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직 주 52시간 예외” 근로기준법 무시

당정·재계 “TSMC는 장시간 근무” 견강부회

대만 전자노조 “연구직 장시간 노동 줄어”

민주당도 허위 정보·억지 주장에 부화뇌동

반도체 특별법 핵심은 재정과 인프라 지원

노동 시간 늘리는 건 경쟁력 확보 본질 아냐

“인공지능(AI) 시대에 노동시간을 늘리는 게 반도체 경쟁력 확보의 본질이냐?”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정부와 여당이 밀어붙이고 더불어민주당도 검토 중인  ‘반도체 특별법’를 겨냥한 말이다. 이 법은 미국과 대만, 일본 등 경쟁국들이 반도체 산업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만큼 우리도 대응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발의됐다. 국내 반도체 공장을 가동하는 데 필요한 전기와 용수 등 기반 시설을 마련하는 것을 비롯해 재정 투입과 세액 공제 등 정부 지원 방안이 핵심 내용이다.

 

삼성전자 반도체 생산시설. [삼성전자 제공]
삼성전자 반도체 생산시설. [삼성전자 제공]

본질서 벗어난 반도체 특별법 논의

그런데 정부와 국민의힘은 이 법안에 연구개발 인력에 대해서는 노사 합의로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주 52시간 근무 상한제를 지키지 않아도 되는 예외 규정을 두자고 주장한다. 여당 의원들이 발의한 법안에 이 조항이 포함됐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기업이 요구한 민원을 전폭 수용한 것이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은 아무리 반도체 산업이 중요해도 근로기준법의 근간을 흔드는 독소 조항을 특별법에 넣을 수 없다며 반대해왔다. 노동계도 결국 노동자의 장시간 근무를 허용하는 빌미가 될 수 있는 악법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김동연 경기지사도 “지금 대한민국 반도체 주권을 지키기 위한 핵심은 첫째 재정을 포함한 과감한 지원, 둘째 전력과 용수 문제 해결, 셋째 반도체 인프라 확충”이라며 “반도체 산업 현장에서 현행 근로기준법의 예외 제도를 활용하기 어려운 실제적인 사유가 있다면 현행 제도를 수정·보완하면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다른 데 시간 허비하지 말고 인프라 확충과 용전·용수 문제 해결 방안부터 빨리 논의하라“고 촉구했는데 정확한 지적이다.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지난해 11월 13일 경기 수원시 경기도청 브리핑룸에서 정치 현안 관련 입장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4.11.13. MBC 중계 화면 갈무리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지난해 11월 13일 경기 수원시 경기도청 브리핑룸에서 정치 현안 관련 입장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4.11.13. MBC 중계 화면 갈무리

근로기준법 흔드는 악법에 민주당도 부화뇌동

우려스러운 점은 주 52시간 상한제 예외 규정을 명시한 반도체 특별법을 묵인하는 쪽으로 민주당 기조가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 3일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좌장을 맡은 토론회에서 그런 분위기가 감지됐다. 이 대표는 “특정 산업의 연구개발 분야 고소득 전문가들이 동의하면 예외로 몰아서 일하게 해주자는 게 왜 안 되느냐 하니 할 말이 없더라”라고 했다. 그는 지난달 23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반도체 특별법과 관련해 “필요한 조치를 과감하고 전향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언주 민주당 최고위원도 5일 “반도체 연구 전문직의 업무 성격을 감안할 때 당사자 간 합의가 전제된다면 몰아서 일하고 몰아서 쉬는 걸 지나치게 제약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대표와 보조를 맞춘 발언이다.

