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대로면 일본 관동-동북지방 사이에 분단선

동서냉전 최전선은 한반도 아닌 일본이었을 것

트루먼, 한반도 북위 38도선으로 분단선 변경

소련 견제 위해 일본 분할통치 폐기, 단독 점령

일본의 항복은 원폭 투하보다 소련군 참전 때문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1945년 2월 크림반도 남부 얄타에 모인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중앙),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최고지조다(오른쪽), 윈시튼 처칠 영국 총리. 여기서 2차 대전 이후의 질서 재편 문제가 구체적으로 논의됐다. 한반도 독립문제도 논의됐다.  아사히신문 9월 6일
1945년 2월 크림반도 남부 얄타에 모인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중앙),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최고지조다(오른쪽), 윈시튼 처칠 영국 총리. 여기서 2차 대전 이후의 질서 재편 문제가 구체적으로 논의됐다. 한반도 독립문제도 논의됐다.  아사히신문 9월 6일

80년 전인 1945년 8월 일본 패전 당시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국을 이끌었던 미국 합동참모본부 산하 합동전쟁계획위원회(JWPC)는 일본을 미국 영국 소련 중국 등 4개국이 분할 통치하는 계획안을 제시했다. 그대로 시행됐다면 그 뒤 분단된 것은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이었을 것이다.

미국이 도쿄 등 간토와 혼슈 중부지역 점령 통치
소련은 혼슈 동북지방과 홋카이도,중국은 시코쿠
영국은 히로시마 등 혼슈 남단과 규슈 분할 통치

일본 방위연구소 전사연구센터의 하나다 도모유키 주임연구관에 따르면, 미국의 4개국에 의한 일본 분할통치안은 미군이 도쿄가 있는 간토(관동)와 혼슈 중부지역을 점령 통치하고, 소련군은 후쿠시마 등이 있는 혼슈 북부 도호쿠(동북지역)와 홋카이도를 통치하며, 중국군(장제스의 국민당군)은 시코쿠, 영국군은 히로시마 등이 있는 혼슈 최남단의 주고쿠와 규슈를 각각 점령 통치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JWPC의 일본 분할통치안에 나오는 이런 사실을 정치학자 이오키베 마코토의 <일본점령정책>(1985년 중앙공론사) 등을 통해 확인했다.

6일 <아사히신문> 인터뷰 기사에서 하나다 연구관은 4개국 일본 분할통치계획이 실행되지 않은 배경을 “제2차 세계대전 말기부터 시작된 미국-소련 대립의 관점에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이 애초 계획을 바꾼 것이다.

 

1945년 9월 2일 미 해군함정 USS 미주리 함상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당시 일본 외상 시게미쓰 마모루. 나무위키
1945년 9월 2일 미 해군함정 USS 미주리 함상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당시 일본 외상 시게미쓰 마모루. 나무위키

 

실행됐다면 일본 관동(도쿄)과 동북지방 사이에 분단선

전후 독일과 한국, 베트남의 분단사례를 근거로 유추해 본다면, 미국의 일본 분할통치안이 계획대로 시행됐다면 일본은 도쿄 북쪽 후쿠시마 부근에서 동서로 잇는 선 이북지역(홋카이도 포함)과 그 이남지역으로 분단돼 오랜 기간 분단국가로 남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됐다면 전후 냉전시기의 동서 대립의 최전선은 한반도의 북위 38도선이 아니라 일본 관동지방과 동북지방을 가르는 선이 됐을 것이고, 미소 대리 국지전은 1950년 6월 25일 한반도가 아닌 일본에서 그 시기를 전후해서 벌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트루먼 대통령, 한반도 북위 38도선으로 분단선 변경

그러나 당시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4개국 일본 분할통치 대신 북위 38도선 이북의 한반도와 만주, 남부 사할린을 소련에 넘겼고, 한반도가 분단국이 됐으며, 그 결과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 수백만 명이 죽고 1천만 가족이 이산 당했다. 그 분단은 지금까지 해소되지 않고 있다.

