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탐방] 길 위의 근현대사 / 광화문 가는 길 ③
역사는 반복한다…시민 죽는데 책임자 승승장구
100년 묵은 친일 역사 말끔히 처단하는 원년 삼자
오늘 첫 탐방지 용산도시기억전시관을 찾았다.
2009년 1월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2가 224-1번지, 이곳은 '섬'이었다. 21세기 선진 문화와 민주주의가 성숙했다고 믿었던 시대에, 여기 남일당 건물은 민주와 인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그야말로 모두로부터 외면당한 야만의 섬이었다. 그 섬에서는 법보다 주먹이 먼저였고, 거대한 개발 이익 앞에 인권은 수면 아래에서 숨을 죽였다. 1월 20일 새벽이 밝아올 무렵 시작된 이명박 정부의 무리하고 성급한 진압과 공권력의 잔혹한 폭력 앞에 철거민 다섯의 생명이 꺼져갔다.
신자유주의의 화신 이명박 정권의 무도함이 빚은 용산참사
최후까지 저항할 수밖에 없었던 철거민들은 대부분 인근 상가의 자영업자들이었다. 자본과 권력은 가게를 차린 비용에도 턱없이 모자란 돈을 내밀며 그들을 협박했다. 한겨울 거리 한복판으로 죄없는 시민들을 내쫓으려 했건만, 어떤 공권력도 그들을 지켜주지 않았다. 용역 깡패들은 가게 앞에 비둘기의 사체를 던져놓기도 하고, 썩은 오물을 투척하면서 장사를 방해했다. 구청 앞 1인 시위자를 찾아가 물리력을 사용하고, 경찰 대신 물대포를 쏴댔다. 사고 당시 남일당 망루 아래층에서 일부러 불을 질러 매연으로 철거민을 공격했고, 소방관의 화재 진압도 막아섰다. 말 그대로 아비규환 무법천지였다.
정권의 악랄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유명을 달리한 철거민의 시신조차 유가족에게 인도하지 않았다. 게다가 검찰은 영장도 없이 무도하게 시신에 부검을 해댔다. 무려 2009년에 서울 시내 한 복판에서 벌어진 야만 행위들이다.
이명박 정권은 촛불을 든 시민들을 반정부 세력이라 규정하고, 여론을 조작해 용산참사에 대한 국민 분노가 커지는 것을 막으려 했다. 지금의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이 외쳐대는 '반국가 세력'이란 말과 어찌 그리도 닮아 있는지 섬뜩하다. 참사의 책임을 철거민에게 돌리던 정부는 사건 발생 1년 여 만에 국가폭력 책임을 일부 인정했다. 하지만 책임자인 김석기 당시 경찰청장은 현재까지도 과잉 진압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채, 국민의힘 다선 의원으로 승승장구 하고 있다. 반면에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고 저항하며 결국 범죄자로 몰렸던 이들은 문재인 정권에서 사면은 되었지만 여전히 아픔과 갈등 속에서 고통받고 있다. 고위 엘리트층과 서민들의 삶이 얼마나 다른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
용산도시기억전시관은 용산참사의 이러한 아픈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한 공간이다. 전시관에 들어서면, 당시의 사진과 영상, 그리고 생존자들의 증언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이곳은 단순한 전시 공간이 아니라, 과거의 아픔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성찰하게 하는 장소이다. 용산참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 전시관에서 찾을 수 있다.
