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 항쟁 후 제주에 운영한 원나라 황실 말 목장

몽골의 말 사육 전문가 '목호'들이 일으킨 무장반란

토벌 과정에서 대량 양민학살 빚은 '고려판 4·3 사건'

역사의 공백으로 남았다가 최근 소설·만화로 재조명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제주시 애월읍 봉성리 새별오름. 이름도 예쁘고 높이도 적당한 데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빼어나 평소에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지만, 억새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10월에는 탐방객으로 장사진을 이룬다. 예쁜 이름과 빼어난 풍광답지 않게 650년 전 이곳은 전투와 살육의 현장이었다. 황금빛 억새 대신 부대 깃발이 펄럭이며 창칼이 번득였고, 들꽃 향기가 아니라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1374년 ‘목호(牧胡)의 난(갑인의 변)’이 일어났을 때 반란군과 토벌군은 이 일대에서 치열하게 싸웠다. 고려시대 외교문서 모음집 ‘이문’과 정사 ‘고려사’에는 새별오름이 각각 ‘효성오음(曉星吾音)’과 ‘효성악(曉星岳)’으로 기록돼 있다.

 

억새꽃이 한창인 새별오름. 목호의 난 때 반란군과 토벌군이 이곳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희용
억새꽃이 한창인 새별오름. 목호의 난 때 반란군과 토벌군이 이곳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희용

"말은 제주로 보내라" 속담의 연원 된 제주 말 목장

‘목호’는 말을 기르는 몽골(원나라) 관리를 일컫는다. 원나라는 날씨가 온화하고 맹수가 없는 제주 중산간지대가 방목지로 적당하다고 판단했다. 1273년 탐라총관부를 설치해 직할지로 편입시킨 뒤 말 사육 전문가들을 보내 황실 전용 말을 키웠다. ‘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로 보내라’는 말은 이때부터 생겨났다. 1295년 제주가 고려에 반환된 뒤에도 원나라 직할 목장의 기능은 유지됐다. 하치(합적·哈赤)라고도 불리는 목호의 수효는 1400~1700명에 이르렀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해 반원 정책을 펴자, 목호들은 고려 관리를 살해하며 거세게 반발했다. 1368년 원나라를 북방 초원으로 밀어내고 중원을 차지한 명나라도 제주 영유권을 주장하며 제주마 2000필을 요구했다. 목호들은 “세조(쿠빌라이)께서 기르신 말을 적국에 바칠 수 없다”며 거절하다가 마지못해 350필만 보냈다.

명나라 사신의 항의를 받은 공민왕은 최영 장군에게 토벌을 명했다. 전함 314척을 타고 온 관군은 모두 2만 5000여 명으로 삼별초 진압군의 갑절을 넘었다. 1374년 8월 28일 명월포(한림읍 동명리)에 선발대가 상륙했다가 목호 기병의 기습에 몰살당했다. 관군은 제주 주민 전체가 목호들과 힘을 합쳐 항전할지 모른다고 생각해 상륙을 주저했다. 이를 본 최영 장군은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하급 장교의 목을 베며 진군을 명했다. 그제야 관군은 전투에 나섰다.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의 성이시돌목장.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소속 맥그린치 신부가 1954년 만들었다. [제주관광공사]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의 성이시돌목장.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소속 맥그린치 신부가 1954년 만들었다. [제주관광공사]

목호들은 전력을 다해 맞섰으나 대규모 병력의 관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밝은오름, 검은데기오름 등지에서 크게 패했고 새별오름으로 유인해 결판을 내려다가 이를 간파한 최영 장군이 급히 추격하자 뿔뿔이 흩어졌다. 주력 부대는 서귀포 앞바다 범섬으로 달아났으나 관군이 바다에 배다리를 놓아 그곳까지 쫓아오자, 무기를 내려놓고 투항하거나 벼랑에서 몸을 던졌다. 관군은 항복한 반란 주모자들을 참수하고 자결한 자들까지 목을 베 수급을 개경으로 보냈다.

"간과 뇌가 땅을 덮었으니 말하면 목이 멘다"

전설에 따르면 최영 장군이 범섬 앞에 우뚝 솟은 20m 높이의 외돌개를 거대한 장수의 모습으로 꾸며 놓자, 목호들이 겁을 먹고 전의를 상실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돌기둥을 장군바위라고도 부른다.

관군은 남은 무리를 양민으로 거두었다. 그러나 포로 가운데 일부가 달아나 말 목장을 거점으로 농성하자 이마저도 격파했고 도망친 목호들을 샅샅이 뒤져 소탕했다. 이때 시체가 들판을 뒤덮을 정도였다고 한다.

관군은 목호들만 죽인 게 아니었다. 몽골 피가 섞였거나 몽골식 변발을 한 자, 자의든 타의든 목호를 도운 자 등이 희생됐다. 하담은 일지에 “칼과 방패가 바다를 뒤덮고, 간과 뇌가 땅을 덮었으니 말하면 목이 멘다”고 적었다.

