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탐방] 길 위의 근현대사 / 광화문 가는 길②

독립투쟁의 본류는 조국을 위해 삶을 던진 이들

남북 분단 전 독립운동사 사실 그대로 전달해야

서대문형무소에 민주투사의 영혼 가둔 건 조국

항일운동에 전 재산바친 우당의 소박한 기념관

106주년 삼일절인 지난 1일 '광화문 가는 길' 근현대사 탐방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 – 서대문 형무소 – 홍난파 가옥 – 어니스트 베델 집터 – 우당 이회영 기념관 순으로 진행됐다. 예상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과 서대문형무소는 많은 시민들로 붐볐다. 12.3 불법 계엄으로 역사에 대한 관심이 이전보다는 높아졌기 때문이리라.

임시정부, 대한민국 법통 논란의 중심에 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두고는 치열한 논쟁이 하나 있다. 뉴라이트가 주장하는 1948년 8월 15일 건국절 논란이다. 건국절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독립기념관장 김형석이 있는데, 그는 독립기념관장으로 임명된 이후에도 생각에 변함이 없다고 했다.

1919년 통합 임시정부의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1948년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임시정부에 있다고 헌법 전문에 명문화했다. 뉴라이트의 건국절 주장은 자신들의 국부인 이승만의 결정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모양이 됐다. 결국 뉴라이트의 이승만 국부 주장과 1948년 건국절 주장은 양립할 수 없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외부 - 사진제공 황의원 시민기자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외부 - 사진제공 황의원 시민기자

첫 탐방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을 들어서기 전 일행들에게 임시정부, 특히 법통 문제에 대한 새로운 화두를 던져 보았다. “삼일운동 이후 해방까지 독립운동을 정부의 형태를 유지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관장하고 있었을까?” 일견 예상할 수 있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래도 정부였는데 그렇지 않을까?” 

3.1운동은 이전의 항일 의병투쟁의 기세가 꺾인 채 침체되어 가던 항일 독립운동에 기폭제가 되어 준 것은 사실이다. 1919년 당시 독자적인 정부의 형태를 갖춘 단체만 해도 족히 5개는 되었다. 임시정부는 이 때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후 안창호 선생의 치열한 통합 작업으로 연해주의 대한국민회의, 한성정부, 상해임시정부가 통합에 합의하여 하나의 임시정부로 탄생했다. 이후 분열과 침체, 그리고 윤봉길, 이봉창 의사의 거사로 일본의 탄압과 동시에 장제스의 지원을 받으면서 끝내 광복까지 임시정부를 유지하게 됐다.

그러니 우리는 뉴라이트의 역사 왜곡 문제와는 또 다른 문제의식을 안고 기념관을 둘러보아야 한다. 남북한은 서로 다른 독립운동사를 가지고 있다. 임시정부의 위대함은 위대함대로 바라보자. 더불어 당시 우리의 독립운동사가 임시정부에 국한되는 역사였는지, 남북으로 분단되기 이전의 독립운동사는 어째서 고스란히 전달하지 않게 되었는지 살펴봐야 한다. 이런 설명과 함께 기념관 답사가 시작됐다.

 

상설전시관 1관 입구에 전시된 키네틱 아트. 3.1운동에 참여한 백성을 뜻하는 구슬 하나 하나가 태극에서 王으로 다시 民으로 변하면서 '제국에서 민국으로'의 이행을 나타낸다.  사진 : 황의원 시민기자
상설전시관 1관 입구에 전시된 키네틱 아트. 3.1운동에 참여한 백성을 뜻하는 구슬 하나 하나가 태극에서 王으로 다시 民으로 변하면서 '제국에서 민국으로'의 이행을 나타낸다.  사진 : 황의원 시민기자

독립운동사, 체제를 위한 전리품으로 남아서는 곤란

역사는 취사선택해서 기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올 선생이 자주 인용하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는 문구가 있다. ‘역사란 본질적으로 현재에 비추어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란 의미다. 도올은 또 우리 독립운동사에 대한 남북의 차이를 두고 ‘남과 북의 독립운동사 역시 각각 남한과 북한의 지도자의 입맛에 맞는 역사를 선택했다’고 했다.

이미 중대한 논란이 되고 있는 임시정부에 대해 또 다른 역사적 논란을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말은 아니다. 다만, 기념관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마치 일제 강점기 유일한 통치정부나 독립운동기구였던 것처럼 비춰지는 것만큼은 경계하길 바랄 뿐이다. 상설 전시관 위주로 돌아보니 기념관은 잘 정리된 한 권의 책 같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을 나와 왕복 2차선 도로를 건넜다. 가혹했던 역사의 '목격자' 서대문형무소로 향했다. 늦은 오후 예정이었던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항일 독립운동의 억압기구, 민주화마저 가두다.

