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호사가 있나, 호암미술관 '겸재 정선'
호암미술관에서 여는 ‘겸재 정선’전(2025.4.2.~6.29)은 100년에 한 차례 열릴까 말까 할 볼거리다. 호암미술관, 간송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 등 겸재 작품의 주요 소장처를 중심으로 여타 기관, 개인 소장품을 더하여 165점을 그러모았다.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57점 외에 겸재, 원백이라 자서한 것 대부분이 한군데 모인 셈이다.
겸재는 소장처나 소장가에게 ‘보물’에 진배없어 함부로 밖으로 돌리지 않을 뿐더러 수장품의 질이나 양에서 나름 선두를 다투는 호암, 간송, 국박은 상대방의 전시에 ‘진품’을 대여하여 들러리 서고 싶지 않는 경쟁심리가 암암리에 작용해 왔기에 전시 성사 자체가 사건이라 할 만하다.
세기의 전시가 가능했던 것은 삼성문화재단 설립 60돌을 맞은 삼성 쪽 제안에 간송미술문화재단과 국립박물관에 호응한 까닭이다. 단지 삼성문화재단이 꺾어지는 해를 맞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건희 컬렉션을 일괄 기증받은 국가기관(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등)의 고마움의 표시, 대구간송미술관을 건립한 간송미술재단이 전시를 이어받기로 한 약속이 동시에 작용했다.
저간의 사정이야 어쨌든, 때를 달리한 여러 전시에서 감질나게 보아온 겸재 진작을 한자리에서 한목에 볼 수 있으니 이보다 더한 복이 어디 있으랴. 대작 ‘인왕제색’(79.2×138.2cm)과 ‘금강전도’(130.8×94.5cm)가 나란히 걸린 들머리에서 일단 흐업~ 숨을 멈춘다. 한 작품 앞에서 족히 종일을 머물러도 될 성 싶은데, 두 걸작이 병립하니 벌렁거리는 가슴을 가눌 길 없다. 이러한 감격은 전시장 내내 지속되어 이를 가다듬으려면 중간중간 밖으로 나와 바람을 쐬어야 한다.
1층에서 겸재 하면 떠오르게 마련인 진경산수화 진면모를 파지하고, 2층에서 겸재가 관념산수화와 옛 선인·성현들의 삶을 담은 고사인물화, 꽃과 새, 동물을 그린 화조영모화, 초충도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발견하게 한다. 전시장을 나와 희원 벤치에 잠시 머물면 작품들 아래 복류하는 인간 겸재와 그의 시대가 잔잔하게 재구성된다. 그의 전작을 모은 카탈로그 레조네가 만들어진 바 없는지라, 장님 코끼리 만지듯 감상하던 일반인으로서는 언감생심이었던, 전문가 또는 애호가들끼리 전유하는 감상과 이해의 경지를 넘봤다고나 할까. 감사한 것은 깜짝 들머리 외에는 보수적으로 전시를 구성한 점이다. 여기저기 흩어진 작품을 모아모아 주제별로 분류하여 일목요연하게 보여줄 뿐 기획자의 의욕을 덧대어 주의를 흩뜨리지 않았다. 특히 화첩으로 된 작품들이 그러한데, 원래의 장첩 순서대로 낱낱이 보여줌으로써 개별 작품의 소종래는 물론 화첩의 사연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도록 했다. 화첩 일부만 내보이고 대부분은 접은 채로 궁금증을 유발했던 기존 전시와 다른 점이다. 시차를 두고 같은 대상을 그린 작품들도 원래의 맥락에 두어 궁금한 이는 앞뒤 오가며 비교하도록 배려(?)했다.
감사에 하나 더 보태자면, 전시가 대체로 그러하듯이, 도록에 맞춰 원작의 크기를 소거한 채 일률적인 크기로 인쇄한 도판에서 보아온 작품을 원래의 크기대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작가가 작품에 들인 공력은 붓놀림의 정교함 외에 크기에도 반영되기에 공교로움과 대소 크기에서 작품의 용처를 추정하는데 무척 도움이 되었다. 각설.