제주 주민의 처지에서는 몽골이나 고려나 둘 다 외세였다. 원나라는 제주의 옛 이름 탐라를 회복시켜 주었고, 목호들도 오랫동안 뒤섞여 살면서 이주민이란 인식이 옅어졌다. 주민 상당수는 고려 관군을 적으로 여겼을 가능성이 높다. 무고한 양민이 많이 희생됐다는 점에서 목호의 난을 ‘고려판 4.3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외돌개 뒤로 범섬이 보인다. 최영 장군이 외돌개를 거대한 장수 모습으로 꾸며놓자 범섬으로 달아난 목호들이 겁을 먹고 전의를 상실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한국관광공사]
외돌개 뒤로 범섬이 보인다. 최영 장군이 외돌개를 거대한 장수 모습으로 꾸며놓자 범섬으로 달아난 목호들이 겁을 먹고 전의를 상실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한국관광공사]

당시 목호들이 이주민 출신이라고 해도 제주에 뿌리내린 지 100년이나 된 만큼 세대가 내려가면서 제주인들과 동화돼 갔다. 원나라 위세를 믿고 횡포를 부리기도 했지만, 주민들에게 말 기르는 선진 기술을 전수해 주기도 하고 제주 여인과 결혼해 자식을 두는 다문화가족도 생겨났다. 목호가 제주 주민들과 손잡고 고려 관리들의 탐학에 저항한 사례도 있었다.

삼별초 항쟁 때 뿌려진 ‘난의 씨앗'

목호의 난의 씨앗은 삼별초 항쟁에서 뿌려졌다. 30년 가까운 끈질긴 항쟁 끝에 1270년 고려 원종이 몽골에 항복하고 개경으로 환도하자 최씨 무신정권의 친위대인 삼별초는 결사 항전을 선언했다. 지도자 배중손은 왕족 왕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진도로 근거지를 옮겼다. 몽골 진압군의 공격을 받아 배중손과 왕온은 숨지고 살아남은 병사들은 김통정 장군의 지휘 아래 제주도로 피신했다. 그러나 김방경과 흔도가 이끄는 여몽연합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1273년 전멸했다. (일부 생존자가 오키나와로 도망쳤다는 주장도 있다)

애월읍 고성리의 항파두리는 삼별초가 토성을 쌓고 전투를 벌이던 곳이다. 김통정이 성에서 뛰어내리자, 바위에 발자국이 파여 샘이 솟아났다는 전설의 ‘장수물’도 있다. 서귀포시 성산읍 성산리 성산일출봉 오르는 길 왼편의 등경돌은 김통정이 오르내리며 체력을 단련했던 곳이라고 한다. 애월읍 하귀리 바굼지오름은 여몽연합군이 삼별초군을 격파했다고 해서 파군봉(破軍峰)이라고도 불린다.

삼별초 항쟁은 고려의 자주정신과 독립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들이 제주를 최후의 항전지로 택하는 바람에 제주 주민들은 애꿎게 참화를 겪었고 원나라 식민지로 전락하는 운명을 견뎌야 했다.

 

제주시 애월읍 고내리 해안가에 세워진 항몽멸호비(抗蒙滅胡碑)와 최영(왼쪽) 김통정 장군상 [제주시]
제주시 애월읍 고내리 해안가에 세워진 항몽멸호비(抗蒙滅胡碑)와 최영(왼쪽) 김통정 장군상 [제주시]

차별과 혐오 대상으로 전락한 '몽근놈'

목호의 난 이후 몽골계가 차별과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하면서 이들은 본관을 제주로 바꾸거나 원나라가 아닌 중국 왕조, 혹은 한반도 본토에서 온 집안임을 자처하며 몽골계임을 감췄다. ‘몽근놈(몽골놈)’이라는 제주말은 ‘후레자식’과 비슷한 뜻의 욕설로 쓰인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조선 초 제주 대정현 판관을 지낸 하담은 “우리 동족도 아닌 것들이 섞여 들어 변을 불러왔다”라며 목호의 난을 우리나라 역사상 유일한 이주민 반란으로 규정했다.

제주의 몽골인 후손들은 조선 중기까지 한국식 성을 쓰면서도 대원(大元)이라는 본관을 유지했다고 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 ‘대원’을 본관이라고 쓰는 성씨가 15개나 됐다. 1530년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조(趙), 이(李), 석(石), 초(肖), 강(姜), 정(鄭), 장(張), 송(宋), 주(周), 진(秦)의 10성은 원나라에서 귀화한 성씨”라고 기록해 놓았다.

목호의 난 이후 제주도는 '창살 없는 감옥'

제주는 탐라국이란 이름의 어엿한 독립국이었다. 고유한 문화와 독자적인 통치체제를 갖췄으나 국력이 미약해 백제, 통일신라, 고려에 잇따라 조공했다. 고려는 1105년 숙종 때 탐라군으로 지방행정구역에 편입시켰다가 1214년 제주군으로 고쳐 불렀다.