독립투사와 민주투사를 동시에 수감시킨 역사가 있다.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서대문형무소이다. 일제는 통일로, 바로 1번 국도 상에 그것도 경희궁이 들여다보이는 자리에 서대문 형무소를 지었다. 유독 민족의 정기를 짓누르는 만행을 즐겼던 일제다. 남산에는 조선의 민족정기를 빼앗기 위해 일제가 박아 놓은 말뚝이 있다. 그것도 꽤나 많이. 영화 ‘파묘’를 통해 일제가 말뚝을 박았다는 사실이 많이 알려졌다. 말뚝이 서울 한복판 남산에 박혀 있다는 것은 우리의 심장과 머리에 박혀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면서 식민지 경영을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하고 실행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독립운동가를 잡아다 가두는 형무소를 영은문 인근에 지은 것도 동일한 맥락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우중에도 많은 시민들이 106주년 3.1절을 맞아 서대문형무소를 찾았다. 대형 태극기 앞 기념촬영 순서를 기다리는 시민들.  2025.3.1. 황의원 시민기자
우중에도 많은 시민들이 106주년 3.1절을 맞아 서대문형무소를 찾았다. 대형 태극기 앞 기념촬영 순서를 기다리는 시민들.  2025.3.1. 황의원 시민기자

“군인이 능히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가 능히 충성을 다하지 못하면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 - 대한제국 육군 참령 박승환

그럼에도 서대문형무소는 역설적이게도 저항의 상징이자 민족혼의 상징이라 볼 수 있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이 있었다. 일제가 군대 해산식을 강행하자 육군 참령 박승환은 권총으로 자결했고, 이 소식은 모든 부대에 전해졌다. 일순 임진왜란 이후 최초로 서울 시내의 시가전이 전개되었고, 12월에는 경기도 양주를 시작으로 전국의 의병을 모아 13도 창의군이 조직됐다. 국권 회복을 위한 대규모 서울진공작전을 개시한 것이다. 이 때 일제에게 검거된 수많은 항일 독립운동가를 수용하기 위한 시설이 필요했다. 1908년도 서대문형무소의 탄생 배경이다. 이렇듯 우리 선조들은 끊임없이 독립을 갈망했고 그 갈망이 전국적으로 폭발한 3.1운동과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서 항일 무장투쟁, 의열 투쟁을 비롯한 수많은 형태의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서대문 형무소는 지속적인 증축할 수밖에 없었다. 불법 무단 강점이 이어질수록 우리는 끊임없이 저항의 역사를 남겼다. 증축을 거듭해도 서대문 형무소를 가득 메운 항일 독립운동가들이야말로 독립을 포기하지 않은 저항의 증거였다.

 

역사 탐방 참가자가 수감 시설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 : 황의원 시민기자
역사 탐방 참가자가 수감 시설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 : 황의원 시민기자

식민지 백성에게 인권은 없었다. 독립운동을 하다 잡힌 여성은 햇볕 한 줌 들어올까 싶은 지하 감방에 갇혔다. 시설은 열악했고 취조는 혹독했다. 등급에 따라 배고픔의 강도는 심했고, 배고픔의 고통은 상한 생선의 눈알이라도 떼어 먹다가 식중독으로 이어지는 고통의 악순환을 낳았다. 많은 독립투사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시신은 쓸쓸하게 시구문을 통해 처리됐다. 그러나 언제나 형무소는 만원이었다.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조국을 잃은 고통보다 더한 고통이 없다는 것이다.

해방의 봄은 순식간에 찾아왔는데 역사는 서대문 형무소를 석방시켜주지 않았다. 패망한 일제는 미군이 진주하는 45년 9월 8일까지 미국 측에 조선에 대한 거짓정보를 흘려댔다. 끝내 한반도는 허리가 잘렸고 미군정은 조선의 자치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통한의 일제 치하 끝에서 친일파가 친미반공세력으로 옷만 갈아입고 다시금 백성들을 착취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대문형무소는 이후 시국사건에 연루된 민주화 인사들을 가두기 시작했다. 조봉암, 인혁당 사건 수감자, 문익환, 윤이상 등이 서대문형무소의 좁디좁고 차가운 바닥에 갇혔다. 독립투사의 영혼과 민주투사의 영혼이 모두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는데, 가둔 주체가 전자는 일제이고 후자는 조국이었다. 씁쓸한 사실이다. 적어도 대한사람이 대한사람을 서대문형무소에 가두는 것은 피했어야 하지 않을까? 어느덧 굵어지던 빗줄기가 힘을 잃어갔다. 광화문 집회를 생각해서라도 이 비가 그쳤으면…

고향의 봄인 줄 알았는데 빼앗긴 들이었던가?

슬슬 우비를 벗어갈 정도로 빗줄기는 잦아 들었다. 다음 탐방은 어디냐는 질문을 받은 때마침 홍난파 가옥이 보였다. 친일 음악가의 가옥을 보고 갈 것인지를 놓고 일행 사이에 의견이 갈렸다. 그래도 지나는 길이니 잠시 보고가기로 해서 잠시 홍난파 가옥을 둘러보게 되었다.

