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한라산에만 남은 희귀 식물 지천

장백제비꽃, 기생꽃, 들쭉나무, 배암나무

국내에선 거의 못 보는 꽃들에 눈 호사

백산차, 월귤, 나도범의귀, 분홍노루발 등

국내 멸종 위기종 보전 방향의 산 교과서

“강원도 동해안 석호에서나 볼 수 있는 제비붓꽃이 지천에 널려 있어요. 어제 봤던 분홍노루발과 연영초도 남한에서는 못 보거나 드물게 보는 꽃인데 여기에는 너무 흔하네요.”

지난 6월 14일 한국 관광객들이 백두산으로 가는 길목인 중국 연길시 이도백하에서 장백산(백두산의 중국쪽 영토 명칭) 사이에 있는 황송포 습지를 방문했다. ‘한국의 재발견 식물탐사대’ (대장 이굴기·도서출판 궁리 대표)가 주관한 백두산 탐사에 참가한 대원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백두산을 여러 차례 방문했던 대원도 적지 않았지만, 나처럼 처음 방문한 경우 경이로움과 눈 호사는 배가될 수밖에 없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황새풀, 개속새 등이 가득한 습지에서 한창 피어난 제비붓꽃이 일행을 반겼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리산과 강원 북부 일부 지역의 습지에만 자생하는 북방계 습지식물이다. 진한 보라색 외화피(바깥꽃덮이) 가운데에 흰색 바탕에 노란색의 좁은 무늬로 다른 붓꽃들과 구분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멸종위기 Ⅱ급 식물이지만, 함경도, 백두산, 중국 등에는 널리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황송포에서 만난 식물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제비붓꽃, 은방울꽃, 두루미꽃, 민솜대, 넌출월귤, 월귤.  사진 넌출월귤은 현진오, 나머지는 임항.
황송포에서 만난 식물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제비붓꽃, 은방울꽃, 두루미꽃, 민솜대, 넌출월귤, 월귤. 사진 넌출월귤은 현진오, 나머지는 임항.

일행 중 식물분류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주목할 만한 풀과 나무를 소개해 본다. 황송포 습지는 데크를 따라서 습지를 한 바퀴 돌면서 관찰할 수 있게 돼 있다. 장화를 준비하라는 지침이 있었지만, 필수 아이템은 아니었다. 나를 포함해 여러 명이 장화를 신지 않았다. 그러나 백산차, 월귤, 은방울꽃, 두루미꽃, 민솜대 등이 잇달아 나타나자 너나없이 등산화 젖는 줄 모르고 데크 밑으로 내려갔다.

민솜대, 두루미꽃, 은방울꽃 등 백합과 흰 꽃들 동시에 감상

백산차는 진달래과의 상록 작은키나무(관목·떨기나무)로 이 나무의 흰 꽃이 무리 지어 핀 모습은 이번 백두산 탐사에서 가장 자주 볼 수 있었지만, 우리에겐 낯선 광경 중 하나였다. 잎을 따서 손으로 비벼 코에 대어보니 강렬하고 독특한 향이 처음 맡아보는 것이다. 박대문 시인(전 수도권매립지관리공사 사장)은 “박하 향과 솔잎 향이 독특하게 어우러진 백산차는 예로부터 차로 마시고 차례상에도 올렸다”고 말했다.

두루미꽃, 은방울꽃은 국내에서도 드물지 않다. 그러나 이들과 함께 강원도 이북에서만 자생하는 민솜대까지 가세해 백합과의 앙증맞은 흰 꽃들을 이렇게 한 장소에서 동시에 보기는 매우 어려운 것 같다. 민솜대는 가까운 친척인 풀솜대와 달리 잎자루가 없고 잎의 밑부분이 둥글며 줄기를 감싸고 있다. 두루미꽃은 두툼하고 넓은 잎에 비해 가는 줄기가 두루미의 가늘고 긴 다리를 연상시킨다. 그렇지만 그 명칭은 잎과 잎맥 모양이 두루미가 날개를 넓게 펼친 것과 비슷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한국의 재발견 식물탐사대' 대원들이 지난달 14일 황송포습지에서 야생화 관찰과 촬영에 여념이 없다.
'한국의 재발견 식물탐사대' 대원들이 지난달 14일 황송포습지에서 야생화 관찰과 촬영에 여념이 없다.

‘5월에 피는 백합’ 은방울꽃은 흰색의 작은 종 모양이 독특해서 서양에서는 ‘성모 마리아의 눈물’에서 피어난 꽃으로 통한다. 선과 악, 신앙과 이교 등 서로 반대되는 개념에서 항상 올바른 선택을 하는 쪽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래서 이 꽃으로 만든 꽃다발이 행운을 가져준다고 믿는다. 종소리 대신 향긋한 사과향 또는 레몬 향을 주변에 퍼뜨리지만, 독성이 있다.

