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학자 송석하의 부와 학문〉 서울 언론사 소개 전무

민박 창립자의 민낯 폭로인데다 지은이들이 지역 출신

10년 전 울산 지역 정간물 논문도 조명 기회 못 얻어

'민속학자 송석하의 부와 학문'(2023), '울산지역문화연구'(2015).   
'민속학자 송석하의 부와 학문'(2023), '울산지역문화연구'(2015).   

미리 말한다. 출간된 지 2년이나 지난 책 <민속학자 송석하의 부와 학문>(민속원, 2023) 얘기다. 표제가 말하듯 민속학, 송석하 등 따분한 내용이다. 안 읽어도 무방한 글이다.

나는 신문을 통해 신간 소식을 접한다. 거기에 한 줄이라도 소개되지 않은 책은 출간되지 않은 거나 같다. 어쩌다, 정말 어쩌다 대형 책방에 가면 출간된 줄 몰랐던 책들이 참 많은 걸 깨닫는다. 요즘은 책방 갈 일이 없으니 그런 깨달음도 없다. 관심사를 따라 인터넷 검색을 거듭하다 어? 이런 게 있었다고? 하는 자료를 맞닥뜨리는 순간이 있을 뿐이다. 오늘의 책은 그런 사례 중 하나다.

송석하(1904~1948)는 국립민속박물관이 자신의 뿌리로 치는 ‘국립민족박물관’ 초대 관장이다. 민족박물관은 1945년 11월 8일 설립돼 이듬해 4월 25일 서울 남산 기슭(서울시 중구 예장동 2-1번지)에 있던 일제의 시정기념관을 인수해 개관했다. 1893년에 일본공사관 청사로 지은 이 건물은 을사늑약 이후 한국통감, 조선총독의 관저로 쓰다가 1939년 경복궁 뒤(현 청와대 자리)에 새 건물(경무대)을 지어 옮겨가면서 시정기념관으로 활용해 왔다. 역대 통감, 총독의 유품, 일왕이 한국에 왔을 때 탔던 마차 등을 전시했다. '합병조인'을 기념하는 방도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민족박물관이 번듯한 곳에 자리잡은 데는 미군정 관리로 유진 크네즈 대위와 송석하의 인연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크네즈는 미국 뉴멕시코대학교 인류학과를 졸업한 인물로 그의 전공분야가 필요한 미군 당국에 의해 발탁돼 기초 군사교육을 받고 미 군정청에 배속됐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군청을 펼치는 데 참고로 하기 위한 자료를 수집 정리하려던 것이다.

거칠게 말하면 인류학과 민속학이 다루는 분야는 엇비슷한데, 관점의 차이로 구분된다. 전자가 제국주의적 관점이라면 후자는 민족주의 관점이랄까. 강점기 때 인류학적 접근법을 가진 일본인 민속학자들과 어울린 송석하에게 유진 크네즈 대위는 출신국, 인종이 바뀌었을 뿐 자신의 분야와 시각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 정식 개관에 앞서 같은 해 2월 26일부터 3월 15일까지 '제주도 민속조사' 및 '수집 사업'을 벌였다. 크네즈 대위가 동행했음은 물론이다. 국립민족박물관이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가 경복궁 집경전에 설립한 조선민족미술관 소장품을 인수하고 송석하의 개인수집품을 더한 터, 제주도 민속조사 사업은 수장, 전시품을 추가 확보하기 위한 사전작업이었던 셈이다. 또한 제주 4.3 인민항쟁을 무력진압하는 기초자료로 쓰였을 것으로 나는 추정한다. 

1948년 8월 5일 송석하가 뇌일혈로 사망하고,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민족박물관의 운명이 바뀐다. 서울 수복 뒤 1950년 12월 국립박물관 남산분관으로 흡수통합 돼 송석하와 함께 종적이 사라진다.

 

국립민족박물관 현판.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국립민족박물관 현판.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웹사이트에 기술한 박물관 연혁. 
국립민속박물관 웹사이트에 기술한 박물관 연혁. 

송석하가 대중의 관심사로 떠오르기는 48년 뒤의 일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이 1996년 4월22~27일 개관 50돌 기념 학술행사를 열어 송석하를 문화민족주의자로 자리매김하고 정부는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2004년 11월에는 석남 송석하 탄신 100주년 기념 심포지움을 열어 그가 한국 민속학과 국립민속박물관의 뿌리임을 재확인했다. <석남 송석하, 한국민속의 재음미>(전 2권) <석남 송석하, 영상 민속의 세계 –연희편>을 함께 펴냈다.

<민속학자 송석하의 부와 학문>은 이러한 흐름에 딴지를 건다. ‘문화민족주의자의 민낯을 보다’라고 부제를 단 것도 그런 뜻이다. 오석민, 박중훈, 이용찬 3인 공저인데, 각각 지역문화연구소 소장, 울산북구향토사연구소장, 정읍문화재지킴이 회장이라고 소개돼 있다. 주로 지역에서 활동하는 연구자들이다. 오석민은 책의 후기에서 애초 접촉한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한 사연을 토로했다. 1년여 출간을 미루다가, 자사와 오랫동안 인연을 맺고 있던 민속학계의 원로학자가 송석하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 반대한다고 알려왔다는 것이다.

