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세일즈맨의 죽음'과 도미에의 그림 '세탁부'의 공감

자본주의의 핵심인 경쟁, 여기서 이탈되는 나약한 존재들

형편없는 자기를 인정하는 시대, 가족의 해체를 촉진한다

가족 내의 갈등을 첨예하게 표현하는 배우들 열연 돋보여

연극의 프롤로그, 윌리 로먼이 여행 가방을 들고 무대를 가로지르는 장면. 삶의 무게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어두운 조명 아래 고개를 숙인 모습은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소모되고 버려진 한 인간의 초상이다. 사진=쇼앤텔플레이, T2N 미디어
연극의 프롤로그, 윌리 로먼이 여행 가방을 들고 무대를 가로지르는 장면. 삶의 무게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어두운 조명 아래 고개를 숙인 모습은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소모되고 버려진 한 인간의 초상이다. 사진=쇼앤텔플레이, T2N 미디어

시대를 관통하는 명작

아서 밀러(Arthur Miller, 1915~2005)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품으로 1949년 2월 10일 초연되었다. 지금까지도 세계 각지에서 새로운 해석이 더해지며 관객과 만나고 있다. 작품의 서사와 플롯은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요소를 담고 있지만, 내포된 주제와 질문은 시대를 초월해 오늘날에도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무엇보다 ‘세일즈맨의 죽음’이 꾸준히 공연되는 이유는 과거의 유산을 되풀이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인간 존재와 사회 구조의 본질을 성찰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아서 밀러는 전통적인 비극의 형식을 새롭게 확장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는다. 고전 비극이 왕족이나 영웅과 같은 고귀한 신분의 주인공이 성격적 결함이나 운명에 의해 몰락하는 과정을 그린다면, 밀러는 비극의 중심에 평범한 개인이 현실 속에서 겪는 좌절과 투쟁을 놓았다. ‘세일즈맨의 죽음’은 산업화 사회에서 개인이 점차 고립되고 공동체가 해체되는 과정을 세밀하게 다루었다. 작품은 개인이 감당하는 비극의 무게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배경이 되는 사회적 구조를 함께 성찰하게 한다.

국내에서도 여러 극단이 각색해 무대에 올려왔다. 현재 쇼앤텔플레이 기획사가 제작을 맡아, 지난 1월 7일부터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리미티드 런’(한정 공연)으로 선보이고 있다. 작품이 지닌 보편적 공감의 힘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일부 설정이 현대적 가치와 완벽히 조화를 이루지 못해 불편하기는 하다. 그러나 인간관계의 균열과 사회 구조의 모순을 드러내는 서사적 힘은 여전하며, 작품의 가치를 돋보이게 만든다.

주인공 윌리 로먼은 60세가 넘도록 가족을 위해 헌신하지만, 결국 죽음이라는 비극적 결말에 이른다. 그의 몰락은 개인의 실패로 치부할 수 없는, 가부장제와 경제적 불안정성이 만들어낸 필연적인 비극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성공한 가장’이라는 역할에 매달리던 그는 점차 시대의 흐름에서 밀려나고, 더 이상 유능한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면서 깊은 절망에 빠진다. 이에 우리는 인간이 도구처럼 소모되다가 결국 폐기되는 자본주의 단면을 마주하게 된다.

 

가족 성원과 상상의 인물이 등장하는 장면. 극의 갈등이 종합적으로 드러나며 관객은 이들의 단절과 좌절을 마주한다. 사진=쇼앤텔플레이, T2N 미디어
가족 성원과 상상의 인물이 등장하는 장면. 극의 갈등이 종합적으로 드러나며 관객은 이들의 단절과 좌절을 마주한다. 사진=쇼앤텔플레이, T2N 미디어

‘세일즈맨의 죽음’은 사회가 인간의 존엄성과 가족공동체의 본질을 침식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평범한 가장이던 남성이 평생 지켜야 할 가치라 믿었던 ‘성공’은 삶의 희망이자 버팀목이었지만, 결국 그를 고립시키고 무너뜨리는 모순으로 작용한다. 개인의 비극만으로 일축할 수 없는 서사이면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소시민의 애환이다.