데크 왼쪽 옆의 키큰나무들은 대부분 잎갈나무였다. 우리나라에서 흔한 조림수인 일본잎갈나무에 비해 솔방울이 작았다. 수피는 일본잎갈나무가 붉은색인 반면 잎갈나무는 암회갈색이고, 잎갈나무의 수피 표면이 더 거칠게 갈라졌다. 잎갈나무들은 고목들이 많았고, 특이한 형상의 나무들에 장사수(莊士樹), 활불수(活佛樹), 선녀수(仙女樹) 등의 푯말을 붙여 놓았다.

 

황송포 습지 관찰데크 왼편으로 펼쳐진 잎갈나무숲. 잎갈나무는 가지가 수평으로 퍼지거나 밑으로 처진다.
황송포 습지 관찰데크 왼편으로 펼쳐진 잎갈나무숲. 잎갈나무는 가지가 수평으로 퍼지거나 밑으로 처진다.

양치식물과 이끼가 풍성한 가운데 월귤과 넌출월귤의 꽃 핀 개체도 많이 보였다. 진달래과 산앵도나무속의 상록 작은키나무인 이들은 국내에서는 강원도 고산지대에만 드물게 분포한다. 월귤은 땅속줄기가 뻗어나가며 가지가 땅에 붙어 증식되기 때문에 작은 군락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5~6월에 옅은 분홍빛을 띤 꽃이 2~3개씩 모여서 달린다. 넌출월귤은 철사처럼 가는 가지가 덩굴처럼 기면서 자란다. 월귤보다 전체적으로 작고, 분홍색 꽃이 1~2개씩 달린다.

“죽대아재비, 들쭉나무, 배암나무 등 국내 희귀종 새롭게 부각”

한국의 재발견 식물탐사대의 실무를 맡은 동북아식물다양성연구소 현진오 소장은 “월귤은 홍천의 풍혈지대 한 곳에 자생지가 있고 설악산 서북능선에서는 사라진 것같다”고 말했다. 장백산에서는 흔하지만, 국내에서는 사라져가는 북방계 식물로는 최근에 설악산에서 발견된 죽대아제비, 한라산과 설악산에만 서식하는 들쭉나무가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다고 현 소장은 강조했다.

죽대아재비는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로 황록색 꽃은 6~7월 가지 끝이나 잎겨드랑이에서 나온 긴 꽃자루 끝에 한 송이씩 밑으로 처진다. 침엽수림에서 자라며 북한에서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들쭉나무는 월귤과 같은 산앵도나무속의 소관목이지만, 월귤과 달리 낙엽성이다. 5∼6월에 방울 모양의 꽃이 지난해 가지 끝에 녹색이 도는 흰색으로 1∼4개씩 달린다. 8~9월에 흑자색으로 익는 열매는 달고, 신맛이 있다. 이 열매로 담근 술이 들쭉술이다.

하루 전인 13일에 식물탐사대는 장백산 관광의 거점도시 이도백하에서 약 60km 거리에 있는 부석림(浮石林)과 빙수천(氷水泉)을 다녀 왔다. 가깝게 붙어 있는 이들 두 지질공원은 불과 약 1100년쯤 전인 946년 백두산이 큰 규모로 분화했을 당시 분출된 화산암이 날아 와 쌓여 형성됐다고 한다. 부석이란 공기구멍이 많은 화산암이 물에 뜰 정도로 가벼워서 붙인 이름이고, 이들 바위가 숲을 이룬 듯하다고 해서 부석림이다. 안내판에는 “협곡에는 기괴한 돌들이 즐비하고 진풍경이 펼쳐진다. (…) 산은 물 때문에 더 기이하고, 물은 산 때문에 더 아름답다”고 써 있다. 빙수천은 화산 협곡의 일종인데 이곳 바위 틈 사이로 솟아오르는 물이 일년 내내 4.5 ℃ 안팎을 유지한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다.

 

부석림 안에 있는 기암괴석군은 화산 폭발과 지각 변동 후 형성된 협곡 지역에 자연 풍화와 빗물 유수에 의해 약 30여 곳에 걸쳐 형성돼 있다. 사진=박대문
부석림 안에 있는 기암괴석군은 화산 폭발과 지각 변동 후 형성된 협곡 지역에 자연 풍화와 빗물 유수에 의해 약 30여 곳에 걸쳐 형성돼 있다. 사진=박대문

부석림에 들어서자마자 나도옥잠화가 가장 많이 눈에 띈다. 국내에서도 높은 산에서는 가끔 볼 수 있지만, 여기에는 너무 흔해서 다들 놀라면서 반가워했다. 분홍노루발은 국내에서는 강원도에 서식한다고 일부 식물 백과에 나오지만, 본 사람은 거의 없다. 꽃대는 높이 20cm이고 7~15개의 동그랗고 예쁜 꽃이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총상(總狀)꽃차례로 달려 있는 모습이 환상적이다.

