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황제 반대 운동 탄압하려 만든 법이 아직 살아 있어
대한민국의 국가보안법이 일본제국주의의 치안유지법을 그대로 계승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치안유지법의 목적은 ‘국체’(國體), 즉 ‘천황제’에 반대하는 일체의 움직임을 절멸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일본 열도에서 ‘천황제 폐지’를 강령으로 하고 ‘천황제’에 가장 격렬하게 저항한 일본공산당을 탄압하는 것이 법의 애초 목적이었다. 하지만 치안유지법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천황제’에 거슬리는 일체의 운동, 사회주의, 아나키즘, 자유주의, 공화주의, 종교계, 노동운동, 농민운동, 천민운동 등 일체의 민주주의 운동을 탄압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따라서 식민지 조선에서 그 법의 의미는 제국주의 침략의 총책임자이자 주범인 ‘천황’의 지배에 맞서는 조선의 항일독립운동을 탄압하는 법으로 처음부터 위치지워졌다.
치안유지법은 1925년 5월 12일에 시행되었다. 일제 사이토 총독의 ‘문화통치’의 허울을 벗기고 조선의 완전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 순종의 인산일(因山日)인 1926년 6월 10일을 맞아 전국적인 만세시위가 준비되었다. 이것이 곧 6·10만세운동이다. 만세운동의 지도자 권오설을 비롯한 100여 명의 항일 독립운동가들 모두에게 조선 최초로 이 치안유지법이 적용되었다. 일제의 고등계 경찰들은 잔혹한 고문으로 항일혁명가들을 취조했다. 판결이 이루어지기 전에 2명이 사망했고, 3명이 정신이상으로 분리 심리에 처해졌다. 권오설은 1930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고, 일가의 동생인 권오상은 1928년 반송장으로 석방되어 고향에서 숨을 거두었다. 강달영 등, 석방 이후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한 사람도 부지기수다. 치안유지법의 독립운동가 탄압은 이렇게 1945년까지 계속되었다.
일본의 패전 이후 미군정은 치안유지법을 1945년 10월 15일에 폐지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치안유지법은 영원히 사라졌지만, 조선의 치안유지법은 대한민국 ‘단독정부’가 수립된 직후인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 제정으로 되살아났다. 국가보안법은 치안유지법을 말 그대로 베꼈다. 여기서 두 법을 비교해 보겠다.
첫 치안유지법(1925, 1928)은 7개 조, 첫 국가보안법(1948)은 6개 조였다. 제1조부터 비교해 보자.
[치안유지법 제1조 1항] 국체를 변혁하는 것을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한 자 또는 결사의 역원, 기타 지도자의 임무에 종사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 혹은 5년 이상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하고, 사정을 알고 결사에 가입한 자 또는 결사의 목적 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 자는 2년 이상의 유기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
[국가보안법 제1조] 국헌을 위배하여 정부를 참칭하거나 그에 부수하여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결사 또는 집단을 구성한 자는 좌에 의하여 처벌한다.
1. 수괴와 간부는 무기, 3년 이상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
2.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자는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
3. 그 정을 알고, 결사 또는 집단에 가입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국체를 변혁”이 “국헌을 위배”와 “국가를 변란”으로 바뀌었을 뿐, 조직한 자 = 수괴, 역원 = 간부, 지도자의 임무 = 지도적 임무, 사정을 알고 결사에 가입한 자 = 그 정을 알고 결사 또는 집단에 가입한 자의 4단계 분류법이 그대로 계승되었다.
치안유지법 제2조의 ‘실행에 관한 협의’와 제3조의 ‘선동’ 규정은 국가보안법 제3조로 통합되었다.
[치안유지법 제2조] 전조 제1항 또는 제2항의 목적으로 그 목적이 되는 사항의 실행에 관하여 협의를 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
[치안유지법 제3조] 제1조 제1항 또는 제2항의 목적으로 그 목적이 되는 사항의 실행을 선동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
[국가보안법 제3조] 전2조의 목적 또는 그 결사, 집단의 지령으로서 그 목적한 사항의 실행을 협의 선동 또는 선전을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치안유지법 제4조의 “소요, 폭행” 등에 관한 규정은 국가보안법 제2조로 이어졌다.
[치안유지법 제4조] 제1조 제1항 또는 제2항의 목적으로 소요·폭행 기타 생명·신체 또는 재산에 해를 가할 수 있는 범죄를 선동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
[국가보안법 제2조] 살인, 방화 또는 운수, 통신기관 건조물 기타 중요시설의 파괴 등의 범죄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결사나 집단을 조직한 자나 그 간부의 직에 있는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고 그에 가입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이하 생략)
치안유지법 제5조 “금품 기타의 재산상의 이익 공여”는 국가보안법 제4조로 계승되었다.
[치안유지법 제5조] 제1조 제1항 제2항 또는 전 3개 조의 죄를 범하게 할 것을 목적으로 하여 금품 기타의 재산상의 이익을 공여하거나, 그것을 요청 혹은 약속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 사정을 알고 공여를 받거나 그 요구 또는 약속한 자도 같다.
[국가보안법 제4조] 본 법의 죄를 범하게 하거나 그 정을 알고 총포, 탄약, 도검 또는 금품을 공급, 약속 기타의 방법으로 자진 방조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치안유지법 제6조의 자수 규정은 국가보안법 제5조와 같다.
[치안유지법 제6조] 전5조의 죄를 범한 자가 자수한 때에는 그 형을 감경 또는 면제한다.
[국가보안법 제5조] 본법의 죄를 범한 자가 자수를 한 때에는 그 형을 경감 또는 면제할 수 있다.
1948년의 국가보안법은 1925/1928년 치안유지법의 ‘판박이’다. 천황제가 서 있던 자리에 이승만 정부를 넣으면 그 법은 그대로 적용된다. 일제가 사라진 해방된 나라에서, 그래도 일본의 총독 대신 조선인의 정부가 들어선 상황에서, 일제의 악법이 부활했다는 것은 정말 끔직한 일이다. 그뿐이 아니다. 6·10만세운동의 권오설 등은 고문을 자행한 미와 와사부로(三輪)와 요시노 도조(吉野), 오모리 히데오(大森) 등의 일본인 고등계 경찰들을 고소했다. 이 일본인 악질 경찰들이 치안유지법 위반자에게 가하던 고문 수사 기술을 전수받은 친일 조선인 경찰들이, 똑같은 고문을 국가보안법 위반자에게 자행했다는 것은 천인공노할 일이다. 고문을 받은 사람들이 고문으로 사망하거나, 그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신체적, 정신적 상처를 남겼다는 점도 차이가 없다. 특정한 사상범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자 일반에게 그 법이 적용되었다는 것도 똑같다.
결국 일제가 사라진 지 80년이 된 지금, 국가보안법이 엄존하다는 것은 여전히 일제의 정신이 존속되고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민주주의 일반이 질식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존엄이 짓밟히고 평화가 파괴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제 시대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치안유지법으로 탄압받을 때, 일본의 변호사 후루야 사다오(古屋貞雄),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등은 국적의 차이를 넘어서 우리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하기 위해 현해탄을 넘었다. 그것이 인권의 길, 정의의 길, 인간의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100년 전 일본인들의 이 마음을 소중히 여기며,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지금 우리의 마음을 모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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