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 배송은 제품값만 올리는 과잉 서비스
소비자 93% ‘느린 배송+경제적 혜택’ 선호
느린 배송은 물류 택배 노동자 과로 방지
이산화탄소 배출·포장재 과다 사용도 줄여
10명 6명 “혜택 있으면 계속 친환경 소비”
정부·기업 무관심에 친환경 실천율은 감소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쿠팡의 로켓배송이 나온 이후 국내 유통업계에서는 ‘빠른 배송’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새벽 배송과 총알 배송에 이어 하루도 쉬지 않는 ‘7일 배송’을 도입하는 업체도 늘고 있다. 그 결과 물류와 택배 노동자들은 만성 과로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정말로 모든 소비자가 빠른 배송을 원할까? 굳이 제품을 빨리 받지 않아도 되는 소비자에게도 배송을 서둘러야 할까? 빠른 배송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사회적으로 인적,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쓰는 방법일까? 물류와 택배 노동자의 과로사를 유발하는 ‘빠른 배송’이 지속할 수 있을까?
포인트 적립해주면 배송 1~3일 늦어도 상관없어
이런 질문에 유의미한 답을 유추해볼 수 있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한국소비자원이 13일 발표한 ‘한국의 소비생활 지표’ 보고서가 그것이다. 소비자원은 전국 성인 소비자 3200명을 대상으로 친환경 생활 실천율을 조사하며 ‘느린 배송’에 대한 의견도 물었다. 소비자원이 규정한 느린 배송은 소비자가 온라인으로 물건을 주문했을 때 즉시 배송하지 않고, 배송 차량에 물건이 가득 찼을 때 배송하는 제도를 말한다. 미국 의류업체인 갭과 유럽 가구업체 이케아가 5일이 걸리는 느린 배송에 할인 요금을 적용해 호응을 얻으면서 주목을 받았다.
국내에서는 아직 도입되지 않은 느린 배송을 이용할 의향을 조사한 결과 전체 대상자 3200명 중 2975명(93%)이 그렇다고 답했다. 이들 가운데 느린 배송에 대한 경제적 대가로 포인트 적립을 원하는 소비자가 1815명(56.7%)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고 나머지는 할인쿠폰을 선택했다. 평균 배송기간인 2일보다 더 기다려 느린 배송 제도를 이용할 의향이 있다고 답한 소비자 2175명 중에 1868명(85.9%)은 추가로 1~3일 더 기다릴 수 있다고 응답했고, 4~7일로 답한 소비자는 307명(14.1%)으로 많지 않았다. 소비자가 기다릴 수 있는 느린 배송 기간 평균은 3.5일이었다.
미국·일본 ‘느린 배송’ 도입하는 유통업체 증가 추세
소비자원의 ‘느린 배송’에 대한 조사 결과는 ‘빠른 배송’이 상당수 소비자에게는 ‘과잉 서비스’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유통기한이 짧은 신선식품 외에 대다수 상품은 배송이 다소 늦어도 상관 없다. 만약 정가가 1만 원인 상품을 빠른 배송으로 받을 것인지, 아니면 10% 할인된 가격으로 2~3일 늦게 받을지 선택하라고 하면 소비자원 조사에서 나온 결과처럼 후자를 택하는 소비자가 더 많을 것이다.
미국과 일본에서는 포인트와 할인쿠폰을 제공하며 느린 배송 제도를 도입하는 유통업체가 늘고 있다. 일본 최대 포털사이트 야후재팬이 운영하는 야후쇼핑은 2022년 느린 배송 서비스를 시작했는데 고객 절반 이상이 선택할 만큼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한다. 그 이후 일본 최대 온라인쇼핑몰인 라쿠텐 등 다른 유통업체들도 이런 흐름에 동참하는 추세다.
느린 배송은 탄소배출과 각종 포장재 등 환경오염 줄여
소비자원이 친환경 제도 이용 현황을 조사하며 ‘느린 배송’ 항목을 넣은 이유는 빠른 배송이 물류와 택배 노동자의 과로를 유발할 뿐만 아니라 환경을 오염시키기 때문이다. 빠른 배송은 택배 차량 운행 횟수를 늘려 이산화탄소 과다 배출을 초래한다. 택배로 상품을 보내는 과정에서 스트로폼과 비닐, 종이상자 등 각종 포장재가 많이 쓰인다. 이는 심각한 환경오염 물질이기도 하다. 노동자 인권과 환경 측면에서 가급적 빠른 배송 물량을 줄여야 하는 이유다.
조금 더 생각하면 소비자 편익 측면에서도 불리한 점이 있다. ‘빠른 배송’에는 비용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택배비 무료’라고 하지만 빠른 배송에 들어가는 비용은 결국 제품 가격에 반영된다. 빠른 배송을 받는 대가로 제품을 비싸게 사야 하는 셈이다. 빠른 택배가 공짜가 아닌 것이다.
무엇보다 대다수 소비자에게 빠른 배송은 꼭 필요한 서비스가 아니다. 기업이 더 많은 이윤을 취하기 위해 소비자들에게 과잉 편익을 제공하는 대표적 사례가 바로 빠른 배송이다. 빠른 배송을 없앨 수는 없지만 느린 배송 제도를 활성화할 필요는 있다. 빠른 배송과 느린 배송으로 택배 시스템을 이원화하면 노동자와 환경을 보호하면서 소비자도 싼값에 제품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경제적 혜택 늘려 친환경 생활 실천율 높여야
한편 국내 소비자 10명 6명은 환경친화적 소비 경험이 있고 경제적 이익이 있으면 친환경 제도를 이용할 의향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국내에서 친환경 시장 규모가 34조 원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도 이런 소비자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정부와 기업의 무관심 때문에 친환경 생활 실천율은 매년 낮아지는 추세다. 조사 대상 3200명 중에 66.4%(2125명)가 현재 친환경 제도를 이용 중이라고 응답했으나 친환경 생활 실천율 점수는 2019년 62.1점에서 2023년 57.1점으로 하락했다.
탄소중립포인트와 주택용에너지캐시백, e-라벨, 온라인 녹색제품 전용관 등 4대 친환경 제도를 이용하는 1530명의 58%(886명)은 ‘경제적 혜택’이 있다면 계속해서 제도를 이용할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친환경 제도를 한 번 이용해 본 소비자가 계속 이용하는 비율이 높은 제도는 탄소중립포인트로 77.5%(719명)였고, 주택용 에너지캐시백 76.8%(509명)이 뒤를 이었다. 탄소중립포인트는 텀블러·다회용기 등을 사용하면 현금으로 전환되는 포인트를 지급하는 제도이다. 주택용에너지캐시백은 전기 절감량에 따라 전기요금을 할인해주고, e-라벨은 식품의 표시정보를 QR로 제공하는 제도다. 온라인 녹색제품전용관은 친환경제품을 판매한다.
재활용과 달리 버려지는 물건으로 신상품을 만든 ‘새활용’ 제품에 대한 반응도 좋았다. 새활용 제품 정보를 모바일 QR코드로 제공하는 제도를 이용하겠다는 응답자가 60.1%(1922명)에 달했다. 소비자원은 “탄소중립포인트 제도의 경우 포인트를 적립할 수 있는 제휴처가 많지 않아 제도를 이용하지 않는 소비자가 일부 있다”며 “친환경 생활 실천율을 높이려면 포인트 제휴처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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