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개 기업 중 73곳 이자보상배율 1 이하
2021년엔 34개…윤석열 정부 때 크게 늘어
독자 생존 어려운 좀비기업도 20곳에 달해
자산만 쌓아두고 투자하지 않은 것도 원인
한국 증시 고질적인 저평가도 대기업 책임
부실·좀비기업은 청산 또는 매각이 바람직
우리나라 대기업들의 수익성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갚지 못하는 기업이 최근 3년 새 2배 이상 증가했다. 3년 연속 이런 상태가 이어진 한계(좀비)기업도 500대 기업 중에 20곳이나 됐다. 우리 경제에서 대기업은 성장의 핵심 축이라는 점에서 심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된 원인은 대기업의 혁신 역량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혁신을 통한 성장을 멈추면 국가 경제도 활력을 잃는다. ‘잃어버린 30년’을 겪은 일본은 도요타와 소니 등 대표기업의 경쟁력이 하락하며 경제가 저성장 늪에 빠졌다.
재벌 3, 4세로 경영권 넘어가며 쇠락하는 기업가정신
안타까운 사실은 한국도 일본처럼 실패한 길을 가고 있다는 점이다. 대기업들은 자산만 쌓아두고 모험적인 혁신 투자에 나서지 않고 있다. 그 결과 수익성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 예전에는 돈을 벌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못한 낡은 사업구조를 바꾸지 않아 매출은 늘어도 이익이 감소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 윤석열 정부 들어 이런 기업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법인세 인하와 각종 세액 공제 등 부자 감세 수혜가 대기업에 집중됐는데도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는 기업들이 혜택만 받고 신사업에 투자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 대기업들이 과감한 투자에 나서지 않은 것은 세계 경제 침체로 사업 기회가 줄어든 이유도 있다. 그러나 기업 스스로 혁신 역량을 키우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한 탓이 결정적이다. 대기업집단을 형성한 재벌기업들은 경영권이 3, 4세로 넘어가면서 기업가정신이 쇠퇴하고 있다. 30년 넘게 한국 자본시장에 몸담았던 한 자산운용사 대표는 “재벌 3, 4세가 경영하는 대기업을 보면 혁신 투자에 나서기보다는 회사에 자산을 쌓아두는 경향이 있다”며 “신규 투자를 통한 기업 성장보다 총수 일가의 경영권을 유지하거나 강화하는 게 더 큰 관심사”라고 꼬집었다.
대기업들 매출 증가하는데 영업이익은 쪼그라들어
혁신정신을 잃은 대기업의 민낯을 보여주는 자료가 또 나왔다. 기업분석연구소인 리더스인덱스는 29일 매출 기준 상위 500대 기업의 매출과 영업이익. 이자 지급 비용(이자 비용)을 분석한 보고서를 공개했다. 지난 2021년부터 2024년까지 3년간 비교할 수 있는 302개 대기업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대부분의 기업은 실적이 부진한 상황에서 고금리로 이자 부담이 커지면서 이자보상배율이 3분의 1로 줄었다. 영업이익으로 이자를 갚지 못하는 이자보상배율 1 이하인 대기업도 3년 새 2배 넘게 급증했다. 이자보상배율 1 이하인 상태가 3년 연속 지속하면 한계기업 또는 좀비기업으로 분류하는데 이런 대기업도 20곳이나 됐다.
조사 대상 기업의 지난해 매출액은 총 2964조 6970억 원으로 2021년의 2362조 8248억 원과 비교하면 25.5% 증가했다. 그러나 영업이익은 200조 3075억 원에서 197조 9420억 원으로 1.2% 감소했다. 수익성이 떨어진 것은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혁신 역량을 키우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이런 상황에서 이자 비용은 22조 9820억 원에서 54조 2961억 원으로 3년 새 136.3% 치솟았다. 이에 따라 이자보상배율은 8.72에서 3.65로 58.2%나 하락했다.
