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만선>과 랭글리의 그림이 담은 좌절과 절규
기울어진 무대, 생존의 위태로움 시각적으로 재현
운명 거스르는 싸움, 현실의 바다는 삶을 허락할까
상식이 무너진 사회 어디까지 맞서야 하나 의문
연극 ‘만선’을 다시 만나다
천승세의 희곡 '만선'은 1964년 초연된 이후 60년이 지난 지금도 무대에서 새롭게 해석되며 관객과 만난다. 이 작품은 2020년 국립극단 창단 70주년 기념작으로 계획돼, 2021년과 2023년에 이어 이달 초 세 번째 공연중이다. 이는 인간의 근본적인 비극성과 사회적 모순이 동시대 현실과 맞닿아 있다는 걸 보여준다. 이번 공연은 현대적 시각을 반영하여 작품을 새롭게 해석했다.
이번 연출에서 기존의 이야기 전개가 어떠한 방식으로 변화하고, 이 시대의 감각을 녹여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공연 관람의 중요한 요소다. 변화된 해석이 무대 위에서 어떻게 형상화되는지는 관객마다 다르게 느끼겠지만, 이야말로 작품을 새롭게 바라보는 묘미이자, 연극이 지닌 다층적 의미를 탐색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만선’은 한국 사실주의 연극의 대표작으로, 1960년대 어촌이 배경이다. 당시 한국 사회는 극심한 빈곤 속에서 산업화의 물결이 밀려오고 있었으며, 변화하는 어업 환경과 경제적 불평등이 어민들의 삶을 위협했다. 희곡이 처음 무대에 올랐을 때, 주인공 곰치와 구포댁을 중심으로 한 인물들은 절망적인 운명을 뚫고 살아 나가는 민중의 상징이었다.
연극은 곰치가 염원하는 만선의 희망과 동시에 극심한 몰락의 여정을 담는다. 연극 초반에 펼쳐진 기대감은 위기의 서막으로 돌변한다. 급기야 선주 임제순에게 진 빚과 이자 탓에 배가 묶여 생존의 벼랑 끝에 몰린다. 바다를 떠날 수도 없고, 돌파구도 보이지 않는 절박한 상황에서 곰치의 만선에 대한 집착은 더욱 깊어진다.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곰치는 부당한 조건을 뒤엎기 위해 자연의 거센 위협을 마다하지 않고 바다로 향한다. 선주에게 진 빚과 가혹한 계급 구조는 그의 숨통을 조인다. 선택지가 없는 현실 속에서 필사적으로 배를 띄운다. 그와 주변 인물들은 가난과 권력의 그물망 속에서 허우적댈 수밖에 없는 대중의 질곡을 나타낸다.
연극의 주요 서사
곰치는 전통적인 어업 방식을 고수하며, 거친 바다의 폭풍에도 쌍돛대를 세운 채 맞선다. 그러나 그의 집념은 점차 시대적 변화와 무관한 고집으로 굳어지고, 끝내 전형적인 가부장제의 화신이 된다. 그는 생존을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지만, 그 투쟁 자체가 시대의 흐름 속에서 이미 패배로 규정된 싸움이었다. 선주와의 계급적 관계를 자연 질서처럼 받아들이는 구조적 현실에서, 그의 몰락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으로 다가온다.
급변하는 산업과 자본의 논리가 삶을 재편하는 상황에서, 곰치는 변화하지 못한 채 과거의 방식에 매달린다. 결국 그는 아들 도삼과 선원 연철의 죽음에 이르게 하고, 구포댁의 실성과 딸 슬슬이의 자살이라는 엄청난 비극을 맞이한다. 오히려 거대한 구조 속에서 개인이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냉혹한 현실을 증명한다. 이 싸움이 과연 개인의 잘못된 선택 때문인지, 혹은 애초에 벗어날 길이 없는 질곡 때문인지. 이 의문은 연극이 끝난 후에도 관객을 붙잡는다.
구포댁은 남편과 세 아들을 바다에서 잃고, 막내아들만큼은 같은 운명이 되지 않도록 뭍으로 보내려 한다. 남편 곰치와는 판이하게 다른 그녀의 선택은 또 다른 무모함일 수도 있지만, 모성의 발현을 넘어 생존을 위한 절박한 결단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곰치가 만선에 대한 집념으로 바다를 향해 달려간다면, 구포댁은 끝없이 반복되는 비극을 끊어내기 위해 바다를 거부한다. 숙명을 수용하지 않으면서 기존 질서를 거부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으려는 또 다른 형태의 저항일 수 있다.
