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탐방] 길 위의 근현대사 / 광화문 가는 길 ④
외국인 묘역…조선을 사랑하고 조선에 묻힌 이들
대한매일신보 창간한 베델 죽음에 조선이 통곡해
최규하 침묵에 쿠데타 제압도 진실 규명도 물거품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거리를 오가는 시민들의 옷차림이 제법 가벼워졌지만 아직 봄은 오지 않았다. 우리 시민들에게 2025년의 봄은 평생의 기억에 남을 법하다. 그토록 기다리는 봄, 목을 빼고 기다리는 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오지 않고 애를 태운다. 불면의 밤을 끝내는 한 문장이야말로 우리의 봄을 열어 주리라.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끝내 봄은 올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탐방에 나섰다.
지하철 2호선 합정역 7번 출구에 모인 탐방단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을 시작으로 최규하 대통령 가옥을 들러 최종 광화문 집회 현장으로 이동하는 일정을 시작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은 합정역에서 걸어서 채 5분이 걸리지 않는 곳에 있다. 어찌해서 외국인들은 양화진에 묻히기 시작했을까? 양화진(楊花津)은 송파진(松坡津), 광진(廣津)을 모아 부르는 조선의 삼진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나루이긴하다. 애초에는 조선에 거류하는 외국인의 묘역으로 남산 등지가 검토됐다고 한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도성과 성저십리(한양도성 주변으로 약 4km이내)에는 묘를 만드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조정이 정해 준 곳이 바로 양화진 언덕이었다. 이곳에 처음 매장된 인물은 누구였을까? 바로 제중원 2대 원장을 지낸 J. W. 헤론이다. 조선 말기는 기독교가 불법이어서 선교사들은 의료, 교육, 자선, 고아원 사업 등을 통한 간접 선교를 했다. 헤론은 1890년 7월 26일 이질로 사망할 때까지 만 5년 1개월 동안 낮에는 의료 활동을, 밤에는 성경 번역에 전념하며 선교활동을 펼친 인물이다.
외국인 묘역은 외국인 대표단(경성 구미인 묘지회)이 관리했다. 묘역의 소유와 명칭은 여러 굴곡을 겪었다. 일제의 조선 강제 병합 이후 1913년에는 묘지회가 조선총독부에 소유자로 등록되었으나, 1941년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외국인들이 철수하면서 적산으로 압류됐다. 1945년 조선이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자, 이듬해에 묘역은 다시 경성 구미인 묘지회 소유로 변경됐다. 40년 뒤인 1985년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묘지 소유권을 경성 구미인 묘지회로부터 최종 인수받았다. 기념사업회는 이듬해인 1986년 10월 묘역의 명칭을 '서울 외국인 묘지공원'으로 정했다가, 2006년 5월 최종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으로 바꿨다.
양화진 묘역 입구에서 제일 먼저 묘역 안내판을 확인할 수 있다. 탐방단은 안내판에 빼곡히 적힌 이름들 중 몇몇의 이름과 묘지 위치를 확인했다.
가장 먼저 만나 본 사람은 어니스트 베델이다. 베델은 가장 강력한 방식으로 일제에 저항한 언론인이자 항일운동가다. 베델이 영국 런던의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파원으로 조선을 처음 찾은 것은 1904년 3월 10일이다. 당시 가장 잘 팔리는 뉴스는 단연 '전쟁뉴스'였고, 조선은 러일전쟁의 주요 격전지였다.
베델은 애초 러일전쟁 취재를 위해 조선에 왔지만, 차츰 일본의 조선침략이 본격화 되자 일본의 야욕과 만행을 고발하는데 집중했다. 조선에 온 지 36일 만인 4월 16일 '경운궁 의문의 화재'에 대해 일본군의 고의 방화 의혹을 제기하는 특종을 터뜨렸다. 베델의 기사는 5면 톱기사로 실렸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기사로 인해 '데일리 크로니클'에서 해고됐다. 서슬퍼런 영일동맹의 시절이었으니 해고 이유는 충분했을 것이다. 실제 베델은 이후 '데일리 크로니클'의 일본에 대한 우호적 스탠스에 따른 지침이 있었다고 밝혔다.
베델은 부임 3개월이 지난 7월 18일 이번엔 아예 언론사를 창간하는 것으로 역사의 무대에 재등장한다. 한성부 중부 수진방(지금의 종로구 수송동)에서 양기탁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 이 신문의 주요 필진으로는 훗날 제 2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통령을 역임하게 되는 박은식, 단재 신채호 선생, 최익 등이 있었다.
