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도 씨름꾼, 소년 김신락
1924년 11월 함경도 홍원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김석태 선생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부업으로 지관(地官) 일도 했다. 소년은 3형제 가운데 막내였다. 셋 다 힘이 장사였다. 씨름대회에 나가면 3형제가 황소는 물론, 나머지 상을 쓸어왔다. 이름은 김신락(金信洛), 본관은 김해.
씨름대회 때마다 참석하여 이 집 형제들을 눈여겨본 일본사람이 있었다. 오가타 토라이치(小方寅一). 당시 그쪽 지역을 담당하던 형사였다. 또 다른 사람은 모모타 미노스케(百田已之助). 나가사키 지방의 부호였다. 두 사람은 스모광(狂)으로, 모모타가 오가타의 어머니와 재혼하여 새아버지가 되었다. 두 사람이 그렇게 특수관계였기 때문에 멀리 일본의 나가사키에서 함경도 산골짜기까지 와서 씨름대회를 참관한 것이다.
두 사람은 신락에게 반했다. 모모타는 타마노우미 우메키치(玉海梅吉. 1912-1988) 스모도장(道場)의 후원자였다. 타마노우미가 신락의 부모와 당사자를 설득하기로 했다. 16살 조선 함경도 촌놈 하나를 데려가려고 일본 스모계의 거물이 여러 날 달라붙어 미래의 성공을 팔았다. 그러나, 부모도 반대하고, 본인도 "일본사람 되기 싫다"며 거부했다. 부모는 아들이 혹시 마음이 바뀔까 염려하여 결혼을 시켰다. 딸도 하나 낳았다.
운명은 피해갈 수 없는 법인가.
신락은 결국 1940년 초반에 일본으로 건너왔다. 열여섯 살이었다. 모든 스모선수들에게는 본인 이름에다가 닉네임이 붙는다. 그는 리키도잔(力道山 信洛)이 되었다.
역도산!
‘전설’이 된 그 이름을 풀어보자.
“체력과 정신력을 목숨 걸고 연마하여, 그 누구와 겨루어도 내공이 밀리지 않는, 난공불락의 역량(力)을 갖추고, 경륜이 쌓이고 또 쌓인 뒤 승부를 넘어 높은 품격(道)을 추구하면, 만 가지 가치들이 가족처럼 함께 서식하는 군락지, 즉 큰 산(山)!”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그 이름의 뜻을 밝혀 선물하고 싶다.
'力道山'!
이 특별한 이름은 지어져 불리는 순간, 비범한, 실은 초인적인 성공을 잉태했다. 그 성공은 굵고 짧았다. 그리고 깊고 짙은 슬픔을 남기고 통탄스런 비극으로 끝이 났다. 대부분의 경우, 주인공이 죽으면, 애도(哀悼)도 함께 그친다. 그리고 이내 망각한다. 그런데, 드물게는 그 죽음이 어떤 시작을 의미하기도 한다. 영웅적 삶을 살았던 이들의 죽음이 그렇다. 역도산의 죽음이 그 경우에 해당된다.
가정(假定)이지만, 그가 일본에 가지 않고, 아버지와 함께 농사지으며, 지관 일도 하면서, 가끔 큰 도시나 가까이 만주에서 열리는 씨름대회에 나가서 황소 한 마리씩 타오는 삶을 지속했다면, 화려하지는 않았겠으나, 나름대로 풍족하고, 흥미진진한 얘깃거리가 가득한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후손들은 천하장사였던 할아버지를 자랑하며 나이를 먹었을 것이다.
6.25 때 20대 중반의 청년이었으니 전쟁에 나가서 전사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죽지 않고 큰 공을 세워서 서열 높은 정치인으로 활동할 수도 있다. 홍수 때 앞장서서 동네일을 보다가 물에 휩쓸려 떠내려갔을 수도 있고, 전염병에 걸려 병사했을 수도 있다.
