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쓱한 얼굴 너머, 마음을 먼저 읽어주는 말
문득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본 적 있으신가요? 또는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 적은요? 즐거운 날들 속에서도 문득문득, 고단한 삶의 자국이 옅은 그늘처럼 얼굴에 드리울 때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마음에 담아 볼 토박이말은 바로 그 어름을 아프고도 아름답게 담아내는 말, '해쓱하다'입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해쓱하다'를 "얼굴에 핏기나 생기가 없어 파리하다"라고 그 뜻을 풀이합니다. 하지만 이 짧은 글귀에 다 담기지 않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해쓱하다'는 그저 핏기가 가신 모습을 넘어, 그 사람이 겪어냈을 고단한 시간과 애쓰는 마음까지 넌지시 비쳐주는 말입니다. 밤을 새워 무언가에 몰두한 뒤의 뜨거운 마음의 자국일 수도 있고, 풀리지 않는 시름에 잠 못 이룬 밤의 무게일 수도 있으며, 누군가를 향한 애틋한 그리움의 깊이일 수도 있습니다.
비슷한 느낌의 한자말 '창백(蒼白)하다'가 마치 아픈 사람을 살피듯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을 가리키는 데 가깝다면, '해쓱하다'는 그 안에 안타까움과 걱정, 보듬어주고 싶은 따스한 마음이 스며 있다고 할까요? 뜻이 비슷한 말로 자주 쓰는 '핼쑥하다'는 '해쓱하다'보다 조금 더 센 느낌을 주며, 그 야윈 만큼이 더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우리 말꽃 지음몬(문학 작품)은 이 고운 말을 놓치지 않고 붙들어 씁니다. 현진건 님의 소설 〈운수 좋은 날〉에서, 김 첨지가 아픈 아내를 두고 인력거를 끌며 연신 좋은 운수를 맞닥뜨리는 그 이름난 대목을 떠올려 봅니다.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컬컬한 목에 모주 한 잔을 더 들이켜고 김 첨지는 해쓱한 아내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 '해쓱한'이라는 낱말 하나가 글자보다 더 큰 무게로 우리 가슴을 쿵, 하고 내려앉게 합니다. 운수 좋은 날의 왁자지껄함과 병든 아내의 위태로운 얼굴빛이 겹쳐지면서 슬픈 앞날의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이지요. 이렇듯 '해쓱하다'는 한 사람의 살아온 이야기를 품는 힘을 지닌 말입니다.
이제 이 말을 우리 나날살이로 가져와 볼까요?
형광등 불빛 아래, 복사기 앞에서 만난 일동무의 얼굴이 유난히 해쓱합니다. "아무개 님, 어젯밤에 잠 못 주무셨어요? 얼굴이 해쓱해 보여서요." 이 한마디는 그저 건네는 인사말을 넘어, 그대의 애씀을 내가 알아주고 있다는 따뜻한 찻잔 같은 다독임이 될 수 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벗이 지난날 같지 않게 웃음기가 없고 얼굴이 해쓱하다면, '무슨 일 있구나' 하는 마음의 낌새가 켜집니다. 그저 "힘내"라는 말보다, "얼굴이 많이 해쓱해졌네. 말없이 옆에 있어 줄 테니, 기대고 싶을 때 기대."라며 어깨를 내어주는 깊은 마음 나눔의 첫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
한창 잘 뛰놀던 아이가 밥투정을 하며 얼굴이 해쓱해졌을 때, 어버이의 눈에는 그것이 아이의 몸이 보내는 낌새입니다. 아이의 이마를 짚어보는 그 손길에 담긴 사랑의 무게를 '해쓱하다'는 말은 오롯이 담아낼 수 있습니다.
어떠신가요? 새로 알게 된 토박이말 하나가 우리의 눈길과 마음을 얼마나 더 깊고 곱게 만드는지요. '해쓱하다'는 이제 여러분의 것입니다. 이 말을 그저 알고 쓰는 것을 넘어, 우리가 서로가 괜찮은지 살피는 따뜻한 눈길의 다른 이름으로 삼아보면 어떨까요?
이 아름다운 말을 나만 알고 있기에는 너무 아까우실 겁니다. 둘레 사람들에게 "오늘 '해쓱하다'라는 말을 배웠는데, 참 마음을 울리는 말 같아."라며 먼저 말을 건네보세요. 이 말은 한 사람의 입에서 다른 사람의 귀로, 한 사람의 손에서 또 다른 사람의 눈으로, 다시 그들의 마음으로 옮겨가며 차가운 누리를 덥히는 작은 온기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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