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탐방] 길 위의 근현대사 / 광화문 가는 길 ⑤

모진 고문 이기고 상해 망명해 맹활약한 김마리아

일제도 겁냈던 ‘경성피스톨’ 김상옥의 강렬한 저항

봄이 꽃을 포기 않듯 광장도 민주주의 포기 안한다

'국민의힘 해체행동' 집회는 매주 목요일에 열리지만, 얼마 전부터 매일 광화문 집회에 나가고 있다. 간절함 때문이다. 지난 17일 월요일 밤엔 느닷없이 많은 눈이 내렸다. 다음날에도 광화문 집회 대열에 함께한 시민들도 간간이 눈을 맞았다. 겨울이 끝내 자리를 내주지 않겠다는 것인지. 그러나 아무리 강하게 버텨도 봄은 꽃 피우는 걸 끝내 포기하지 않으리라.

22일 5차 역사탐방은 정신여학교 옛터 ~ 김상옥열사 서거 터 ~ 예술인의 집 ~ 흥사단 ~ 동성고교 ~ 대한조국주권수호일념비를 돌아보고, 광화문 집회에 합류하는 순으로 진행됐다.

종로5가역 1번 출구에 모인 탐방 일행은 ‘경성피스톨’로 유명한 김상옥 의사의 이름을 딴 김상옥로를 따라 첫 탐방지인 정신여학교 옛터로 향했다. 독립운동가이자 여성운동가인 김마리아의 모교이고, 그녀가 잠시 교편을 잡았던 학교다. 그 자리에 지금은 서울보증보험 본사 건물이 서 있다.

 

서울보증보험 본사가 자리 잡고 있는 옛 정신여학교 터. 현재 김마리아 온라인 추모관을 운영하고 있다. 2025.3.22. 사진 = 황의원 시민기자
서울보증보험 본사가 자리 잡고 있는 옛 정신여학교 터. 현재 김마리아 온라인 추모관을 운영하고 있다. 2025.3.22. 사진 = 황의원 시민기자

1980년대까지 서울 도심에는 많은 학교들이 있었다. 강남권 개발에 따라 많은 학교들이 강남으로, 일부는 사대문 밖으로 옮겨졌는데 정신여고도 1978년 지금의 송파구 잠실동으로 이전했다.

정신여학교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의료 기관이었던 제중원의 여의사 애니 앨러스(Annie.J.Ellers)가 1887년 정동에 개설했다. 고아가 된 여자아이 하나를 데리고 출발한 정신여학당은 학생들이 많아지면서 1890년 종로구 연지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정식 사립학교 인가를 받아, 당시 수많은 여성 지도자 배출의 한 축을 담당했다.

일제 강점기 정신여학교의 독립운동에 대한 열의는 남달랐다. 1919년 고종의 국상 때 복상, 즉 상복을 입는 것을 비롯해 3.1운동 참가, 1926년 6.10만세운동 참가 등 일제에 항거하다 30여 명의 안타까운 희생자가 나왔다. 1939년에는 국어말살정책과 신사참배 거부로 교장이 해직되고 학교가 문을 닫기도 했다.

1919년 4월 정신여학교 출신들이 주도해 조직된 혈성단애국부인회는 그 해 임시정부가 출범하면서 대한민국애국부인회로 통합 발전했다. 이를 주도한 인물이 바로 정신여학교 출신의 김마리아다.

 

1912년 세워진 정신여학교 세브란스관. 전형적인 르네상스 건물로 세브란스가 서울에 지은 건물 중 가장 오래되고 유일하게 남아 있다. 2025. 3. 22 사진 = 황의원 시민기자
1912년 세워진 정신여학교 세브란스관. 전형적인 르네상스 건물로 세브란스가 서울에 지은 건물 중 가장 오래되고 유일하게 남아 있다. 2025. 3. 22 사진 = 황의원 시민기자