겸재 정선(1676~1759)는 숙종, 경종, 영조 치세를 살았거니와 그 시대는 임진왜란 이후 100여 년이 경과한 즈음에 해당한다. 사가들이 전근대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라고 지칭하는 때다. 토지겸병이 사뭇 진행되면서 지방벌렬과 경화세족이 형성돼 문화를 향유할 토대가 만들어졌다. 이에 반해 몰락한 양반 출신의 겸재는 외가의 도움으로 겨우 먹고 살아온 터, 그들이 떨군 부스러기가 필요했다.
지금의 청와대 부근, 같은 동네에서 자란 이병연과의 인연으로 그곳에 세거한 김창흡, 김창집 등 장동 김씨의 문하에 들면서 가난한 화가의 재능을 꽃피울 수 있었다. 한성부주부, 청하현감, 자인현감, 하양현감, 훈련도감 낭청, 양천현령 등을 지낸 것은 그의 재능을 높이 산 장동 김씨의 입김이라고 보아야 한다. 후에 제수된 첨지중추부사, 가선대부 지중추부사는 늘그막에 주어진 명예직일 따름이다. 다시 말해, 그가 지방직 벼슬아치를 지낸 것은 그림쟁이를 대동하여 산수경개를 즐기려는 경화세족의 욕망이 투사됐기 때문이다.
화첩으로 꾸민 그의 작품은 금강산 일대를 그린 ‘신묘년풍악도첩’, 금강산과 동해안 일대를 그린 ‘해악전신첩’, 동해안 일대의 승경을 그린 ‘관동명승첩’, 서촌 일대를 그린 ‘장동팔경첩’, 서울 근교의 명소를 그린 ‘경교명승첩’, 임진강 뱃놀이를 그린 ‘연강임술첩’ 등이다. 이들 화첩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기록화다. 권문세가의 강산유람에 따라가 그들이 어떤 경로를 따라 어느 곳에 이르러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를 그림으로 소상하게 그려 그들에게 진상한 것이다. 이병연과의 시화상간지약이 부각된 ‘경교명승첩’이나 세 벌을 만들어 나눠가진 ‘연강임술첩’ 역시 애초 장동 김문과 교분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다고 본다.
조선의 기록화 전통은 왕실의궤에서 비롯한다. 각종 왕실 행사를 텍스트와 그림으로써 시시콜콜 기록한 것. 이는 고위직 벼슬아치의 각종 잔치와 모임의 기록을 거쳐 정선의 시대에 이르러 승경유람을 기록하는 데까지 발전하게 된다. 왕권이 성하던 시절 궁중 도화서의 어용화가로 족하였지만 권문세가가 자리잡으면서 어용 외 ‘사용’ 화가의 수요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니까 정선의 발군은 시대의 산물인 셈이다.
정선의 그림을 진경산수화, 실경산수화라 상찬하지만 나는 전통 기록화와 산수화의 습합이라는 데 의미를 둔다. 보통 산수화는 바위와 물이 어우러진 곳, 초목 사이에 띠집이 있고 산 아래 물안개 흐르는 식의 클리셰로 구현된다. 등장인물은 소를 탄 노인, 차 끓이는 동자 또는 세월을 낚는 어옹 따위다. (근데 소는 누가 키우나?) 서울바라기로 출세에 목을 매는 양반들이 짐짓 자연에서 은일을 추구하는 척하는 정서를 반영한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전통 산수화의 정서에 공감하는 계급이 와유를 넘어 산과 강으로 직접 나아가 이를 완상하는 사건을 그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의 산수화가 진경산수, 실경산수임은 시절의 변화에 따른 부수적인 결과이며 그림 속의 인물들이 도사와 시동이 아니라 유람객 자신과 짐꾼, 가마꾼으로 바뀐 것도 마찬가지다. 장첩으로 묶은 것 또한 일련의 여정을 그린 데 따른 불가피한 결과다.
