을 얻은 만큼만 의석을 가져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어느 정당도 지난 2018년 지방선거 당시나 2020년 총선 당시의 국힘당처럼 세상에 억울할 일이 없을 것이다.
당 지지율에 비례해서 의석수가 결정되면 정당은 민심을 얻기 위해 더 치열하게 경쟁하게 돼있다. 이래야 국민 선택이 의미 있는 정책정당으로 가는 길이 열리고 국민 선택이 강화되는 다당제로 가는 길이 열린다는 사실을 모두가 안다. 그럼에도 국힘당이 한사코 이 길을 가로막는 이유는 당장 소선거구제가 유리하다는 잔머리 계산 때문인데 국힘당의 얄팍한 이해관계를 정치 불신에 뿌리를 둔 일반시민의 의원정수 증원 반대 정서에 편승해서 관철시키고자 한다는 점에서 나쁜 파퓰리즘이다.
국회의원 불신 정서, 기득권 보호에 이용하지 말라
국힘당의 수많은 ‘홍준표’들이 소선거구제를 선호하는 두 번째 이유도 파퓰리즘에 뿌리를 둔다. 일반시민들은 지역구의원에 비해 비례대표의원에게는 정이 가지 않는다. 내 한 표를 줘서 내 손으로 뽑은 나의 대표자라는 직접적인 연결감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맞다. 비례대표의원은 지역구의원과 달리 정당명부 순위로 결정되기 때문에 국회의원이 되려면 정당 지도부에 잘 보이면 된다는 점에서 유권자 효능감이 없다. 한마디로 비례대표의원은 유권자들의 입장에서는 직접 손맛이 덜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국회의원이다.
이는 우리나라 유권자들이 워낙 ‘선거제도=소선거구제’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학교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보면 미국과 영국처럼 100% 소선거구제로만 국회의원을 뽑는 나라는 극소수다. 선진국과 개도국, 대통령제 국가와 내각제 국가를 가리지 않고 그렇다. 우리나라가 그랬듯이 10%~20% 수준의 병립형 비례대표 의석을 마련한 나라도 드물게 있지만 과반수 국가는 이미 다양한 형태로 연동형비례대표제를 실시하고 있다. 그런 나라들에서는 비례대표의원, 즉, 정당명부의원이 기본이고 다수다.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처럼 정당명부의원이 전부인 나라도 적지 않다. 요컨대, 소선거구 중심의 불비례대표제를 뒤로 하고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채택한 많은 나라에서는 정당명부의원이 민주적 대표성과 정당성에서 지역구의원보다 우월한 것으로 본다.
홍 시장이 정당명부 비례대표의원들을 임명직 국회의원이라고 비아냥거리며 노린 것은 정당 지도부가 일방적으로 비례대표 후보의 순번을 결정해온 관행에 대한 유권자의 반감을 부추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관행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실제로 비례대표제를 채택한 나라들 가운데는 정당명부 순위를 당원투표로 정하게 하든가 유권자들이 투표할 때 선호순위를 기재하도록 함으로써 당원과 유권자의 효능감을 높이는 데 성공한 나라들이 제법 된다.
엄연히 전국단위 혹은 권역 단위의 정당투표로 뽑히는 선출직 국회의원이라는 점을 잘 알면서도 임명직 국회의원이라고 폄하하는 홍 시장의 행태 역시 나쁜 파퓰리즘의 표현이다. 비례대표제에 대한 반대를 일반시민의 국회의원 불신 정서에 기대 교묘하게 은폐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대부분의 정당명부의원들은 각 직능분야의 스타급 인사들로 영입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홍 시장의 폄하 발언은 무례하기 짝이 없는 발언이다. 홍 시장이 비례대표 동료 의원들에게 사과해야 마땅하다.
여기서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지역구의원들이 비례대표의원들을 한번 하고 말 뜨내기 의원으로 낮춰보고 비례대표의원들이 지역구 국회의원들을 지역구 관리에 정신없는 지방의원에 가깝다고 낮춰보면 국회가 하향평준화 될 뿐이다. 내가 보기에 지역구의원들과 비례의원들은 민주적 대표성에서 보완 관계에 있는 지역대표와 직능대표로 서로를 존중해야 맞다. 다만 지역구 의원들도 소선거구 불비례대표제를 줄이고 정당득표율 비례대표제를 강화하는 데 이견이 없기를 바란다.
셋째, 비례대표제가 내각제 국가에나 어울린다는 홍 시장의 주장 역시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중남미 대통령제 국가들이 대부분 연동형비례대표제를 실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틀린 말이다. 홍 시장 주장을 선의로 해석하면 대통령제에는 양당제가 더 적합하고 양당제에서는 굳이 비례대표제를 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경험하는 것처럼 대통령제 아래서도 비례대표제를 안 하고 소선거구제를 하면 불비례성 문제와 사표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어서 비례대표제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홍 시장 주장이 함축하는 바와 달리 대통령제가 반드시 양당제를 요구하거나 양당제에서 더 기능하기 좋은 것도 아니다. 특히 양당제 아래서 가끔 성립하는 여소야대 국회는 무조건 반대만 일삼는 비토크라시 이상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국민의 관점에서는 재앙에 가깝다. 비례대표제를 하면 다당제로 가는 문이 열리지만 다당제 아래서도 여당이 단독으로 혹은 정당연합을 통해 얼마든지 안정적인 의회 다수파를 구성해서 대통령을 뒷받침할 수 있다. 중남미 대통령제 국가들이 다당제 속에서 나름대로 기능하는 이유다. 물론 이 경우 내각에는 연합정당 몫이 몇 생길 것이다.
홍 시장은 미국에도 비례대표제가 없지 않느냐는 얘기를 하고 싶을 테지만 미국은 여러 가지 특수성이 많은데다 상대적으로 제도보수주의가 강해서 다른 나라들이 쉽게 모델로 삼기 어려운 나라다. 오늘날의 미국은 대통령제 및 소선거구제와 결합된 철저한 양당 사이의 정권교체가 거듭되며 정치적 상상력과 문제해결 역량이 떨어지고 있어서 이제 홍 시장처럼 미국 헌정제도가 당연한 판단기준이라도 되는 듯이 전제하고 논지를 전개하는 방식은 더 이상 약발이 안 먹힌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요컨대, 홍준표 시장의 의원정수 증원 반대 및 비례대표제 반대 논거는 하나도 맞는 게 없다. 일반 국민의 국회의원 불신과 혐오 정서를 교묘하게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데 사용할 뿐 사표를 없애고 민심을 그대로 반영하겠다는 진심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나쁜 포퓰리즘의 전형을 보여준다. 역시 홍준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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