각색의 내용과 의미
연출가 심재찬은 구포댁을 운명에 순응하는 여성이 아닌, 삶을 개척하는 주체적인 인물로 그리고자 했다고 밝혔다. 이는 그녀가 기존 질서를 거부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강한 여성상으로 자리잡기를 바라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극에서 구포댁은 실성한 듯한 모습으로 아들을 홀로 육지로 보내지만, 성공 여부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한 선택이다. 어쩌면 더는 잃을 수 없다는 절박함 속에서 전통적 삶의 방식을 거부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결국, 그녀의 선택을 저항으로 볼 것인지,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벗어나려는 마지막 몸짓으로 볼 것인지는 관객의 몫이다. 구포댁의 모습은 전통적인 여성상을 넘어, 온전히 살아갈 수 없는 현대의 왜곡된 현실에 맞서려는 개인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광기의 형상으로 읽힌다.
슬슬이와 연철: 다음 세대의 저항과 희생
“대체, 누구를 위한 만선이여?”
곰치의 딸 슬슬이의 외침은 삶을 지키려는 절박한 경고이자, 아버지의 무모한 고집이 몰고 온 파국에 대한 마지막 저항이다. 슬슬이는 바다가 앗아간 가족의 비극을 몸소 겪으며, 더 이상 바다를 생존의 터전이 아닌 죽음의 심연으로 여긴다. 그러나 곰치는 그 경고를 외면한 채, 바다와 운명을 함께하겠다는 집념을 놓지 않는다. 그 끝없는 집착은 결국 가족마저 희생시키는 갈등의 골을 만든다. 오늘날에도 무모한 신념으로 경제적·사회적 현실을 외면한 채 집행되는 세습적 희생의 반복을 떠올리게 한다.
“이놈의 세상과 싸워서 이기면 되는 것이란 말이여.”
연철의 죽음은 곰치의 비극에 소모되는 듯한 인상이 짙다. 연철은 선주 임제순이 자본의 힘으로 슬슬이를 차지하려는 부당한 현실에 맞서려 한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이미 정해진 듯한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 정의와 사랑을 완성하려던 다짐은 거대한 구조의 압박 속에서 희생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연철은 거대한 파도에 떠내려간 좁쌀처럼, 이 사회가 얼마나 냉혹한가를 드러낸다. 정의로운 분노만으로는 구조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음을.
이들 캐릭터는 동시대적 시각에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사례이기도 하다. 특히 젊은 세대 인물들의 역할을 강조하며, 원작과 다르게 자신만의 신념과 가치관을 지닌 인물로 설정되었다. 이는 오늘날 청년 세대가 처한 현실과 맞물린다. 사회적 불평등과 경제적 불안정 속에서 구조적 한계를 돌파하려는 몸부림, 그리고 그것이 실패했을 때 맞닥뜨리는 냉혹한 현실이 연철과 슬슬이의 서사로 표현된다.
작품 속 선주 임제순 캐릭터는 과거의 객주에서 현대의 신자유주의적 자본가로 더 명확해진다. “곰치가 죽든 말든 알 바 없다”는 그의 말은 경제적 수탈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어민들의 고통 위에 부를 축적하는 인물을 통해 시대의 메커니즘을 처절하게 보여준다. 이는 오늘날 플랫폼 노동과 비정규직 착취, 재벌 중심의 경제 구조에서 반복되는 노동자의 희생과 맞닿아 있다. 겹벌이 노동으로 전전하며 생계에 매몰되는 삶이 일상이 되었고, 프리랜서나 계약직 노동자들이 언제든 계약 해지를 통보받는 현실 속에서, 임제순의 탐욕은 특정 시대를 초월한 자본의 논리로 작동한다. 극이 그리는 경제적 계급 갈등은 과거만의 잔재가 아니라,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구조적 불평등의 단면을 담고 있다.
그림에서 발견하는 연극 ‘만선’의 정감들
월터 랭글리(Walter Langley, 1852~1922)는 19세기 노동 계층의 삶을 기록한 사실주의 영국 화가다.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절망과 체념 속에서도 생을 포기하지 않고, 거친 현실을 견디며 살아간다. 그 억척스러움은 연극 ‘만선’에서 펼쳐 보이는 인물들과도 맞닿는다. 바다는 무한히 넓고 인간은 그 위에 던져진 작디작은 존재이지만, 생계를 위해 그들은 다시 파도 속으로 나아간다. 랭글리의 회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감정의 무게는, 만선의 무대가 관객에게 선사하는 감각과 교차한다.
랭글리의 ‘슬픔은 끝이 없고’에서 우리는 부연 설명이 필요 없는, 상실의 고통 그 자체를 본다. 더군다나 그림 속 바다는 폭풍이 지나간 후의 고요한 수면이며, 그 앞에 앉은 여인은 검은 옷을 입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삶의 무게를 견디고 있다. 절망은 이미 그녀의 몸에 배어 있고, 애도 속에서도 그녀의 어깨에는 지속되는 삶의 무게가 얹혀있다. 연극 ‘만선’ 속 가족들도 돌아오지 않는 배를 기다리며 절망 속에 무언가를 붙잡으려 안간힘을 써본다. 연극이 무대 위에서 펼치는 빛의 시간과 배우들의 움직임은 랭글리의 붓 터치와 어울리는 정적인 슬픔을 표현한다.