한 손으로 독립운동, 또 한 손으로 끊임없는 학업

김마리아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었다. 12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는 김마리아에게 '대학까지 공부하라'는 유언을 남기셨다. 일찍 부모를 잃은 그녀는 숙부인 김필순의 집에서 성장했는데, 그의 집에는 노백린, 유동열, 김규식, 이동휘, 이갑 등 당대의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이 드나들었다. 이런 연유로 김마리아의 53년 삶은 독립운동과 학업의 두 축으로 이뤄진다.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김마리아는 광주수피아여고에서 교사를 시작했고, 1913년 모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다. 1년 뒤 1914년 학업을 위해 일본행을 택했다. 김마리아는 유학생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도쿄에 건너간 이듬해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 회장이 됐다. 이후 동경유학생독립단에 가담해, 2.8 도쿄 유학생 독립선언에 참여했다. 기모노를 입고 선언문을 숨겨 귀국했다.

김마리아는 3.1운동 중 여학생 조직화에 힘썼다. 서울 시내 각 여학교 대표자들의 연합 기구를 조직하려 분주히 움직였다. 그러던 중 비밀이 탄로나 3월 6일 체포됐다. 체포된 그녀는 가혹하기 그지없는 폭력과 수모를 견뎌야 했다. 일제의 고문은 차마 입에 올리기 어려울 정도로 야만적이었다. 폭행은 물론이고 패륜적인 성고문까지 가했다. 지속적인 폭행으로 생긴 상악골 축농증이라는 고질병이 돼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이 되었다.

 

SGI서울보증본사 건물 뒤 편에 자리한 김마리아 흉상 2025. 3. 22. 사진 = 황의원 시민기자
SGI서울보증본사 건물 뒤 편에 자리한 김마리아 흉상 2025. 3. 22. 사진 = 황의원 시민기자

회의 시간 30분을 채 앉아 있지 못하던 사람

당시 고문은 어떤 것이었을까? 인권은 차치하고 용케 버텨내면 살고 아니면 죽는 식이다. 수감이 길어질수록 김마리아는 말라갔고 얼굴만 퉁퉁 부었다. 당시 머그샷에 남은 조선 독립운동가들의 얼굴을 보면 대부분 좌우대칭이 맞지 않는다. 맞아서 붓고, 가라앉은 부위를 또 맞아서 더 붓고 그런 모양이다.

1920년 5월 김마리아의 생명이 위태롭다는 보도가 있었고 면회객들 또한 김마리아가 오래 버틸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김마리아는 가까스로 5월 22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응급 치료가 필요한 상태였다. 무엇보다 상악골 축농증에 의한 화농을 제거하는 수술이 시급했다. 1921년 6월 20일 고등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온 1년 사이에 콧속, 양미간, 귓속에 가득 찬 고름을 긁어내는 수술을 세 번이나 받아야 했다.

독립운동가에게 생과 사란 바로 이런 것이다. 동네 어귀에 있을 법한 개울을 건너듯 한 발만 더 내딛으면 죽음으로 나간다. 그러나 다시 산다면 또 다시 목숨을 바치러 뛰어드는 불나비가 되는 것을 마다지 않는다. 최종심에서 징역 3년형이 확정되고 9일 후 김마리아는 홀연 종적을 감춘다. 건강이 악화돼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그녀는 일제의 예상을 뒤엎고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망명했다.

김마리아의 일생을 두고 불꽃같은 삶이라고 한다. 상해에서 그녀는 고문 후유증으로 회의 중 30분 이상을 앉아있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 고통이 오죽했을까? 그럼에도 그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가며 의정원 의원을 역임했고, 금릉대학에서 수학했다. 이어 미국으로 건너가 파크대학에서 공부했고, 시카고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뉴욕 비블리컬 세미너리에서는 신학을 배우며 스스로 역량을 키웠다.

 

김마리아 선생이 3.1운동 당시 일본 관헌의 수색을 피해 비밀문서, 태극기, 국사 교재 등을 숨겼던 고목의 안내판. 2025. 3. 22. 사진 = 황의원 시민기자
김마리아 선생이 3.1운동 당시 일본 관헌의 수색을 피해 비밀문서, 태극기, 국사 교재 등을 숨겼던 고목의 안내판. 2025. 3. 22. 사진 = 황의원 시민기자

독립 1년 남기고 눈을 감은 김마리아, 사랑도 가슴에 묻고 떠났다

뉴욕에서 공부할 당시 황애덕, 박인덕 등 미국 동부의 한국 여자 유학생들과 함께 재미 대한애국부인회(근화회)를 조직했고 회장직을 맡았다.