물과 기름은 섞이지 못한다
효창공원앞역 네거리에 이르러 인근 금양초등학교 담벼락을 따라 가니 이봉창의사역사박물관에 닿았다. 이봉창 의사는 나이 열 살에 조선이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배에 들어갔다. 유복했던 이봉창 가족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당시 일본인에게 토지를 사기 당해 가난한 삶이 시작됐다. 길지 않은 이봉창의 일대기를 보면 당시 식민지 청년들이 겪었을 고뇌가 어떤 갈래로 나뉘었을지 간접적이지만 실감나게 느낄 수 있다. 어린 이봉창은 어떻게든 일본인이 되고자 했다. 열심히 일하고 더 노력해서 일본인으로 인정받고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믿었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러나 물과 기름은 하나로 섞이지 못한다. 역설적이게도 이봉창 의사가 일본인이 되기 위해 한계치까지 자신을 밀어붙였을 때 비로소 자신이 선택해야 하는 삶의 경로가 독립운동임을 실감했다. 3.1운동 당시에도 가지지 못했던 독립의 열망을 자신의 험난한 일생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이다. 그길로 상하이로 내달렸다. 이왕이면 천왕을 제거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자신의 경험이 암살시도를 가능케 한 기반이었다. 결국 조선의 젊은이들이 흐르고 흘러 도착하고자 했던 고향이야말로 독립된 조선이었던 것이다.
역사는 단편적이지 않다. 이봉창의 시도가 실패했으나 결과로 윤봉길을 낳았고, 조선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 중국에 전달되었다. 역사는 이렇게 이어진다. 이 죽음들이 조선의 역사를 결국 카이로까지 견인해 갔다.
박물관은 이봉창의 짧은 생을 대변하듯 소박했다. 그러나 그 내부의 내용까지 소박하지는 않았다. 1호 한인애국단원의 조국해방의 열망이 깃든 이곳에서 벌써 9000번 대 한인애국단원이 나왔다. 더 많은 시민들이 이봉창의사 역사울림관을 방문한다면 조만간 10만, 100만 애국단원을 배출할 수 있으리라.
역사울림관 밖 나무에는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전날 있었던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 구속 취소 소식에 참가자 중 여럿이 일찌감치 광화문 집회장으로 향했고, 몇 명만이 삼의사 묘를 찾았다.
삼의사 묘역에 다다랐을 때 빛바랜 안내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연배 순으로 안중근, 백정기, 이봉창, 윤봉길 의사 등 네 분의 묘역이지만, 최근 비석과 표지석을 설치한 안 의사의 유해가 아직 송환되지 않아 현재는 삼의사 묘역이라 불린다. 그간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송환하기 위한 많은 노력이 있었다. 1986년 김일성 주석의 명령으로 북측이 대대적인 유해 발굴 노력을 기울였으나 실패했다. 2008년에는 남북공동조사단이 공동으로 유해 발굴 사업을 벌였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유해로라도 돌아올 땐, 적어도 친일매국의 역사가 정리된 조국, 친일파 없는 조국, 통일된 조국, 자주권을 온전히 회복한 조국이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히 권좌에서 물러나지 않을 것 같았던 독재자 박정희가 1979년의 10월 어느 날 김재규의 총격에 세상을 떴다. 그로부터 정확히 70년 전 일본 제국주의 침탈의 주역 이토 히로부미 역시 중국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처단됐다. 세 발의 총격을 받고 30분이 지나서 이토는 절명했다. 안중근 의사가 조선 강제 합병의 원흉을 처단하자, 조선 민중들은 이를 통쾌하게 여겨 안 의사의 변호사 비용을 모으는 등의 활동도 마다지 않았다. 이토 처단은 본격적인 독립투쟁의 서막을 열었고, 국권 회복의 시작이었다. 억압에 고통 받던 조선 민중에게 독립의 희망을 품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뉴라이트의 시초, 일진회와 도일사죄단
그러나 이를 어쩐다? 지금도 당시에도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면 자발적 식민지 백성이 되는 것에 주저함이 없는 이들은 존재한다. 안중근 의사의 목숨을 건 의거를 ‘조선이 망국으로 가는 길’이라거나 ‘백성을 모두 소멸케 하는 원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이토야말로 동양 평화의 선지자이자 조선 발전의 은인”이라고 칭송하는 이들이 있었다. 일진회, 동아찬영회, 도일사죄단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토의 처단은 조선 민족이 하나로 뭉쳐 국권 회복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의미였다. 또한 조선인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국가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을 다진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일진회, 동아찬영회, 도일사죄단 등 자발적인 반동들은 피해국인 조선의 백성들이 침략국 일본에게 사죄해야 한다는 천인공노할 짓거리를 스스럼없이 자행했다.