스탈린, 쿠릴 열도와 홋카이도 북반부 분할 요구

미국이 애초의 일본 분할통치계획을 철회한 것은 소련을 견제하고 일본열도를 단독으로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일본이 항복한 8월 15일 당시 소련 최고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소련의 점령지역은 구 만주와 북위 38도선 이북의 한반도, 남부 사할린으로 한정한다”는 서한을 보냈다.

스탈린은 그 다음 날인 8월 16일 “소련의 치시마(쿠릴 열도) 전체 점령은 얄타와 포츠담 회담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트루먼과 윈스턴 처칠/클레멘트 애틀리로부터) 인정받은 것”이라며 반론을 제기했고, 동시에 홋카이도의 구시로와 루모이를 잇는 선 이북지역을 소련이 점령하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

트루먼은 17일, 소련군의 쿠릴 열도 점령은 인정했으나 홋카이도 북반부 점령은 거부했다.

그에 앞서 일본이 항복하기 전이던 그해 6월 11일 미국의 국무-육군-해군 3부조정위원회(SWNCC)는 “일본을 미군의 군정하에 둔다”는 대일 기본방침을 정했다.

하나다 주임연구관에 따르면, 그러나 지일파 조지프 그루 국무차관(주일 미국대사 역임) 등이 일본의 군국주의를 타도하고 나면 일본 국내의 “민주주의적 경향”을 부활, 강화할 수 있다면서 일본의 통치기구를 남긴 형태의 간접통치도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미국 3부조정위원회(SWNCC)가 그해 8월 11일에 제출한 문서는 미군의 군정이 아니라 간접통치를 의미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미국, 일 본토점령에 23개 사단 80만 이상 필요 예상

합동전쟁계획위원회(JWPC)는 8월 16일에 일본점령을 위한 연합군 지원을 요청하는 ‘4개국 분할통치안’을 제출했다. 이 안은 점령 초기에는 미군이 단독으로 일본을 점령하는 것을 전제로 했으나, 그럴 경우에 일본 각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조직적인 저항에 대비하기 위해 23개 사단, 80만 명 이상의 병력이 필요한 것으로 시산했다. 미군 단독으로는 부담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미국은 연합군의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 4개국 분할통치안은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미국, 소련 견제 위해 일본 분할통치 폐기

그런데 왜 미국은 4개국 분할통치안을 폐기했을까?

앞서 살펴봤듯이 JWPC가 분할통치안을 제출하기 하루 전인 8월 15일, 트루먼 대통령은 스탈린에게 소련의 점령지역을 만주, 북위 38도 이북의 한반도, 남부 사할린(일제가 점령했던 지역)으로 한정했고, 이에 반발한 스탈린이 홋카이도 북반부와 쿠릴 열도도 달라고 하자 쿠릴 열도만 추가로 내주었다. 그때는 미국의 힘이 압도적으로 강했던 시절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상위기관인 SWNCC는 8월 18일 문서에서 연합군과의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일본의 통치기구(천황제 존속, 독자적인 민간정부)를 통한 미군 단독의 간접통치 방식을 확정했다.

분할통치 실행됐다면 한반도 대신 일본이 동서냉전 최전선 됐을 것

스탈린이 트루먼에게 내보인 일본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미국이 크게 경계한 것이 그런 결정의 배경에 있었다고 하나다 연구관은 본다. “만일 소련군이 홋카이도를 점령한다면 총면적이 일본 전체의 약 40%에 상당하는 지역이 공산주의 세력에 장악돼 (동서냉전의) 최전선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미국은) 우려했을 것”이라고 하나다 연구관은 말했다.

그런 상황은 정확하게 한반도에서 실현됐다.

최근의 연구에서 당시 소련의 전후 구상은 장기간에 걸친 소련의 안전과 유럽 및 아시아에서의 평화 유지가 보장되는 상태를 만들어내는 것이 이후 도래할 평화와 전후질서 구축을 위한 구체적인 목표였다는 사실이 당시 이반 마이스키 외무인민위원 대리가 작성한 문서를 통해 확인됐다.