목호의 난 이후 제주도는 유배의 땅, 수탈의 땅, 창살 없는 감옥이 됐다. 육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제주 유배는 사형 다음가는 중벌이었다. 주민들은 관리들의 탐학과 전복·감귤 등 특산물 진상에 시달려야 했다. 허락 없이 섬을 떠날 수 없었고, 탈출을 우려해 큰 배를 만들지도 못하게 했다. 민란이 끊이지 않았으나 그때마다 진압됐다.

이재수의 난으로 일컬어지는 1901년의 신축민란은 프랑스 선교사들의 치외법권적인 특수 권력과 이에 편승한 천주교도들의 횡포에 궐기해 일어난 반외세 저항운동이었다. 1948년 4·3 사건은 남로당 무장봉기로 시작되긴 했지만, 그에 앞서 주민 6명의 목숨을 앗아간 경찰의 발포가 도화선이 됐고, 미군정의 섣부른 상황 인식과 서북청년단의 감정적 개입이 사태를 악화시켰다.

 

항파두리 항몽 유적 전시실에 있는 삼별초 기록화 가운데 6번째 '고려인이 몽골인을 몰아내는 모습' [제주특별자치도]
항파두리 항몽 유적 전시실에 있는 삼별초 기록화 가운데 6번째 '고려인이 몽골인을 몰아내는 모습' [제주특별자치도]

"애월은 몽골에 항거하고 오랑캐를 없앤 땅"

제주시 애월읍 고내리 포구에서 해안가를 따라 애월항 쪽으로 가다 보면 깎아지른 절벽 위에 다락쉼터가 나온다. 높다란 현무암 비석에는 ‘涯月邑境(애월읍경)은 抗蒙滅胡(항몽멸호)의 땅’이라고 새겨져 있다. 애월이 몽골에 항거하고 오랑캐를 없앤 역사의 현장이란 뜻이다.

양쪽 옆에 갑옷 차림으로 두 손 모아 칼을 잡고 있는 석상은 삼별초를 이끌고 여몽연합군에 맞서 싸우다 숨진 김통정 장군과 목호의 난을 진압한 최영 장군이다. 한쪽은 고려 조정에 반기를 든 주모자이고 다른 한쪽은 반란군 토벌대장이지만 외세인 몽골과 싸웠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라 본 것이다.

그러나 육지인이 아닌 섬 주민, 혹은 고려인이 아니라 탐라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삼별초 항쟁이나 목호의 난을 달리 해석할 여지가 있다. 삼별초 항쟁은 중고교 국사 교과서에도 등장할 뿐 아니라 1977년 박정희 대통령이 앞장서서 항파두리 항몽 유적을 정비하고 전시관과 항몽순의비(抗蒙殉義碑)를 세웠다.

반면 목호의 난은 우리 역사의 빈칸이나 다름이 없었다. 일부 기록이 있긴 해도 어디까지나 토벌군 관점이었고, 열녀비도 유교 통치철학의 산물일 뿐이었다. 항파두리의 삼별초 기록화 전시실에는 “목호들은 원이 멸망한 뒤에도 그대로 남아 갖은 행패를 부렸으며 심지어 고려의 사절이나 목사를 살해하는 등 폭동을 잇달아 일으켰다. 최영 장군은 범섬까지 쫓겨 들어간 수괴들을 섬멸해 1세기에 걸친 몽골의 침략을 종식시켰다”는 설명을 달아놓았다.

 

이성준의 소설 '탐라, 노을 속에 지다'와 정용연 만화 목호의 난 1374'의 표지
이성준의 소설 '탐라, 노을 속에 지다'와 정용연 만화 목호의 난 1374'의 표지

외지인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 잠긴 본토 주민의 아픈 역사

최근 들어 목호의 난이 제주 주민의 시각으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제주 출신 소설가 이성준의 ‘탐라, 노을 속에 지다’(2015년 출간)는 탐라인과 목호들이 명나라의 무리한 요구를 거절하다가 고려 관군과 맞서 싸운다는 관점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다. 정용연 만화 ‘목호의 난 1374’(2019년 출간) 주인공은 열녀비 주인공인 정씨(버들아기)와 목호 백호장 석나래보개다. 이들 부부의 시선으로 목호의 난을 풀어냈다.

목호의 난은 650년 세월의 더께가 덮인 그야말로 ‘고릿적 일’이지만 지금까지 역사적 기록과 평가는 부족했고 문학적 해석도 거의 없었다. 뒤늦게나마 잇따라 등장한 작품 덕분에 관심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다.

제주는 누가 보아도 아름답고 신비롭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 봐서는 안 될 듯하다. 제주에 얽힌 파란만장한 역사를 떠올리고 제주인들이 흘린 피와 땀을 생각하면 풍경이 달리 보인다. 그래도 여전히 제주는 아름답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