그의 삶을 쓰는 필자로서, 다양한 가정을 해보고 싶었다.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이같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포기하고, 심지어 부모와 형제, 그리고 고향과 나라와의 인연을 끊을 수도 있는 엄중한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16살, 그 어린 소년에게는 실로 무거운 발걸음이었다.
스모의 배신, 전화위복
스모 인생이 그저 연습하고 밥먹고 쉬고 씻고 정겹게 얘기하고 고민도 털어놓고 그러다가 깊이 잠드는 생활이라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가장 큰 고통은 동료들이 그를 '조센징'으로 부르며 늘 모욕하는 것이었다. 수시로 '다구리'(몰매)를 당했다. 야만적인 공동생활이 일상이었다.
십중팔구 중간에 도망치거나 탈퇴할 수밖에 없는 지옥 같은 고난 그 자체였다. 그러나 참아냈다. 그때마다, “내가 이 어린 나이에 여기에 왜 왔는가”를 자문했다. 스모를 시작하면서 마음속에 새긴 모토가 “반드시 이긴다!”, 아니었던가. 그래서 역도산은 그 참기 힘들고 아프고 슬픈 고통을 막강한 적수로 여겼다.
언제나 가장 열심히 연습했다. 훗날 최고의 자리에 오른 동료의 증언에 의하면, "누구나 당연히 연습하면서 비오듯 땀을 흘린다. 오직 역도산만 땀이 소금이 될 때까지 훈련한다." 16살에 첫 승을 거둔 이래 급성장하였다. 어느 분야에서든 거기서 최고가 되려면, 땀이 소금이 될 때까지 자신을 연단(鍊鍛)해야 한다. 철칙이다.
1949년, 24살에 그는 '세키와케'에 올랐다. 최고등급은 '요꼬즈나'(橫綱)이며, 그다음이 '오오제키'(大關), 그 바로 밑이 세키와케(關脇)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쯤에서도 크게 만족할 것이다. 톱 클라스 아닌가. 역도산은 요꼬즈나가 될 수 있었지만,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센징’이기 때문이었다.
절망했다.
결심했다.
"스모를 그만두자!"
1950년 9월이었다. 빛나는 청춘기 10년간 죽을 고생하며 그 자리까지 왔는데, 결과적으로 허송세월한 것이다. 너무나 화가 났다. 참을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한계를 지어 놓고 나를 끌어들이다니…” 역도산은 혼자서 많은 술을 마시고, 미친 사람처럼 집안 구석구석을 다 부숴버렸다. 그리고 나서 부엌칼로 '촘마게'(상투)를 잘랐다. 이는 은퇴자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이다. 참으로 조숙하게도, 역도산은 그 어린 나이에, '인생이 한번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걸까.
프로레슬링의 세계로 들어가다
역도산이 스모를 그만둔다는 게 알려진 뒤, 당시 스모업계는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요란했다. 하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리고 건설회사의 경호원으로 취직하여 가족의 쌀독을 간신히 채워주고 있었다. 밤이면, 빠에 가서 술을 마시고, 마음에 들지 않는 놈들을 두들겨 팼다. 역도산에게 폭행당한 자들이 많았지만, 경찰은 감옥에는 보내지 않았다. 오히려 관대하였다. 이름값 덕분이었다.
1. 해럴드 사카다와의 운명적 만남
그 분노와 가슴앓이가 극에 달한 어느 날. 단골술집에서 처음 본 사내와 또 다시 시비가 생겼다. 몸싸움으로 번졌다. 술이 좀 되긴 했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놈이라는 걸 직감했다. 상대도 역도산을 강적이라고 생각했다. 그 인연으로 둘은 친구가 되었다. 해럴드 사카다(1920-1982)였다. 그는 일본계 미국인으로 런던 올림픽(1948년)에 헤비급 역도선수로 출전, 은메달을 딴 경력이 있다. 그 후 프로레슬러로 전향, 주로 하와이와 일본에서 활동했다. 그 이후에는 영화계에 진출하여 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다. 출연작품은 ‘007 Gold Finger’(1962년作), 숀 코널리가 주연, 사카다가 조연이었다.