1933년 들어 김마리아는 고국에 조건부로 귀국할 수 있게 됐다. 경성부에는 체류할 수 없고 교사 활동도 신학 이외에는 가르칠 수 없다는 조건이었다. 이것 말고도 여러 제약이 뒤따랐다. 김마리아는 함경남도 원산부의 마르다윌슨 여자신학교에서 신학 교육을 담당했다. 갈수록 일제의 통치가 엄혹해지던 1938년 무렵 한국의 기독교 주요 교파들이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해 기독교인들이 대거 변절했다. 이 때에도 김마리아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독립운동가로서의 견결함을 유지했다.

1943년 상악골 축농증이 재발해, 1944년 3월 평양기독병원에서 안타까운 생을 마감했다. 그토록 꿈꿨던 조국의 독립을 불과 1년여 앞둔 시점이었다. 유일하게 사랑했던 남자 김철수를 가슴에 품고 잠들었을 것이다. 김철수가 김마리아의 사진을 평생 가슴에 품고 다녔던 것처럼. 그녀의 죽음은 80년이 지난 지금도 무척이나 아프게 느껴졌다.

 

마로니에 공원에 설치된 김상옥 의사 동상 2025. 3. 22 사진 = 황의원 시민기자
마로니에 공원에 설치된 김상옥 의사 동상 2025. 3. 22 사진 = 황의원 시민기자

경성의 새벽을 뒤흔든 혁명가 경성피스톨 김상옥

탐방 일행은 낙산공원 방면으로 내려가 효제초등학교 사거리에서 혜화동 방면에 있는 김상옥 의사 서거 터를 찾았다. 김 의사의 일화들은 이미 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소재가 됐다. 가장 가깝게는 2019년 MBC가 방영한 드라마 <이몽>에서 조복래가 연기한 ‘김남옥’의 모티브가 김상옥이다. 2016년 개봉한 <밀정>에서 박휘순이 연기한 ‘김장옥’, 2015년 개봉한 <암살>에서 하정우가 연기한 ‘하와이 피스톨’ 등이 김상옥의 오마주다. 과거 <각시탈>이란 만화와 드라마 <각시탈>도 김상옥이 모티브였다고 한다. 지금도 잊히지 않고 많은 영화, 드라마에서 부활하는 걸 보면, 김상옥은 양손에 든 육혈포로 일제를 벌벌 떨게 한 일당백의 인물인 게 분명하다.

일제 경찰이 김상옥을 찾아 본격적으로 포위망을 좁히기 시작한 것은 1923년도 1월 17일이다. 5일 전 종로경찰서에 느닷없는 폭탄 공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제는 이 폭탄의 위력이 그 전과는 달랐다는 데 크게 놀랐다. 일제는 종로경찰서 주변의 용의자들을 일일이 조사했지만 별 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동대문경찰서로 첩보가 접수됐다. 믿을 만한 정보라고 판단한 경찰은 날쌔고 강한 스물 한 명으로 돌격조, 매복조로 하여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시간에 김상옥 체포를 시도한다. 먼저 집 외곽을 포위한 일제 경찰들은 김상옥이 숨어 든 것으로 파악된 방의 문고리를 힘주어 잡아챘다. 그 순간이었다. 김상옥 의사가 발사한 총탄에 맞아 순사부장 타무라 쵸시치 종로경찰서 형사부장이 즉사하고, 이마세 킨타로 경부와 우메다 신타로 경부보가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김상옥 의사는 남산으로 숨었다.