꽃 모양이 파라볼라 안테나처럼 생긴 나도범의귀는 역시 국내에서는 자생지가 한두 군데에 불과한 귀한 식물이다. 꽃대 길이가 15~25cm이고, 꽃은 5월에 피며 총상(總狀)꽃차례에 몇 개의 꽃이 드문드문 달린다.

국내에서 멸종위기 Ⅱ급인 기생꽃도 이곳에선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기생꽃은 한반도 북부와 지리산, 가야산, 태백산, 설악산, 대암산 등 고산지대에 적은 수가 자생한다. 키는 7~25cm로 작고 잎은 5~10장이 돌려난다. 지름이 1.5~2cm의 흰 꽃이 1개씩 달리는데 별 모양의 꽃이 너무 예뻐서 황진이도 울고 갈 정도라고 해서 기생꽃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또 꽃 모양이 기생의 머리 위에 얹는 화관과 비슷해서 그렇게 불렀다는 설도 있다.

 

부석림과 방수천을 비롯한 장백산 지역에서 만난 식물들. (왼쪽위부터 시계방향) 분홍노루발, 백산차,, 기생꽃, 나도범의귀, 장백제비꽃, 들쭉나무. 사진=백산차, 기생꽃, 나도범의귀, 들쭉나무는 박대문. 분홍노루발, 장백제비꽃은 임항.
부석림과 방수천을 비롯한 장백산 지역에서 만난 식물들. (왼쪽위부터 시계방향) 분홍노루발, 백산차,, 기생꽃, 나도범의귀, 장백제비꽃, 들쭉나무. 사진=백산차, 기생꽃, 나도범의귀, 들쭉나무는 박대문. 분홍노루발, 장백제비꽃은 임항.

그 밖에도 15일 백두산 천지 가는 길에 만난 노랑만병초(진달래과) 군락과 소천지 부근의 배암나무(산분꽃나무과)는 우리나라에서 거의 설악산 정상 부근에서만 볼 수 있는 귀한 나무다. 노란 꽃을 피운 장백제비꽃도 한국에서는 설악산에서만 드물게 볼 수 있다. 노랑제비꽃과 유사하지만, 잎이 콩팥 모양이고 아래 꽃잎에 자주색 줄무늬가 있다는 게 다른 점이다.

국내 멸종 위기종의 백두산 내 서식 형태 잘 살펴 보전 방향 설정해야

백두산의 식물을 보면서 위도에 따른 식물분포에 기후변화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 봤다. 기생꽃, 노랑만병초, 장백제비꽃, 배암나무, 죽대아재비, 들쭉나무, 분비나무 등의 북방계 식물은 국내에서는 모두 사라져 가거나 극한 상황에 몰려 있다. 식물은 기후가 변하면 더 추운 지역을 향해 씨를 뿌리는 등 이에 적응하기 위한 시도를 한다. 그러나 최근 기후변화는 워낙 급속도로 진행되다 보니 식물 서식지의 북상 속도를 앞지른다. 온난화가 도망가는 식물을 ‘덮쳐 버리는’ 것이다. 더욱이 해발 1000 미터 이상의 고산지대에 갇힌 식물들은 멀리 도피할 방도가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설악산 정상에서만 볼 수 있는 배암나무.  고산지대에만 분포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번 탐사에서 일행은 해발고도가 높은 소천지 뿐만 아니라 지하삼림이라고 부르는 곡저삼림(谷底森林)에서도 개화한 개체를 볼 수 있었다.  사진=현진오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설악산 정상에서만 볼 수 있는 배암나무. 고산지대에만 분포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번 탐사에서 일행은 해발고도가 높은 소천지 뿐만 아니라 지하삼림이라고 부르는 곡저삼림(谷底森林)에서도 개화한 개체를 볼 수 있었다. 사진=현진오

신준환 동양대교수(산림생태학)는 “국내 북방계 식물에게 백두산은 많은 일가 친척이 살고 있는 고향과 다름없다”면서 “그런 점에서 백두산 지역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의 설명이 이어진다. “국내 북방계 식물은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만 백두산의 같은 종은 다양한 서식지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잘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잘 관찰하고 분석해서 국내 희귀식물의 보전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장백산을 품은 중국 지린(吉林)성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는 한반도가 외세에 의해 점령당했을 때 독립군이 저항의 불씨를 이어가던 터전이다. 북으로 피신해서 살 길과 활로를 모색했던 우리 민족과 대조적으로 먼 과거 간빙기 때 한반도로 남하했던 북방계 식물들은 이제 북쪽으로 피난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현진오·나혜련, 한반도 생물자원 포털(2011.12.16.) 국립생물자원관 생물다양성 정보
국가생물종 지식정보시스템, 국립수목원
박선주, 한국의 멸종위기 야생생물, 한국자연환경보전협회
정연옥, 오장근, 신영준, 《야생화 백과사전》, 가람누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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