일진회는 조선을 일본에 합병시키자는 반민족, 매국 단체였다. 이토가 죽은 지 3일 후 일진회는 “오늘날 조선의 독립과 진보는 모두 일본의 덕택이며, 이토는 조선이 중흥하는 원훈”이라고 선언했다. 여기에 더해 이토 처단을 두고 조선 국민 전체의 뜻이 아니라는 점을 일본 천황과 일본 정계, 일본 국민에게 알리고 사죄하기 위해 ‘사죄단’을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일 사죄 13도 인민대표단’이 구성됐는데, 이들은 일진회 지방 간부들이었다. 당시 324개 군 중 200여 개 군이 경비 협조에 불응했다. 다수 민중 대표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도일사죄단은 일본으로 향하고야 말았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대한제국을 합병해 식민지로 통치했다. 일진회는 어떻게 되었을까? 일제의 손에 의해 해산되고 말았다. 역사는 반복된다던가? 친일·친미를 고집하는 윤석열이 결국 그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것도 궤를 같이 한다.
독립정신도 민주주의도 고정값이 아니다. 잠시 ‘아차’ 하는 사이 빛은 바래고 민주주의는 후퇴하는 법이다. 모두가 민주주의를 외면하지 않을 때만이 우리의 인권은 보장받고 민주주의도 온전히 지켜진다. 여기 삼의사 묘역에는 조선의 독립과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이 함께 잠들어 계신다.
다음 탐방지는 이번 제 3차 탐방의 주제인 ‘다시 반민특위로’를 본격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은 친일인명사전 발간으로 유명한 민족문제연구소가 후원하여 개관했다. 입구에는 박물관 건립 후원자들 명단이 새겨진 조형물과 지금은 자리를 잃어버린 반민특위터 표지석이 위치했다. 반민특위가 이승만과 친일경찰들에 의해 자신들의 자리를 잃어버렸던 것과 같은 처연한 처지가 느껴져 들어서는 순간부터 씁쓸한 마음이 일었다.
남은 탐방객들 모두가 민족문제연구소 후원 회원인 덕분에 박물관 직원들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역사탐방의 계기와 목적을 듣고 나서 서울시 관내 8개 기념관에서 공동으로 주관하는 스탬프 투어에 대해 알려 주었다. 근현대사박물관, 김근태기념도서관, 전태일기념관 등 민주화에 관련된 기념관들로만 구성이 된 의미 있는 역사 여행 안내서였다. 이 중 여섯 곳이 ‘국힘해체로 가는 길’ 탐방 팀이 앞으로 가봐야 할 장소다.
지금 대한민국은 공공선을 추구하는 선량한 DNA와 기필코 기득권을 놓지 않겠다는 반동의 DNA 간의 대회전이 벌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민주시민으로서는 결코 물러나거나 질 수 없는 싸움이다. 개인이 공공의 이익을 우선 대변할 때 결국 그 사회에 속한 개인들에게 보다 나은 삶이 보장되는 것을 우리는 경험할 필요가 있다. 이미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배는 선수를 돌렸다. 배가 거대할수록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법이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광화문의 함성이 귓가에 울린다.
* 동아찬영회 : 민영우(閔泳雨) 등이 중심이 되어 이토의 동상 건립을 추진하려는 목적으로 결성한 친일단체.
* 역사탐방은 광화문에서 열리는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주최하는 범시민대행진에 참가하기 전에 인근에 근현대사를 배워갈 목적으로 시작됐다. 이를 통해 다시는 이 땅에 윤석열과 같은 무도한 대통령이 나오지 않기를, 나아가 매국정당 국민의힘이 해체되는 역사를 만들기를 희망한다.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오늘을 비춰볼 수 있고 미래를 그려갈 수 있다.
* 국힘해체 가는 길 4차 탐방 신청 > https://forms.gle/zewzVexVsHHjm6MG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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