김상옥 의사가 실제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것인지는 사실로 확인되지 않았다. 당시 김상옥이 암살 목표를 삼았던 대상이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었는데, 거사를 앞두고 굳이 경성의 심장부인 종로경찰서 테러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효제동 김상옥 의사 서거 터, 3시간 여의 치열한 교전 끝에 끝내 하늘의 별이 되다. 2025. 3. 22 사진 = 황의원 시민기자
효제동 김상옥 의사 서거 터, 3시간 여의 치열한 교전 끝에 끝내 하늘의 별이 되다. 2025. 3. 22 사진 = 황의원 시민기자

일경 1명을 사살하고 2명에겐 중상을 입힌 삼판통 304번지에서의 항거는 경성을 떠들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로부터 5일 뒤 김상옥 의사 최후의 날에 홀로 수백 명의 일제 경찰들과 3시간 넘게 대치한 장면은 김상옥의 진면목을 드러내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일제가 김상옥 의사 관련 기사를 절대 보도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당시 총독부는 검열과 지침을 통해 실명을 거론하지 못하게 하거나 아예 게재 금지 기간을 정하기도 했다. 김상옥 의사의 이야기가 퍼져 나가는 것을 일제가 얼마나 경계했는지 알 수 있다.

“본년 일월 십이일 오후 여덟 시 사십 분 경에 시내 종로경찰서에다가 돌연히 폭탄을 던져서 평온한 듯한 경성은 다시금 흉흉하게 되고 신경과민한 경관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던 사건이 발생한 후 경찰 당국에서 범인을 수색하던 중 그 후 일월 십칠일 오전 다섯 시에 시내 삼판통(三坂通)에서 다시 총소리가 나자 종로경찰서 전촌(田村) 경사는 현장에서 총살을 당하고 계속하여 금뢰(今瀨) 종로서 사법계주임과 매전(梅田) 동대문서 고등계 주임이 중상을 당하게 한 후에 범인은 남산을 넘어 교묘하게 자취를 감추었으나 필경에 경관의 귀에 또 들리게 되어 이십이일 새벽에 시내 효제동(孝悌洞)에서 다시 발견되어 세 시간 이상이나 경관과 같이 교전하다가 총알은 다하고 기운은 진하여 마침내 참사한 김상옥(金相玉)의 사건은 자세히 아는 바이나 보도의 자유가 없는 조선의 신문이라 검사의 손이 끝난 오늘에야 겨우 발표되게 되었기로 보도하노라” (1923년 3월 16일치 '조선일보' 기사)

 

함석헌, 그 사람을 가졌는가? 흥사단 앞 인도에 설치되어 있다. 2025. 3. 22 사진 = 황의원 시민기자
함석헌, 그 사람을 가졌는가? 흥사단 앞 인도에 설치되어 있다. 2025. 3. 22 사진 = 황의원 시민기자

경성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나이, 경성피스톨의 최후 결전을 뒤로 하고 발걸음을 다시 혜화동 로터리 방면으로 돌렸다. 흥사단 앞에는 여러 시비들이 설치돼 있다. 그 중 하나인 함석헌 선생의 시를 함께 감상했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일념비 뒤로 벽 한 켠에 일념비에 관한 안내문이 붙어 있다. 세월의 흔적이 엿보인다. 2025. 03. 22 사진 = 황의원 시민기자
일념비 뒤로 벽 한 켠에 일념비에 관한 안내문이 붙어 있다. 세월의 흔적이 엿보인다. 2025. 03. 22 사진 = 황의원 시민기자

이번 탐방의 마지막 탐방지는 4.19 당시 서울에서는 가장 이른 시간 거리로 몰려나온 동성고교이다. 동성고교 정문 좌측으로는 4.19기념비와 대한조국주권수호일념비가 나란히 서 있다. 벽 한 켠에 설치되어 있는 일념비에 대한 안내문은 이렇다.

“이 자리에 세워진 일념비는 비에 새겨진 내용과 같이 일제가 2차대전 말기(1943-1945) 우리 대한의 정예 4,300여 명의 전문 대학생들에게 소위 학도특별지원병이라는 터무니없는 허울을 씌워서 일군(日軍)에 강제로 입대시켜 무참하게 각 전선에 내몰려고 함에 한 목숨 내걸고, 이를 거부하고 자신과 민족을 위하여 항쟁, 탈주, 체포, 징역, 사형, 부상, 실종, 전사 등 온갖 희생을 몸으로 겪으면서 싸웠던 피의 투쟁 흔적들을 2,700명(생사 불문)의 이름과 함께 새겨서 이 겨레 후손들에게 다시는 이러한 치욕의 과거사가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준엄한 경고의 상징으로 바로 여기 입대 전 한 때 합숙훈련장이었던 추억의 자리 동성고교 구내 양지바른 언덕에 민족의 역사와 함께 영원히 자리하게 하는 것이다.” 

