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램 속에서 찾은 빛깔

더위가 끊임 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철마디(절기)로 더위가 물러간다는 간더위(처서, 處暑)도 지났고 어느덧 가을로 들어서는 들가을(8월)도 끝자락이지만, 막바지 더위는 쉬이 가실 줄을 모릅니다. 이런 날이 이렇게 이어지니 몸도 마음도 지치고, 힘들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한낮의 쨍한 햇살 아래에서는 누리 모든 것의 겉모습이 아른거리며 희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쩌면 모든 것이 뚜렷할 때보다 이렇게 조금은 흐릿하고 가물가물한 날에야 비로소 우리가 더 잘 알게 되는 빛깔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맑고 깨끗한 흰빛이 아닌, 그와 가까운 어딘가에 서 있어 가물가물한 빛깔을 품은 토박이말 '해읍스름하다'를 만나봅니다.

 

[오늘의 토박이말]해읍스름하다
[오늘의 토박이말]해읍스름하다

'해읍스름하다''를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산뜻하지 못하게 조금 하얗다'라고 풀이하며, 고려대학교 한국어대사전에서는 '(물체가) 빛깔이 썩 맑지 못하고 조금 희다'라고 풀이를 합니다.

새하얀 눈이나 깨끗한 종이의  흰색이 아닙니다. 맑고 깨끗한 흰빛에 다른 빛깔이 아주 살짝 섞여 들어 그 산뜻함과 뚜렷함을 잃은 바로 그 빛깔을 나타낼 때 쓸 수 있는 말이 '해읍스름하다'라고 생각합니다. 쌀뜨물이나, 여러 번 입어 낡아진 빛바랜 흰 옷빛을 떠올리면 그 느낌에 가깝지 싶습니다. 이보다 좀 더 어둡고 짙은 느낌을 주는 큰 말로는 '희읍스름하다'가 있습니다.

제가 이 말을 알려드리면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우리 말집(사전)에 이 낱말을 쓴 보기월(예문)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이제는 우리 삶에서 그만큼 멀어졌다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보기월 없다는 것은, 오히려 오늘 이 말을 알게 된 여러분이새로운 보기월의 임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나날살이 속에서 이 말을 이렇게 되살려 써 보면 어떨까요?

밤을 새워 일을 한 아들의 해읍스름한 얼굴을 보니 마음이 짠했다.
할머니의 손때가 묻은 무명천이 해읍스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새벽안개 속에서 해읍스름하게 드러나는 냇물의 모습이 마치 꿈에서 본 것 같았다.

'해읍스름하다'는 우리에게 그저 하나의 낱말을 알려주는 것을 넘어, 누리를 얼마나 더 꼼꼼하게 바라볼 수 있는지를 깨닫게 합니다. 모든 것이 산뜻하고 깔끔해야만 좋은 것은 아니라고, 때로는 맑지 않고 산뜻하지 않은 빛깔 속에 더 깊은 이야기와 때새(시간)가 담겨 있다고 말해주는 듯합니다.

이제 '해읍스름하다'라는 말을 쓸 때마다 우리는 그저 빛바랜 흰색을 떠올리는 것을 넘어,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생각해 보게 될 것입니다. 이 멋진 토박이말을 우리 삶 속에서 함께 되살려주시지 않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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