사카다는 역도산의 투지와 근성에 감동하였고, 역도산도 그런 사카다가 마음에 들었다. 바로 이 사람이 갈 길을 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역도산에게 새로운 인생을 열어준 은인이었다. 고향땅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이었다. 역도산은 헤럴드 사카다의 도움으로 하와이로 건너갔다. 역도산은 이때 여권을 만들기 위하여 마침내 일본인 신분이 되었다. 귀화한 것이다. 그 이전까지 그는 실은 10년이 넘도록 마음의 국적을 품고 살았다.
2. 하와이로 건너가다
역도산은 하와이에서 미국 프로레슬링과 레슬링으로 벌이는 사업을 배웠다. 그 과정에서 좋은 인맥을 쌓았다. 프로모터 자격도 따게 되었다. 본토에도 다니며 경기를 하고, 레슬러로서 기술과 역량을 향상시켰다. 그리고, 하나의 대중문화로서 확고하게 정착한 레슬링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이를 일본에서 펼치기 위하여 다양한 자문을 받았다. 사업구상도 열심히 했다.
역도산은 1년여 동안 미국에 머물면서 200여 회의 레슬링 경기를 했다. 승률은 99%. 가라데춉(당수)이 승부수였다. 그는 하와이에 내리자마자 돌덩이와 굵은 나무토막을 하루에 1만 번 정도 치는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한 대 맞으면, 누구나 돌맞은 개구리처럼 뻗었던 것이다.
무슨 훈련이든 코치가 지시하는 것의 두 배를 감당했다고 한다. 특별한 사람들은 탁월한 재능 1%를 타고난다. 나머지는 역도산처럼 바보같이, 성실하게, 끝없이 훈련하는 것으로 완성된다. 보통 사람들은 대부분 그 성실성과 지구력에서 실패한다.
3. 루 테즈
역도산은 스모의 나라에 프로레슬러로,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인 레슬링 관련 독점사업가로 돌아온다. 스모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1952년이었다. 조국은 여전히 전쟁 중이었다. 당시 일본에서 미국 프로모터 자격을 가진 사람은 역도산뿐이었다. 미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루 테즈(1916-2002. NWA 챔피언)를 일본에 데리고 올 수 있었다.
그를 데리고 올 수 있다는 것은 특급, A급 선수들을 모두 불러올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헝가리계 미국인으로, 약관 20살에 세계 챔피언이 된 천재다. 그는 평생 ‘레슬링의 신’ ‘철인’으로 불리며 살았다. 신나는 일이라고는 없는 시대에, 대중에게 영웅이었다. 그렇게, 세계 최고의 백인선수들을 데리고 와서 경기할 수 있다는 사실은 역도산의 시대가 웅혼하게 펼쳐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4. 역도산과 프로레슬링, 그리고 일본
모두가 다 알다시피, 1945년 8월 15일은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을 선언한 날이다. 그들은 아직도 패전일을 종전일이라고 부른다.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은 광복절이라고 부른다. 내년이 80주년이다. 그때 일본은 미국 트루만 대통령이 8월 6일에 히로시마에, 9일에 나가사키에 투하한 원자폭탄으로 초토화되면서 15일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일본사람들은 그날 항복선언문을 읽던 천황의 목소리를 ‘교쿠온’(옥음.玉音)이라고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그처럼 비굴하고 측은하고 절망적인 음성을 들은 적이 없었다. 일본족에게는 강도 10짜리 지진해일의 아픔과 충격, 그리고 고통이었다. 그날부로, 일본이라는 나라와 일본사람들은 천 길 땅속으로 꺼지는 패배주의의 무리로 추락했다. 다시 일어설 힘도 없었다.