 

대한조국주권수호일념비, 아픈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일념비의 뒷면과 측면에는 빼곡하게 1944년 1월  20일에 강제소집된 2,700여 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2025. 03. 22 사진 = 황의원 시민기자
대한조국주권수호일념비, 아픈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일념비의 뒷면과 측면에는 빼곡하게 1944년 1월 20일에 강제소집된 2,700여 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2025. 03. 22 사진 = 황의원 시민기자

대한조국주권수호일념비(大韓祖國主權守護一念碑)에는 또 하나의 이름이 있다. 학병이 입소한 날인 1944년 1월 20일을 기린 ‘1·20비(碑)’가 그것이다. 이 비는 혜화동 동성중고 정문 좌측에 있다. 당시 ‘학도특별지원병’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태평양 전쟁에 동원된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일왕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 강요했던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역사를 잊지 않고자 세웠다고 한다.

일제는 애초 식민지 조선인에게 총을 주지 않았다. 일본 육군사관학교에도 조선인의 입학을 엄격히 제한했다. 1909년 대한제국의 육군무관학교가 폐교된 이후, 일본에 유학한 소수의 국비 장학생을 제외하고는 조선인의 입학이 허용되지 않았다. 1933년 만주 침략 이후에서야 제한적으로 입학을 허가하기 시작했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8년, 일본은 소학교 이상 졸업자를 대상으로 일반 사병을 모집했으나, 실제로는 강제적인 모집이었다.

일제는 전쟁이 확대되자 1943년 10월 20일 학도특별지원병 제도를 공표하여 조선인 대학생과 전문학교 학생 등을 강제 동원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총독부와 유력 친일인사들의 갖은 회유와 종용이 있었으나 학생들은 지원 거부, 적성검사 기피, 도피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저항했다. 평양에서는 1944년 8월 “일본군에게 끌려가 죽기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싸워서 죽음을 이기자”면서 집단적으로 학병 거부 투쟁을 감행하기도 했다.

 

대한조국주권수호일념비에 새겨 진 이름들이 새삼 아픔으로 다가온다. 2025. 03. 22 사진 = 황의원 시민기자
대한조국주권수호일념비에 새겨 진 이름들이 새삼 아픔으로 다가온다. 2025. 03. 22 사진 = 황의원 시민기자

그러나 결국 1945년 1월 20일 4385명의 학생들이 일제의 침략전쟁에 내몰렸다. 대부분은 강압적인 상황 속에서 이루어졌다. 함경북도 청진 검사국의 보고서에 따르면 지원자 256명 중 자원한 사람은 겨우 10명이었다. 학병에 응하지 않으면 징용된다는 협박이 있었다. 학병으로 강제 징집된 이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일본군을 탈출하거나 머나먼 길을 걸어 한국광복군에 입대하여 대일항전을 펼치다 해방을 맞았다. 대표적으로는 장준하, 김준엽, 김수환 추기경 등이 있다.

올해는 우리의 선조들이 강제로 전쟁에 동원된 지 만 8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탐방을 위해 고작 1키로 남짓한 거리를 걸었을 뿐인데 일제 강점의 고통스러운 역사가 왜 이토록 켜켜이 쌓여 있는 것인지 고통스러울 따름이다.

동성고교 앞 혜화동 로터리는 민족지도자 몽양 여운형 선생이 암살당한 서거 터이기도 하다. 몽양 여운형 선생 이야기는 추후로 미룬다.

봄이 꽃을 포기하지 않듯, 광장은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는다

K드라마, K푸드, K-POP이 돌아가며 유행을 일으키더니 요즘에는 K-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새롭게 등장했다. 그렇다. 이제는 한국식 민주주의를 더욱 발전시켜 그것을 토대로 전 세계를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 정신을 실현할 때인 것이다. 광화문에 모여든 민주주의의 증거와 희망을 만나러 가자! “주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K-민주주의는 여기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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