미국은 당시 영국군과 중국군의 개입도 거부했는데, 왜 그랬을까?

지일파 그루 등 미국쪽 관계자들과 전후 일본총리가 된 요시다 시게루 등 일본쪽 관계자들은 전후 일본에 천황제를 남겨 두는 동시에 평화적이고 책임있는 정부 수립을 지향한다는 데에 합의했다. 이를 토대로 미국은 미국 단독 간접통치에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하나다는 설명했다. 그리고 만일 영국 중국까지 포함된 복수국가의 군대가 참여하는 점령형태가 되면 소련의 개입을 허용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일본은 어떻게 분단국가 운명을 피했나?

전후 냉전시기에 한반도와 베트남, 독일 등에서 분단국가가 생겨났다. 당시 미국이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따라 일본도 분단국가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것을 막은 것은 미국의 SWNCC 문서였다. 그것이 한반도와 일본의 운명을 갈랐다. 바꿔 말하면 종전 직후 미국은 일본 단독졈령과 통치를 가장 우선적 목표로 설정했다.

미국 영국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 독일의 지배에서 해방된 중동부 유럽에서 자유선거로 확인된 민의에 부합하는 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해방 유럽에 관한 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폴란드 동부 루블린에서 친소련파 정권인 폴란드 국민해방위원회가 수립되는 등 스탈린의 친슬라브 정권 수립이 추진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스탈린은 소련을 중동부 유럽지역으로 확대하는 것이 슬라브민족들의 단결을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45년 3월 말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단과의 회담에서는 슬라브 민족들의 단결과 동맹 결성을 지시하기도 했다.

일본이 항복하기 전부터 미국이 소련의 이런 움직임에 불신감을 키웠던 것도 일본이 분단국가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있었던 한 요인이었다고 하나다는 말했다.

일본 항복은 원폭 투하가 아니라 소련군 참전 때문

하세카와 쓰요시의 <종전의 설계자들>에 따르면,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미군이 일본 본토를 단독점령할 경우 일본의 저항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인적 물적 피해가 날 것으로 보고 소련에 탱크와 전투기 포탄 등 막대한 군사원조를 하면서 대일 전쟁에 참전해 줄 것을 요청했고, 스탈린은 이를 수락했다. 그러잖아도 러일전쟁 패배와 만주, 사할린, 쿠릴열도 상실의 아픈 기억을 간직한 스탈린은 루스벨트의 요청을 그 모든 것을 만회할 기회로 활용하려 했다. 미국의 무기로 중무장한 대군을 만주 북방 시베리아쪽에 포진시킨 스탈린의 계획은 루스벨트가 1945년 4월에 사망하고 트루먼이 집권하면서 위태로워졌다. 소련군의 대일전 참전을 탐탁치 않게 여겼던 트루먼은 일본항복 한 달여를 앞둔 그해 7월 16일 미국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자 소련 배제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그는 미국 단독으로 일본을 조기에 굴복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트루먼의 속셈을 간파한 스탈린은 일본이 항복하기 전에 참전할 기회를 찾다가 8월 6일과 9일 미국이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하자 계획을 앞당겨 9일 소련군에 만주 진군 명령을 내렸다.

하세카와는 일본을 항복하게 만든 가장 직접적인 요소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원폭 투하가 아니라 만주로 밀고 내려간 소련군의 대일참전이라고 봤다. 소련이 일본을 먼저 점령할 경우 천황제가 해체되고 일본은 공산화될 것이며 전쟁 주도자들은 가혹하게 처벌당할 것이라는 공포가 일제 말기 군국주의 지도자들과 천황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것을 막기 위해 일본 대본영은 시간을 끌며 서방 연합군과 끈질기게 협상을 벌이고 있었으나, 소련군이 참전하자 바로 항복 결정을 내렸다. 그 결정이 조금만 더 빨랐어도 소련군은 참전기회를 잃었을 수도 있고, 그러면 한반도는 분단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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