작품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본질적인 사유를 자극한다. 노동은 삶을 지탱하는 의미인지, 우리를 소진하는 굴레에 불과한지. 끊임없는 경쟁으로 희생하는 것은 무엇이며, 잃어버린 것들은 되찾을 수 있는지. 밀러의 비극은 우리가 선택했다고 믿었던 길이 얼마나 한정적이었는가를, 아울러 이 길 위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초상을 정교하게 비춘다.

가족 구성원에서 개인의 핍진함으로

가족을 하나의 경제 단위로 조직해 착취하던 자본주의는 현대에 와서 방식이 달라졌을지언정,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개인은 노동력으로 평가받으며, 가정은 따뜻한 유대의 공간이라기보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단위로 기능한다. 과거에는 가족이 상호 의존하며 사회적 안전망의 역할을 했다면, 현대 사회에서는 생존의 책임이 각자에게 전가되면서 가족의 결속력은 약화하고 있다. 이렇기에 ‘세일즈맨의 죽음’은 신파극이랄 수 없고 개인의 좌절을 감상적으로 소비하는 걸 경계하며,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 소외라는 구조적 문제를 조명한다.

이러한 고찰은 오노레 도미에(Honoré Daumier, 1808~1879)의 '세탁부'(La Blanchisseuse, 1863년경)에서도 발견된다. 이 작품은 19세기 산업화 시대 노동자의 현실과 가족이 겪는 고단한 삶을 통해 인간 존재의 무게와 절망을 담아냈다. 그림 속 세탁부는 한 손에 무거운 빨래 보따리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어린 딸의 손을 잡은 채 가파른 계단을 오른다. 이들이 함께하는 모습에서 따뜻한 유대감이 느껴지기보다는, 각자가 짊어진 삶의 무게에 눌려 있는 듯한 깊은 슬픔이 전해진다. 엄마의 손을 잡은 딸은, 의지하는 모습이라기보다 무력하게 이끌려 가는 듯하다. 생계를 잇기 위해 힘겹게 걸음을 내딛는 세탁부의 모습에는 이미 깊은 피로가 서려 있다.

 

아노르 도미에의 ‘La Blanchisseuse’, vers 1863 49.0x33.4cm 사진=오르세미술관 © Musée d’Orsay
아노르 도미에의 ‘La Blanchisseuse’, vers 1863 49.0x33.4cm 사진=오르세미술관 © Musée d’Orsay

그녀가 딸과 함께 마주한 현실의 파고는 거칠고 험난하면서, 끝없는 노동과 피로를 가중한다. 계단 끝에서 아이를 내려다보는 어머니의 시선 너머로 펼쳐진 거대한 산업단지는 이들이 감당해야 할 노동과 삶의 무게를 강조한다. 캔버스 바깥에는 또 다른 계단이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상상의 공간이 펼쳐진다. 계단은 이동 경로가 아니라, 세대를 넘어 반복되는 삶의 굴레이자 노동의 연속성을 상징하는 요소로 다가온다. 그림 전체에 깃든 ‘부드러운 체념’은 노동과 생존의 굴레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를 관통하는 구조적 흐름임을 환기한다. 작품은 현실 묘사를 넘어,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본질적인 문제에 시선이 닿도록 길을 열어 준다.

도미에는 거친 붓터치와 어두운 색감을 사용해 노동자의 현실을 생생하게 담아낸다. 특히 짙은 어둠을 강조하면서 그림 속 인물들에게 고단함의 깊이를 불어넣는다. 그래서인지 그림에서 계단의 끝은 막다른 벼랑처럼 보이고, 삶의 무게가 더욱 뚜렷하게 느껴진다. 그의 작품은 산업화와 자본주의에서 가족의 유대가 얼마나 위태로운가를 확인시킨다. 이는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생존 경쟁에 내몰려 점점 고립되는 로먼 가족의 모습과 겹친다. 두 작품 모두 가족이 경제적 기능을 수행하는 단위로 축소된 현실을 드러내며, 이러한 변화가 언제부터 시작되어 지금에 이르렀는지 돌아보게 한다.