이들의 삶에 대한 의지는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들’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거친 옷을 걸친 여성들의 어깨에는 노동의 무게가 내려앉았고, 그들은 초췌한 몰골로 나아간다. 바다를 등진 채, 생존의 필수품인 무거운 광주리를 지고서. 좌절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 존재, 그것이 랭글리가 포착한 인간이다. ‘만선’의 인물들도 물질적 궁핍 속에서 희망을 좇아 생을 견디어낸다. 바다에는 욕망과 절박함, 체념과 생존의 몸부림이 교차한다. 이 순간들에서 삶의 거친 결이 그대로 드러난다.
연극 속 바다는 생존의 경계이며, 그곳으로 나아가는 자와 남겨진 자의 구분은 사회적 질서가 만들어 낸 역할에 불과하다. 이는 성별이 아니라 생존 방식의 차이로 드러난다. 바다는 가족을 지키려는 선택의 공간이자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필연적 무대가 된다. 누구도 그 무게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생존의 책임은 특정 개인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다. 만선은 바다를 둘러싼 인간의 숙명적 투쟁을 통해, 구조적 불평등과 끝없는 생존의 굴레를 비춘다. 바다에서는 거센 폭풍 속에서 생존을 위한 사투가 벌어지고, 육지에서는 고요한 절망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또 다른 투쟁이 이어진다. 이 연극은 바다와 육지를 대비시키며, 결국 누구도 투쟁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랭글리의 그림은 폭풍이 지난 후 남겨진 자들의 삶을 담아낸다. 그림에 포착된 바다는 늘 고요할 뿐이다. 그러나 잔잔함은 곧 깊은 절망의 응축이기도 하다. 반면, ‘만선’은 폭풍이 몰아치는 동안,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인간 군상을 포착한다. 그림과 연극에서 바다와 육지는 장소가 아니라, 삶과 죽음, 떠남과 남음이 교차하는 공간으로 설정된다. 연극 속 인물들은 선택의 여지 없이 삶을 부여잡지만, 그들의 노력은 언제나 더 큰 구조적 힘 앞에서 좌절된다.
두 작품 속 인물들이 처한 현실은 시대적 배경은 다르지만, 생존 방식과 계급적 조건이 삶의 가능성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우리는 바다와 육지에서 지속되는 노동과 계급, 불평등의 구조를 다시금 체감한다. 삶의 구도는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지배하며, 부와 권력이 개인의 선택과 가능성을 좌우하는 현실 속에서 투쟁은 끝나지 않는다. 이는 특정한 시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도 계속되는 거대한 파도 속에서 우리가 직면해야 할 근본적인 질문이다.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는 무대 연출
'만선'의 무대 연출은 관람의 묘미를 여러 감각으로 채워준다. 기울어진 무대는 곧 삶의 경사, 존재의 기울어짐, 그리고 인간이 선 채로 감당해야 할 불안과 위태로움의 시각적 재현이다. 만선의 무대는 수평적 안정감 대신 생존의 위태로운 조건을 직접적으로 체감하게 한다. 이는 조형적 효과를 넘어, 바다가 품은 비극성과 인간의 무력함을 형상화하는 장치다.
또한 5톤의 비바람이 무대를 덮치는 순간, 관객은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존재가 된다. 물살이 무대 위 배우들의 몸을 때리고, 바닥에 부딪히며 튀어 오를 때, 바다는 더 이상 추상적인 배경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가 된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는 흐려지고, 폭풍의 중심에 내동댕이쳐진 채 사투를 벌였을 배우들의 몸짓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뒤흔든다. 그러나 그 처절함 속에서도, 묘하게 아름다운 순간이자 경이로움을 맛보게 된다.
계속되는 비극과 저항의 의미
'만선'은 시대를 초월하여 반복되는 사회적 모순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를 더욱 스산하게 비춘다. 1960년대의 빈곤한 어촌에서 살아남기 위해 싸우던 곰치와 구포댁의 모습은, 2025년의 불안정한 노동시장 속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현대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만선’은 숙명적 비극이 아니라, 언제나 다른 방식으로 저항할 가능성을 남겨두었다. 구포댁이 선택한 무모한 가능성, 곰치의 끝없는 집념, 젊은 세대가 보여주는 변화의 움직임. 이 모든 요소는 관객들에게 다르게 해석되기도 하면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과연 어떤 방식으로 이 거대한 구조 속에서 싸우고 살아남을 것인가?
기본과 상식의 질서마저 혼돈 속에 휩쓸려 가는 이 시대에, 광기어린 저항이야말로 삶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선택이 되는 것은 아닌지. 구포댁의 실성이 절망이 아닌 또 다른 광기이자 투쟁의 형상이듯, 우리 또한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무엇을 버리고, 어디까지 맞서야 하는지를 끝없이 질문하게 된다.
관련기사
개의 댓글
댓글 정렬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