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주 52시간 적용 제외 입법로비 치열
반도체 경쟁력 하락 노동시간 축소와 무관
단기 실적 위주 기술개발·경영전략이 원인
노동시간은 근로조건 아닌 구조혁신 문제
지난 2000년 무렵 중국을 취재하던 중 현지에서 사업을 하던 한국인 기업가를 만났다. 그는 직원들이 금요일 저녁만 되면 모두 퇴근해 버려 사업 운영이 어렵다고 토로했다. 당시에는 막연히 '사회주의 국가여서 노동권이 강하겠거니' 생각했다.
10여 년 후, 독일에서 1주일 넘게 진행된 연수를 받던 중 노동과 생산성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경험을 했다. 관광버스로 이동하던 중, 5일째 저녁이 되자 버스를 바꿔타야 하니 모두 짐을 갖고 내리라는 안내를 받았다. 번거롭지만 법적으로 주간 최대 운행 시간이 정해져 있어 버스를 교체해야 했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 출발 시간이 되었지만 또 다시 대기해야 했다. 전날 근무한 버스 기사의 운행 시간이 초과되어, 법정 기준을 맞추기 위해 일정 조정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문제없이 시행되는 일이 독일에선 모두 법 위반이었다.
당시에는 불편했지만, 지나고 보니 이게 바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동 시간 단축은 단순한 복지 정책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기업과 경제 전체의 생산성을 높이는 제도적 장치다. 단기적인 효율성보다는 지속 가능성을 중시하는 시스템이며, 개별 기업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이 원칙을 공유할 때 비로소 정착될 수 있다.
벌써 한참 전부터 삼성전자 반도체 임원들이 주 52시간제 적용 제외 입법을 위해 적극적인 로비를 하고 있다. 급기야는 노동시간 단축을 기본 정책으로 채택해온 민주당마저 예외를 인정할지 모르겠다는 소식이 들린다. 국민의힘과 여러 우파 언론들은 이미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있다. 마치 삼성전자 연구원들이 주 52시간 이상 자발적으로(?) 일을 하지 못해, 한국 반도체산업의 경쟁력이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야단법석이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었다'는 믿음이 착각일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든다. 노동 시간을 늘리는 방식으로 생산성을 끌어올리려는 시도는 산업화 시대의 '집약적 노동' 모델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노동 시간을 줄이고도 경쟁력을 유지하는 방식—즉, '고부가가치화' '혁신적 업무 설계' '생산성 중심 조직 운영'과 같은 근본적인 변화 없이 단순히 노동 투입량을 늘리겠다는 발상은 선진국형 기업 운영과는 거리가 멀다. 첨단 AI시대에 과연 주 52시간 제한 때문에 삼성 반도체가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했는가?
워라벨 확보를 단순히 노동자 복지 차원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사실 국힘에 속한 청맹과니 같은 정치인들과 기레기로 불리는 다수 우파 언론의 행태는 그러려니 치자. 그네들이야, 삼성이 망하면 대한민국이 큰일 날 것처럼 생각하니, 그럴 법도 하다. 문제는 삼성의 임원들이다.
세계적인 제조업 강자인 일본의 도요타는 TPS(Toyota Production System)와 TQC(Total Quality Control)를 통해 노동 시간을 최적화하면서도 생산성과 품질을 극대화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에 반해, 삼성은 여전히 노동 투입량을 늘리는 방식으로 경쟁력을 유지하려 한다. 그저 노무관리, 생산관리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삼성의 기술 개발과 경영 전략이 단기 실적 위주로 경직되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세계 유수의 기업들이 구축한 선진적인 경영 시스템은 다른 기업이 벤치마킹하기도 하고 교과서에 실리기까지 한다. 도요타가 포드를 능가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처럼 삼성이 새로운 생산성 패러다임을 과연 창출할 수 있을까? 아니면 지금처럼 단기적 비용 절감과 노동 시간 연장이라는 구시대적 방식에 계속 머물러 있을까? 돌아보면 삼성식 경영, 삼성식 평가, 삼성식 품질관리 등이 경영학 교과서에 실린 예를 찾기 어렵다. 삼성이 전자의 길을 채택한다면 한국이 경제선진국으로서 더욱 도약하는 견인차가 되겠지만, 후자의 길을 간다면 도약의 주역은 다른 기업이 될 것이다.
노동 시간과 생산성의 문제는 단순한 근로 조건의 문제가 아니다. 경제 전반의 구조적 혁신을 의미하는 근본적인 요소다. 삼성전자 임직원의 52시간 입법 로비 사례는 한국 기업들이 여전히 노동력 투입 중심의 성장 모델에 의존하고 있으며, 기술 혁신과 생산성 향상을 통한 '진짜 선진국형 경제'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 경제의 지속적인 성장은 단지 국내총생산(GDP) 증대만으로 이룰 수 없다. ‘어떤 방식으로 성장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노동자의 삶과 기업의 지속 가능성을 동시에 고려하는 시스템 전환이 필수적이다. 아니면 ‘선진국 한국’이라는 수식어는 허울뿐인 구호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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