이자보상배율 1 이하 기업 3년 새 11.3%→24.2%
302개 기업 중에 214곳이 최근 3년 새 이자보상배율이 하락했다. 개선된 기업은 88곳에 불과했다. 이자보상배율 1 이하 기업은 2021년 34개(11.3%)에서 2022년 44개(14.6%), 2023년 59개(19.5%), 지난해에는 73개(24.2%)로 매년 증가 추세다. 이 중 롯데쇼핑과 롯데케미칼, 호텔롯데, 롯데하이마트, 코리아세븐, SK온, SK에코플랜트, SK네트웍스, 이마트, 신세계건설이 좀비기업으로 분류됐다. 롯데와 신세계 계열사 중에 좀비기업이 많은 이유는 업황이 부진한 석유화학과 유통을 주력 사업으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업종별 이자보상배율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석유화학과 유통은 지난해 평균 이자보상배율이 각각 0.64와 0.99로 1 이하로 떨어졌다. 최근 3년간 이자보상배율이 가장 악화한 업종은 석유화학이다. 이 업종 매출은 405조 8003억 원에서 488조 3527억 원으로 20.3% 증가했다. 그러나 영업이익은 27조 7309억 원에서 4조 7920억 원으로 82.7% 추락했다. 이자 비용은 2조 2468억 원에서 7조 5215억 원으로 3배 이상 증가했다. 롯데케미칼과 효성화학, 이수화학, 대한유화, 태광산업, 여천NCC 등 6곳이 3년 연속 이자보상배율 1 이하를 기록하며 좀비기업으로 전락했다.
철강과 건설·건자재 업종도 상황이 좋지 않다. 13개 철강 기업의 영업이익은 2021년 14조 2577억 원에서 지난해 3조 9922억 원으로 72%나 감소했다. 같은 기간 이자 비용은 9066억 원에서 1조 7271억 원으로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이에 따라 이자보상배율은 15.73에서 2.31로 급락했다. 특히 현대제철은 지난해 영업이익이 1595억 원으로 2021년 2조 4475억 원 대비 93.5% 급감한 상황에서 이자 비용이 3062억 원에서 4354억 원으로 42.2% 증가하며 이자보상배율이 7.99에서 0.37로 큰 폭으로 떨어졌다. 30개 건설·건자재 기업 영업이익도 2021년 8조 3705억 원에서 지난해 4조 6487억 원으로 3년 새 반토막 났다. 반면 같은 기간 이자 비용은 1조 301억 원에서 2조 8364억 원으로 두 배 이상 증가하며 이자보상배율이 8.13에서 1.64로 하락했다.
유보금만 쌓는 대기업 탓에 한국 증시 저평가
대기업들은 증시에서는 대형주에 속한다. 지난해 대형주가 속한 코스피(유가증권시장) 주가순자산비율(PBR)은 0.84로 1을 밑돌았다. PBR은 기업 주가를 BPS(주당순자산가치)로 나눈 값으로 주가가 1주당 순자산에 비해 몇 배에 거래되는지 보여주는 지표다. PBR이 1 미만이면 회사가 보유한 자산 전부를 매각하고 사업을 청산한 가치보다도 주가가 낮다는 뜻이다. PBR이 1 밑으로 떨어지면 주가가 저평가됐다고 해석할 수도 있으나 시장에서 기업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기업이 혁신 역량과 성장성을 보여주지 못하면 PBR이 1보다 낮아진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는 지난 21일 금융투자협회 토론회에서 “PBR 0.1에서 0.2인 회사는 적대적 인수합병(M&A) 등을 통해 빨리 청산하면 이론적으로 10배 남는 장사 아니냐. 시장 물을 흐리는 종목은 정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소 과격한 발언이지만 자산만 쌓아두고 혁신 사업에 투자하지 않은 대기업들은 뜨끔했을 것이다. 대기업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유보금을 늘리는 것이라지만, 재벌기업의 경영권을 가진 총수 일가가 모험적인 투자를 꺼리며 나타난 현상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성장하는 기업은 아무리 경기가 어려워도 돈을 내부에 쌓아두지 않는다. 어떻게든 돈을 벌 수 있는 신사업에 투자한다. 일단 투자된 자금은 사업이 실패하더라도 국가 경제 전체로 보면 사라지는 게 아니다. 어디론가 흘러 들어가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자원의 효율적 배분 측면에서 기업 유보금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만성적으로 PBR이 낮은 기업이나 이자보상배율이 1 이하인 기업은 원칙적으로 청산되거나 다른 기업에 인수되는 게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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