정부와 국민의힘, 재계는 이구동성으로 미국과 대만 등 우리와 경쟁하는 국가에서는 반도체 연구개발자들이 필요하면 주 70~80시간 근무할 수 있고, 이것이 한국이 반도체 경쟁에서 밀리는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대만의 TSMC 등 삼성전자와 경쟁하는 기업 사례를 꼽기도 했다. 하지만 연구직의 장시간 근무와 반도체 산업 경쟁력과의 관련성은 실증되지 않았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3일 국회에서 '행복하고 정의로운 대한민국, 반도체특별법 노동시간법 적용제외 어떻게?'라는 주제로 열린 '정책 디베이트'를 주재하고 있다. 2025.2.3.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3일 국회에서 '행복하고 정의로운 대한민국, 반도체특별법 노동시간법 적용제외 어떻게?'라는 주제로 열린 '정책 디베이트'를 주재하고 있다. 2025.2.3. 연합뉴스

벤치마킹 대상 대만은 전문직 장시간 노동 줄어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대만은 일부 전문직에 대해 근로 시간 한도를 적용하지 않는 노동 기준법상 ‘책임제’를 도입했으나 적용 사례는 갈수록 줄고 있다. 굳이 장시간 일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다. 대만 전자노조는 “과거 휴대폰 제조사인 HTC의 엔지니어가 과로로 숨진 이후 연구직의 책임제가 줄고 있다”고 밝혔다. 

반도체 특별법 적용 대상인 삼성전자 노조는 “회사의 경영 위기가 노동제도가 아닌 경영진 책임인데도 근무 시간 탓을 하고 있다”며 “반도체 특별법은 근로기준법의 근간을 흔드는 문제를 소수 인력으로 축소해 정당화하려는 꼼수”라고 비판했다. 노조는 “특정 업종에만 예외를 두는 법안은 해당 업종의 노동자를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것”이라며 “주 52시간제는 노동자의 건강권과 삶의 질을 지키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라고 주장했다.

 

지난 29일 오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서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전삼노) 파업 선언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2024.5.29. 연합뉴스
지난 29일 오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서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전삼노) 파업 선언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2024.5.29. 연합뉴스

현행 제도로도 연구직 장시간 근무 가능

노동단체들도 ‘주 52시간 예외 조항’을 담은 반도체 특별법 논의를 즉각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한국노총은 “시대 흐름에 역행하고 노동시간 제도의 근간을 뒤흔드는 여야 간 논의에 강력한 유감을 표한다”며 “기업의 일시적·간헐적 사정, 특정 산업의 어려운 여건 등을 십분 감안하더라도 현행 근로기준법상 당장 활용 가능한 유연근무제도는 이미 차고 넘친다”고 주장했다. 한국노총은 “결국 사용자단체에서는 기업 경영상 실패 내지 어려움을 노동시간 핑계를 대며 노동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고, 유연근무제 도입 시 요구되는 근로자대표, 노조와의 협의절차가 거추장스러운 나머지 이런 사전 절차 자체를 없애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질타했다.

민주노총도 “삼성으로 대표되는 한국반도체산업의 위기는 노동시간이 적어서가 아니라 급변하는 반도체 산업에서 경영전략의 실패 때문”이라며 “전문성과 국제적 안목을 가지지 못한 재벌 총수의 주먹구구식 경영으로 오늘 위기에 몰리게 된 것”이라는 비판했다. 이어 “현재도 선택 근로제, 재량근로제 등 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다양한 연장근로가 가능한데 새로운 법을 만들어서 장시간 근로를 추진하겠다는 것은 역사의 퇴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반도체 산업 지원 방안. 연합뉴스
반도체 산업 지원 방안. 연합뉴스

경영 실패 책임을 연구직에 돌리려는 불순한 의도

노동계의 지적대로 반도체 특별법에 주 52시간 예외 규정을 두자는 건 경영진의 경영 실패를 연구개발자에게 돌리려는 불순한 의도가 담겼다. 민주당은 정부와 여당, 재계의 억지 주장에 부화뇌동해 독소 조항을 담은 반도체 특별법을 수용해서는 안 된다. 연구직 근무시간의 상한제를 없애는 건 결국 윤석열 대통령이 추진하다가 여론의 역풍을 맞고 중단했던 '주 69시간 근무제'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윤석열 파면 후 치러질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중도층을 겨냥한 전략이라고 생각하면 더 큰 착각이다. 근로기준법의 근간을 흔드는 악법 제정에 동참한 정당에 중도층이 표를 줄 리 만무하다. 오히려 지지층인 노동계가 떨어져 나갈 뿐이다. 집토끼와 산토끼 다 놓치는 어리석은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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