시일야방성대곡, 경천사 10층석탑을 되찾아 오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서울에 통감부가 설치됐다. 사실상 일본 통치가 시작된 셈이다. 일본 헌병대가 모든 신문을 사전 검열했지만, 베델의 신문은 치외법권의 특혜로 사전 검열을 피할 수 있었다. 베델의 신문이 항일운동의 본산 역할을 톡톡히 해낼 수 있었던 배경이다.
을사늑약 체결 후 당대의 문장가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되자, 일제는 이 글을 실은 '황성신문'을 아예 정간시켜 버렸다. 이 때 베델이 나섰다. 장자연의 글을 호외로 내는 한편, 영문으로 번역해 '코리아 데일리 뉴스(KDN)'에 게재했다. 일본의 한국 침략 사실을 담은 기사는 조선을 벗어나 일본으로, 일본에 있는 서양인에게로, 종국에는 서양과 전세계로 퍼져 나갔다.
"일본의 특사 다나카 자작의 흉계로(중략) 무기를 가진 일본인들이 경천사탑을 급습해서 탑을 해체하여 실어갔다고 한다.(후략)"
1907년 3월7일치 대한매일신보에 특별한 단독 기사의 첫머리다. 1907년 1월 대한제국을 방문했던 일본의 궁내대신 다나카 미쓰야키가 경천사 10층석탑을 해체해 일본으로 반출해 갔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대한매일신보는 이날 1보 기사를 시작으로, 장장 3개월에 걸쳐 일제의 약탈행위를 지속적으로 보도했다. 집요한 보도로 일본인들 사이에서조차 비판이 일었다. 결국 국제적인 이슈로 부상하자 조선총독부까지 나서 반환하라고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경천사 10층석탑은 1918년 11월 15일 포장도 풀지 않은 채 반출할 당시의 모습 그대로 11년 9개월 만에 반환됐다.
그저 사랑할 수밖에
1907년 9월 무렵 베델이 발행하는 ‘대한매일신보'와 그 자매지 '대한매일신보 한글판' 'The Korea Daily News’ 등 세 신문의 발행부수가 1만 부를 넘었다. 당시 다른 신문들의 전체 발행부수보다 많았다. 조선 말기 문인 황현은 '매천야록'에 ‘대한매일신보가 일본인의 악행을 게재하여 들으면 듣는 대로 폭로하였으므로 사람들 모두 그 신문을 구독하여 한때 품귀 상태에까지 이르렀다’고 적었다. 이처럼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조선 민중들의 사랑과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이렇듯 조선 민중과 항일독립운동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대한매일신보’와 베델은 일제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일제는 베델과 대한매일신보 죽이기에 골몰했다. 어니스트 베델은 몇 차례의 재판과 옥고를 치렀고, 1909년 5월 1일 아직은 사랑하는 조선 민중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더 많이 남아있는데 돌연 하늘의 별이 되었다.
베델은 떠났고 조선도 울었다
심장 확장이 사인이었다지만 지속적인 일제의 탄압으로 인한 옥고와 누명에 대한 스트레스가 건강을 해쳤을 것이다. 많은 조선인들이 베델의 죽음에 애도했고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따라나선 조선인들의 장례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오늘날 우리가 어니스트 베델을 통해 깨달아야 하는 가치는 과연 무엇일까? 인류는 당장의 우월을 과시하며 누군가를 약탈하고 억압해선 안된다. 강자가 마땅히 약자를 보호하고 더 가진 자가 덜 가진 자에게 나눌 수 있는 인류애 가득한 세상을 만들어 보자. 어니스트 베델이 꿈꿨고, 지금 우리 앞에 촉구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이곳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는 어니스트 베델만큼이나 훌륭한 이들이 많이 묻혀있다. 호머 헐버트, 앨버트 테일러, 소다 가이치의 묘역을 둘러 본 탐방단은 시계를 1979년의 12월에 맞춰 이동했다.
집에 뭔가가 들어가면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최규하 대통령은 평생 검소하기로 유명했다. 한 번 집에 들인 물건은 어지간해서는 버리는 일 없이 고쳐서 다시 쓰길 반복했다고 한다. 서교동 467-5번지에 위치한 최규하 대통령 가옥은 일반에 개방되어 있다. 탐방단은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봤다. 구석구석이라 해봐야 10여 분이면 충분한 관람이 가능하다.
가옥은 2층집으로 볕이 잘 들었다. 당시로는 작지는 않아 보이는 크기였으나, 집에 비해 침구류와 생활 가전제품 등에는 검소함이 묻어났다. 집도 사람을 닮아간다고 해야 할까? 가옥은 지족지계(止足之戒 : 그치고 만족하지 못함을 경계하라. 자신의 분수를 알아 만족할 때 만족하여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는 뜻)의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래서일까? 이승만, 박정희 삼십 년 독재의 사슬을 끊어 낼 수 있었던 역사의 변곡점에서 최규하는 머뭇거리다 하차했다. 그로 인해 민주주의를 열망했던 많은 국민들은 험준한 길을 돌아가야만 했다.