 

홍난파 가옥 앞에서. 사진 : 황의원 시민기자
홍난파 가옥 앞에서. 사진 : 황의원 시민기자

홍난파 가옥이 위치한 홍파동 2-16번지는 대한매일신보의 항일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 소유의 땅이다.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1917년 경성부청 지적조사국이 발행한 ‘경성부관내지적목록’에 이 땅의 소유자가 그의 부인인 메리 모드 베델로 표기돼 있다. 그렇다면 집터 표지판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어니스트 베델의 자취를 홍난파 가옥에도 표기해야 하지 않을까? 고향의 봄을 끝내 믿지 못한 홍난파를 뒤로하고 탐방 일행은 어니스트 베델을 찾아 발걸음을 바로 돌렸다.

맹자는 일찍이 인간이 갖춰야 할 네 가지 덕목이 있다고 했다. 어니스트 베델은 그 중 조선에 대한 측은지심과 일제에 대한 시비지심이 충만했던 외국인 항일지사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애초 러일전쟁을 취재할 목적으로 입국한 그가 일제의 만행을 참지 못해, 양기탁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 만행을 널리 알려 일제를 저지하려 한 걸 보면 조선에 대한 그의 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죽지만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게 하시오." 37세의 이른 나이에 남긴 그의 유언이다. 탐방 일행은 푸른 눈의 낯선 이방인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표시했다. 기회가 닿는다면 그의 유해가 묻힌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을 찾을 것이란 마음과 함께.

압록강을 넘어서

1년 5개월여 전인 23년 10월 22일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에서 ‘우당 이회영 선생’이 쫓겨났다. 수구 반공세력 뉴라이트 역사관에 함몰된 윤석열 정부의 만행이다. 제 2의 일제강점기가 다시 시작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의아하고 분한 일이다. 진짜로 나라를 잃은 자들의 독립을 위한 투쟁이 얼마나 처절한 것이었을지 상상이 안된단 말인가? 대한민국 건국절 논란을 일으키더니, 앞뒤 없는 이승만 국부론에 이어 식민지 근대화론을 들먹이다가, 이제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철거했다. 나아가 육사의 전신은 신흥무관학교가 아니라 미군정이 설치한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라고 한다.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의 1기부터 4기까지는 절반 이상이 일본군 출신이지 않았던가?

3.1운동 106주년 기념일의 역사탐방은 쉽지 않았다. 내내 고통스러운 탐방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 고통은 우당 이회영 일가의 고통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애초 우당 이회영 기념관은 전 주 탐방 코스에 있던 ‘기억6’과 함께 예장공원에 있었다. 규모도 훨씬 컸고 월 평균 방문객은 1000명이 넘었다. 지금의 사직동으로 이전 개관한 것은 작년 9월 11일이었다. 기념관이 새로 들어선 ‘묵은집’은 2019년 서울시가 우수건축자산으로 지정한 곳으로 배화학당을 세운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들이 살았던 서양식 주택이라고 했다.

우당 선생이 본격적인 항일운동의 길로 접어든 때는 1905년 11월로 추정된다. 을사늑약 이후 이동녕 등과 함께 항일운동의 거점을 국외에 마련하기로 협의하고, 간도 용정촌에 이상설을 파견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자 을사늑약 체결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고종의 특사가 파견됐다. 이때 이회영은 이상설과 이준을 추천하고 이들에게 고종의 밀서를 전달하는 데에 간여했다. 이후 신민회 결성, 상동청년학감으로 청년 지도, 1908년 이상설과의 블라디보스크 회동을 통해 국내외 독립군 양성 방침을 마련하고 실천해 나간다. 이듬해인 1909년 신민회는 비밀회의를 통해 만주에 독립운동기지와 군관학교를 만들어 갈 것을 결의하는데 이 장소가 바로 양기탁의 집이다.

우당은 경술국치가 있던 1910년 12월 가족과 권속을 포함한 40여명이 만주로 출발하여 이듬해 1월 삼원보에 도착했다. 당시 처분한 재산의 규모가 당시 민족계 은행인 천일은행, 한성은행, 한일은행 세 곳의 납입자본금을 합친 것보다 많았다고 한다.

 

기념관 입구에 세워져 있는 우당 이회영 선생 동상. 사진 : 황의원 시민기자
기념관 입구에 세워져 있는 우당 이회영 선생 동상. 사진 : 황의원 시민기자

참고로 왕현종 연세대 교수의 <우당 이회영 일가 독립운동 재산 조사사업>(2011)에 의하면 처분한 토지가 726필지에 266만 8335평으로 2015년 공시지가로 2조 원이 넘는다고 했다. 경학사, 신흥강습소, 신흥무관학교 서간도, 그리고 무수한 항일운동으로 이회영의 재산은 8년 만에 소진됐다.

기념관은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라고는 하지만 항일운동에 전 재산을 다 바친 항일 독립운동가 본인의 처연한 처지처럼 소박했다. 다만, 1층에서 2층으로 오르는 그 계단에 켜켜이 기록된 이회영 일가의 독립운동사의 무게가 사직동 전체를 누르고도 남음이었다. 기념관은 오는 2026년 선생 집터 인근의 명동문화공원 내로 완전 이전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역사의 대비를 많이 확인한 탐방이었다. 실제로 우당 선생은 임시정부를 애초에 달가워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기념관을 나오니 비는 거의 그쳤고 우리는 다시 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민기자와 함께하는 역사탐방 신청 > https://forms.gle/22byPRA2eiCYsXzo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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