책은 1부 ‘아버지 송태관의 권력과 부’, 2부 ‘아들 송석하의 학문’, 부록 ‘줄풍류를 후원했던 향리 집안과 통혼하다’로 구성돼 있다. 학계, 관계 주류와 다른 이야기를 하는 만큼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풍부하다. 설득력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책이 나온 2023년 출간 소식을 전하거나 내용을 소개한 신문 기사는 울산, 경남의 몇 개에 지나지 않는다. 서울을 비롯한 기타 지역은 없다. 출판, 언론, 박물관계의 정서가 반영되었을 수도 있겠다고 짐작할 따름이다.

이러한 내용이 눈길을 피해간 것은 8년 전에 이미 전조가 있었다. 2015년 울산광역시문화원연합회에서 낸 <울산지역문화연구>. 울산 향토사 통합연구지 제3호인 이 간행물에 ‘송태관의 삶과 활동’이란 글이 실려 있다. <민속학자 송석하의 부와 학문>의 저자 중 한 명인 박중훈(당시 울산발전연구원 향토사분과위원)의 논문이다. <민속학자 송석하...>의 1부 ‘아버지 송태관의 권력과 부’는 이를 깁고 더한 글인데, 골자는 동일하다. 당시 이 논문을 소개한 곳은 역시 지역신문 몇 곳뿐이다. 물론 이 간행물의 출간부수가 적고 배포처가 제한되었던 사정도 작용했지 싶다.

책의 내용이 뭐기에 군말이 긴가? 궁금한 분은 책에서 직접 확인해 보기 바란다. 다만 이왕 얘기를 꺼냈으니 지은이의 말을 중심으로 요지를 소개한다.

 

송태관이 불하받은 만리포 인근 임야대장. 
송태관이 불하받은 만리포 인근 임야대장. 
울산 석남사 계곡에 새겨진 송태관 각자.
울산 석남사 계곡에 새겨진 송태관 각자.

송석하의 부친 송태관(1874~1940)은 1899년 25살 늦은 나이에 일본 도쿄상업고등학교에 유학하고, 1905년 33살에 9품 탁지부 주사로 임용된다. 조경단 개수, 이성계의 조모의 비각 조성 등 공사감독을 잘 해낸 공로로 2년 뒤 인 1906년 11월 종2품 시종원 부경으로 수직상승한다. 그는 일사오적 중 한 명인 이지용 특사를 수행해 일본에 가서 일본 천왕으로부터 훈3등 욱일장을 받았다. 1907년에는 서울에 온 이토 히로부미 통감 영접사로 남대문역에 출영한다. 그해 일본 경찰에 의해 1년여 동안 진도에 유배된다. 함께 유배된 세 인물이 모두 봉상사 제조를 거친 점을 고려하면 헤이그 밀사사건에 대한 입단속이었을 거라고 추정된다. 송태관은 유배에서 풀린 뒤 고향으로 돌아가 사업가로 변신한다. 경남은행, 부산일보사, 조선제과, 조선주조, 부산자동차, 동아신탁, 삼산자동차, 부산신탄 등에 투자하거나 경영진으로 활동했다. 1923년 경영실패로 경남은행 은행장에서 해임되면서 어려움에 처한다.

그 무렵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과 면담을 하면서 그는 곤경에서 극적으로 탈출한다. 충남 서산 해미면의 간척권, 태안읍 일대 간척권을 확보하고, 만리포해수욕장 인근 임야를 불하받아 일약 대주주가 된다. 지은이는 송태관의 친일적인 행태가 간과된 것은 정치, 경제, 민속 등 학제연구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자기 분야 외에는 모르거나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사실상 초대관장으로 추대한 송석하는 어떤가?

 

백두산 탐구등행단이 태평양전쟁 승전을 기원하는 천지 제사를 지낼 것이라는 내용을 보도한 1943년 7월 4일 매일신보 지면. 25일치에는 등행단이 출발했음을 알리는 기사가 나온다.
백두산 탐구등행단이 태평양전쟁 승전을 기원하는 천지 제사를 지낼 것이라는 내용을 보도한 1943년 7월 4일 매일신보 지면. 25일치에는 등행단이 출발했음을 알리는 기사가 나온다.

송석하는 1929년 민속학 관련 글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1932년에 손진태, 정인섭 등과 함께 조선민속학회를 조직했다. 서울에 있는 자신의 집에 사무실을 두고 학회지 발간 비용을 전담했다. 금수저 집안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일본인 민속학자 아키바 다카시(秋葉隆), 경찰 출신의 이마무라 도모(今村鞆)도 회원이었다. 1930년대 후반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호응해 ‘권장할 만한 전통오락’ 지정에 앞장서 총독이 지켜보는 가운데 경복궁에서 봉산탈춤 시현행사를 열었다. 백두산 천지에서 일본의 태평양전쟁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에 조선인으로 유일하게 참여하기도 했다. 해방 뒤 자신의 수집품을 토대로 국립민족박물관을 개관하고 관장이 되었다. 그는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 출범 당시 인류학과를 개설하는 데도 힘을 쓴 것으로 알려졌다.

저간의 사정은 <민속학자 송석하의 부와 학문>이 제때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한 까닭을 말해주지 않는가. 책은 국립민속박물관이나, 서울대 인류학과나 아버지를 제대로 쳐다볼 엄두를 못내는 현실에 대한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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