예를 들어 ‘신묘년풍악도첩’에 포함된 ‘총석정’. 금강산 유람의 끄트머리에 해당하는 해금강, 용암이 풍화하여 바위가 층층으로 쌓인 형상을 그렸다. 절경 한 가운데 정자가 있으니 작품 제목과 같은 총석정이다. 절경에 정자가 있어 경관의 아름다움이 배가된다고는 하나 정자 자체는 유한계급의 승경 욕망이 발현된 것이다. 정선이 따라붙은 일행 역시 정자에 머물러 경치를 완상했다고 추정된다. (유난히 겸재 산수화에는 정자가 많다.) 작품 하단에서 작품 중앙 정자로 휘어진 길은 일행의 경로다. 정자에 앉으면 바로 앞 총석 꼭대기에 소나무, 바다 멀리 아도(牙島) 난도(卵島)가 보일 터. 일행은 소나무를 가리키며 해풍을 견디며 바위 위에 뿌리내린 독야청청을 운위했을 게 분명하다. 겸재가 아도와 난도를 각각 어금니와 알 모양과 방불하게 그린 것은 일행 사이에서 “저 섬말이야. 이름대로 어금니와 알과 흡사하구만” 하고 수작했음을 방증한다. 넘실거리는 바다물결에는 일행이 실눈으로 보았을 윤슬이, 총석을 치는 파도가 일으킨 물거품에는 역시 일행이 들었을 파도소리가 담겼다.
하나 더 ‘백천교’를 보면, 이런 판단이 적실하다고 하겠다. 임립한 침엽수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너럭바위에서 담소하거나 앞뒤 경치를 구경하는 선비들의 모습에서 금강산을 나오며 느꼈을 아쉬움이 묻어난다. 여러 가마와 승려들에게서 이들의 산행실태가 보이고 개울 건너 말갖춤을 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에게서 앞으로의 행로가 보인다.
300여 년 뒤의 후생의 눈에 이러함이 보일진대 당대 장첩을 건네받은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나. 때때로 함께 들춰보며 유람의 추억을 되새겼을 게 분명하다. 그들이 그곳에서 나눴을 대화, 그곳에서 들었을 법한 자연의 소리까지 생생하게.
오해 마시라. 겸재의 그림을 두고 왈가왈부함은 진경산수화 폄하가 아니다. 조선 후기에서 발흥한 실경산수의 특징을 드러내고자 할 따름이다. 그런다고 그 의미가 퇴색하겠는가. 되레 왕실의궤가 담지 못한 음성과 소리까지 기록하였으니 회화의 진화에 일대 장관을 이뤘다고 봄이 어떠한가.
진경산수 관련 기억해 둘 것이 있다.
1000원짜리 지폐에 등장하는 ‘계상정거’. 이 작품은 ‘퇴우이선생진적첩’ 중 일부다. 퇴계 이황, 우암 송시열의 글씨에 자신의 그림 네 점 즉 ‘계상정거’, ‘무봉산중’, ‘풍계유택’, ‘인곡정사’를 합첩했다. ‘계상정거’는 퇴계를 모신 도산서원을, ‘무봉산중’은 외조부 박자진이 퇴계의 진적을 들고 우암 송시열을 찾아가 발문을 받는 모습을, ‘풍계유택’은 박자진의 저택을, '인곡정사'는 인왕산 아래 자신의 집을 그렸다. 자신이 어찌어찌 퇴계와 연결돼 있음을 보인 건데, 지폐에 인용될 만큼 대접받는 겸재의 당시 처지가 짠하기 그지 없다. 자화상이 틀림없는 ‘독서여가도’(이 작품은 본래 화제가 없다. 간송미술관에서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역시 그렇다. 벽에 그림을 걸고, 책을 쌓아두고, 부채를 쥔 채 화초를 감상하는 모습으로 그렸다. 노년에야 이루기는 했어도 ‘나 이런 사람이야’ 하는 자부심이 묻어나지 않는가.
관련기사
개의 댓글
댓글 정렬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