배우의 열연과 연극의 미학, 그리고 철학

연출을 맡은 김재엽은 원작의 핵심 주제를 존중하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더해, 고전과 현대적 해석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무대를 완성했다. 작품에는 오랜 경험을 쌓아온 배우들이 참여해 각자의 연기로 극의 깊이를 더한다. 윌리 로먼 역의 박근형과 손병호는 인물의 복잡한 내면과 지난한 삶을 섬세하게 풀어낸다. 린다 로먼 역의 손숙과 예수정은 당시의 수동적인 아내상을 현대적 시선에서 재해석해 작품의 의도를 분명하게 전달한다. 또한 아들 비프 로먼과 해피 로먼을 연기하는 배우들은 가족 간의 갈등과 심리적 균열을 생생하게 표현하며, 관계의 단절과 소외감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세일즈맨의 죽음’ 2025년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들. 사진=쇼앤텔플레이, T2N 미디어
‘세일즈맨의 죽음’ 2025년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들. 사진=쇼앤텔플레이, T2N 미디어

연극은 독특한 무대 구조를 활용해 관객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과거와 현재의 장면이 자연스럽게 교차하며, 최소한의 무대 장치만으로도 시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연출이 돋보인다. 하나의 공간에서 현재와 과거가 동시에 펼쳐지는 방식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무너져가는 과정을 온전하게 보여준다. 극의 전개를 따라가면서 관객들은 시간과 공간이 변하는 흐름 속에서 등장인물들의 내적 갈등을 직관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연출을 온전히 느끼고자 한다면 작품의 기본적인 흐름을 미리 이해해 두는 것이 좋다. 극의 맥락을 미리 숙지해서 장면마다 숨겨진 의미를 발견하다 보면, 극이 전하는 미학적 체험을 한층 풍부하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작품에서 중요한 상징으로 등장하는 오브제 중 하나가 스타킹이다. 젊은 시절 윌리가 연인에게 스타킹을 선물하는 장면과 현재 린다가 찢어진 스타킹을 기워 쓰는 장면이 교차하며 극에 입체감을 더한다. 이 오브제는 기억의 환기이면서, 가족의 균열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스타킹은 주인공의 경제적 성공과 가부장적 권위를 상징하는 동시에, 그 기반이 얼마나 불안정한지를 보여주는 이중 기호(Dual Sign) 역할을 한다. 젊은 시절과의 대비는 주인공의 쇠락과 경제적 실패, 나아가 가족의 해체까지 암시한다. 이로써 가족 내 관계에서 신뢰와 존엄이 무너져가는 과정을 체감하도록 이끈다.

시대를 관통하는 희곡의 메시지를 통해 현대 사회를 바라보면, ‘세일즈맨의 죽음’은 타인의 얼굴을 비추는 페르소나처럼 우리의 본모습과 내면을 반영한다. 자본주의는 인간 소외와 좌절을 반복적으로 양산하며, 풀리지 않는 매듭처럼 우리의 일상을 억누른다. 하지만 작품은 이러한 현실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데 머물지 않는다. 인간의 존엄과 내적 평화를 되찾기 위한 질문을 던지며, 새로운 가능성을 사유하도록 유도한다.

극은 ‘인간은 자신이 형편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라는 실질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윌리 로먼이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지 못하고 과거의 환영에 매달리는 장면은 생존에 대한 집착에 흔들리는 현대인의 전형이랄 수 있다. 한 사람의 고충은 가족과의 단절과 시대의 비애로 확장하며, 입체적으로 드러난다. 두 아들과의 대화가 격해질수록 그의 고뇌는 깊어지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마다 가족 간의 소통 부재가 만들어내는 상실감은 커져간다. 작품은 이를 집요하게 포착하며, 인간이 짊어진 고통의 근원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되묻는다.

‘인간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면서도 삶의 가치를 찾을 수 있을까?’ 이 질문은 특정 시대에 국한되지 않는다. 삶의 피로와 사회적 압박 속에서도 존엄을 지킬 수 있을지, 그리고 관계의 단절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지를 묻는다. 윌리 로먼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도미에의 그림에서도 반복된다. 두 작품은 서로 다른 장르 안에서 인간의 삶을 비추며, 사회 구조 속에서 인간의 소외와 관계의 단절을 묘사한다. 결국, 시대를 초월해 인간이 맞닥뜨리는 상실과 고독을 표출하며, 그 안에서 끝내 붙잡아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되새기게 만든다.

연극은 오는 3월 3일까지이며, 이후 지방 순회공연도 계획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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