영화 ‘서울의봄’ 개봉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서 분노로 심박수가 얼마나 올라가는지를 알아보는 '심박수 챌린지'가 유행했다고 한다. 12.12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고 박대통령 각하 시해사건에 관련된 것으로 판단되는 육군참모총장 대장 정승화, 3군사령관 중장 이건영 및 특전사령관 정병주를 연행, 수사코저 하오니 재가 바랍니다'라는 내용의 수사착수 건의서를 내놓고 최규하 대통령 대행을 압박했다. 최 대행은 결국 재가를 하고야 말았고, 이 장면은 관람객들의 분노와 안타까움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그가 재가하지 않았으면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
전두환 신군부 쿠데타의 완성 시점을 79년 12월 12일로 보는 이들도 있고, 80년 5월 17일로 보는 이들도 있다. 후자의 해석은 전두환 쿠데타를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린 쿠데타로 정의한다. 실제로 신군부가 전권을 가지고 올 수 있었던 시점을 5월 17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최규하 대통령의 침묵은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당시 대학가를 비롯하여 오랜 독재에서 벗어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사회 전반에서 읽을 수 있었다. 또 다시 군부독재의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답사를 함께 해주신 79학번으로 대학생활을 시작하셨다던 참가자 선생님의 설명이 이어졌다. “79년 입학할 당시에만 해도 엄혹한 시절이었습니다. 긴조(긴급조치) 시대에 서슬이 퍼런 중앙정보부가 학내에서 상주하면서 학생들과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던 때였으니까요. 그런데 1년 사이 80년은 달랐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의 요구가 거셌으니까요. 실제 대통령의 막강한 권한을 최규하 대통령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장악하지 못한 것은 일부 군부 정도였는데 왜 전보 조치를 내리지 못했는지 당시로서도 지금으로서도 의문입니다. 80년 초반 상황은 전두환 신군부도 군을 다시금 동원한다는 것이 상당한 부담이었고, 아직은 신군부 측에서는 별다른 세력을 규합하거나 장악하지 못했습니다. 대략 5개월 이내에 당시 수방사령관 등을 빠르게 전보 조치를 하고, 신군부가 반발을 하면 다른 부대를 통해 제압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수방사로 하여금 전선만 서울 외곽으로 유지했다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다르게 쓰였을 겁니다. 최규하 대통령의 침묵이 무척 아쉬운 시절이었습니다.”
세 명이 길을 걸으면 그 중 반드시 선생이 있다고 하더니 근현대사를 정통으로 꿰고 계신 참가자를 만나 탐방단은 최규하 대통령 가옥 정원에서 30분이 넘도록 귀한 강연을 청취했다.
“한국식 관료주의의 폐해입니다. 관료의 최상의 가치란 공복으로써 국민과 국민의 삶을 먼저 바라봐야 한다는 것인데요. 관료들의 ‘복지부동’, ‘보신주의’ 행태는 오늘 날에 이르러서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보입니다. 윤석열 파면 정국에서의 국무위원들에게서도 ‘보신주의 행태’는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최규하 대통령의 첫 번째 침묵에 대한 대가를 5월 광주가 가장 크게 치렀다. 5월 광주를 본보기로 민주화의 꽃은 져버렸고, 대한민국은 또 다시 군부독재와의 어둡고 긴 싸움의 터널에 빠져들었다.
비겁했던 첫 번째 침묵과 12.12와 5.18의 진실을 묻어버린 두 번째 침묵
12.12 사건으로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측이 5.17 계엄 확대와 광주민주화운동 무력진압, 국보위 설치 등, 다단계 쿠데타를 진행시키고 있는 동안 당시 최규하 대통령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대통령직을 물러나는 것이 강압에 의한 것이었는지 하는 것들은 지금껏 풀리지 않고 있는 의문이다.
그러나 최규하 대통령의 침묵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이 민주화 운동에 무너지고 12.12와 5.18에 대한 진실을 밝혀내기 위한 각계의 진상 조사가 수년에 걸쳐 수차례 이뤄졌지만, 그는 여기서도 갖은 이유를 들어 끝내 진실을 묻는 쪽을 선택했다.
물건이 한 번 집으로 들어가면 어지간해서는 다시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던 최규하 대통령의 가옥처럼 최규하 대통령 역시 한 번 다문 진실을 끝끝내 입 속에 가둔 채 2006년 10월 22일 서거했다. 그렇게 선량한 민주시민의 죽음에 관한 진실도 함께 묻혀버렸다. 영원한 최 주사의 침묵을 뒤로 하고 일행은 발걸음을 백만 민주시민의 광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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