닳은 것들, 낡은 것들에 숨결을 불어 넣는 말

 

[오늘의 토박이말]해어지다
[오늘의 토박이말]해어지다

 여러분은 '해어지다'라는 말을 듣거나 보셨는지요? 아시는 분은 잘 아시고 쓰시지만 또 어떤 분은 고개를 갸웃하시거나, '헤어지다'를 잘못 쓴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소리는 비슷하지만, '해어지다'와 '헤어지다'는 아주 다른 뜻을 품고 있는, 꼭 가려 써야 할 우리말입니다. 오늘은 닳아가는 일몬(사물)에 깃든 시간과 이야기를 더욱 깊이 있게 어루만지는 말, '해어지다'와 그 짝꿍 말 '해어뜨리다'를 함께 알려드리겠습니다.

'해어지다'는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닳아서 떨어지다' 라고 풀이를 하고 비슷한 말로 '낡다', '닳다', '떨어지다'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옷감이나 신발 같은 것들을 오래 써서 얇아지고 닳아 구멍이 나거나 찢어지게 된 됨새를 말하는 것이지요. '해지다'라고 줄여서 말하기도 합니다.

몬(물건)이 저절로 닳아가는 것을 '해어지다'라고 한다면, '해어뜨리다'는 '해어지게 하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일부러 닳게 만들거나, 어떤 움직임(행동) 때문에 몬(물건)이 닳아 없어지게 했을 때 쓰는 말이지요. 곧, '해어지다'가 때새(시간)의 흐름에 따른 저절로 바뀌는 것을 이야기한다면, '해어뜨리다'는 그 바뀜에 사람의 힘이 더해진 것이라고 할까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때 쓰는 '헤어지다'와는 소리가 거의 같아 헷갈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해어지다'와 '해어뜨리다'는 몬(물건)에 깃든 때새와 이야기를 보여주는 말이고, '헤어지다'는 사람 사이가 멀어짐을 뜻하는 말이니 그 쓰임새가 아주 다릅니다.

어떤 물건이 해어지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손길과 때새가 닿았을까요? 해어진 것들은 더는 새것이 아니지만, 그만큼의 이야기를 품고 있기에 더 따뜻하고 값지게 느껴집니다.

소설가 이문구 님의 <관촌수필>의 한 이런 말이 나옵니다.
돗자리가 해어지도록 드나들며 깨우쳐 준 보람도 없이…
자주 드나들어 돗자리가 닳아 없어질 만큼 애썼던 때새와 애씀을 아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또한 소설가 박경리 님의 대하소설 <토지>에서는 이렇게 쓰였습니다.
밤낮으로 입고 일했으니 옷이 해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랜 동안 힘들게 일을 해서 옷이 닳아 없어진 모습을 ‘해어지다’라는 말로 참으로 알맞게 보여줍니다.

우리 나날살이 속에서는 ‘해어지다’와 ‘해어뜨리다’를 어떻게 부려 쓸 수 있을까요?

할머니는 행주가 해어질 때까지 알뜰하게 쓰시고는 걸레로 만들어 마루를 닦으셨다.
아이는 어찌나 험하게 노는지, 석 달이 채 안 되어 신발 뒤축을 다
해어뜨렸다.

어떠신가요? '떨어질 때까지'라는 말을 갈음해서 '해어질 때까지'라고 하니, 그 행주에 얽힌 이야기가 더욱 살갑게 느껴지지 않으시나요? '해어뜨리다'라는 말을 쓰니까, 신발 신는 사람의 몸짓이나 버릇까지 눈앞에 그려지는 듯합니다.

이제 여러분의 둘레를 둘러 보세요. 자주 입어 깃이 해어진 옷, 여러 번 읽어 책장이 너덜너덜 해어진 책, 길이 잘 들어 발에 꼭 맞는 해어진 신발이 있나요? 그것들은 그저 오래된 버림치가 아니라, 여러분과 오래오래 함께한 값진 벗일지 모릅니다.

오늘 배운 토박이말 '해어지다'와 '해어뜨리다'. 이제 그 뜻의 결을 살려 쓰실 수 있겠지요? 닳아 없어진다는 아쉬움보다는, 그만큼 아끼고 사랑했다는 자국으로 이 말들을 부려 써보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해어진 몬을 찍은 찍그림(사진)과 함께 이 말을 동무들에게 널리 알려주시는 건 어떨까요? 우리말 하나가 잠들어 있던 우리네 살가운 마음을 깨워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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