그렇게 처절하게 망가진 그들에게 연평균 7500회 발생하는 지진해일 등 크고 작은 자연재해가 일정기간 멈추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이 절망의 시간에, 그들에게 ‘조센징’으로 불리며 멸시와 모욕, 폭행을 밥먹듯 당하고 살았던 역도산이 구세주로 등장한 것이다. 구세주!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1853년에 요꼬하마항에 나타난 미국의 철선함대들이 하늘로 내품던 검은 연기는 일본족에게 지진해일과 또다른 충격이고 위협이었다. 미국 해군의 페리 제독이 대통령의 메시지를 들고 개항을 요구하러 왔던 그 사건으로 인하여, 일본인들은 집단적으로 ‘흑선공포’라고 불리는 신종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일본은 그때부터 미국을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고 벌벌 떨었다. 언제나 비굴했다.
그러한 일본(해군)이 노루새끼가 사자의 뺨을 치듯 진주만을 공격한 것이다. 1941년 12월 7일 아침이었다. 대통령 루스벨트는 ‘치욕의 날’로 선포했다. 이는 미국이 2차대전에 참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그 무모한 침공으로 사상 초유의 핵공격을 받고 항복했다. 그 상처는 짙고 깊었다. 치명적이었다.
그 무렵, 조선의 함경도 출신 소년 16살 김신락군이 ‘역도산’이란 닉네임으로 불리며 다크호스로 자라고 있었다. 정확히 10년 후 역도산은 그 회복할 수 없는 패배주의에 빠져서 거대한 ‘우울증 병동’이 되어버린 일본 열도를 구하게 된다. 그 믿기지 않는 신화는 현실이 되었다.
5. 가라데춉
일본씨름 스모에 하리테라는 기술이 있다고 한다. 여기에 가라데의 수도(手刀)를 결합시킨 것이 역도산의 필살기 가라데춉이다. ‘chop’은 도끼로 나무를 찍어내려 뽀개는 것을 말한다. ‘가라데춉’은 수도라고 할 수 있으니, 일종의 ‘손도끼’였던 셈이다.
그 공격을 당하고서 쓰러지지 않는 레슬러는 세상에 없었다. 관중들은 어느 날부턴가 역도산을 ‘가라데춉’으로 동일시하기 시작했고, 경기 때마다 ‘가라데춉’을 연호하며 그를 응원하고, 환호했다. 승리의 기쁨을 함께 누렸다.
일본인들에게 역도산의 압도적이고 드라마틱하고 화려한 승리와 주특기 ‘가라데춉’은 단순한 스포츠 현상이 아니었다. 일종의 정치현상이며, 실은 큰 정치였다. 이는 일본국과 일본족의 멸절(滅絶)을 목표로 이루어졌던 원자탄 투하, 그 가해 당사국 미국을 상대로 벌이는 복수전이었다. 그래서 매번 후련하고 통쾌하게 이기는 역도산은 무적의 무술가 이상의 존재였다. 원수를 응징하고 처단하는 터미네이터였기 때문이다.
6. 미국 레슬러 샤프 형제를 초토화시키다
1954년 2월 19일은 역도산에게는 물론, 일본사람들 모두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미국의 프로레슬러로 국내에서 인기가 높은 사프 형제와 일본의 유도왕 기무라 마사히코(木村政彦)와 역도산이 한편이 되어 태그매치를 벌이게 된 것이다. 게임 전부터 일본 열도가 들떠 있었다.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완패할 것으로 예상했을 것이다.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기무라는 맥을 못추고 무릎을 꿇었다. 흠씬 두들겨 맞고 정신을 잃었다. “우리는 역시 안 되는구나!” 하면서, 관중들 모두가 탄식하고 있을 때, 역도산이 뛰어들어 두 형제를 순식간에 박살냈다. 일본사람들에게 이 거구의 미국인 형제 레슬러는 바로 원폭을 투하한 미국 정부이고, 트루만 대통령이며, 국방부 장관이었다. 역도산이 그들을 혼자서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초주검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꿈인가, 생시인가! 모두가 믿을 수 없었다.
일본과 일본인들이 그 순간 천 길 땅속에서 기어 올라왔다.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참을 수 없어 모두가 펄쩍펄쩍 뛰며 이성을 잃고 흥분하였다. 거대한 ‘폐결핵병동’ 환자들의 그 파리한 낯빛이 취객들처럼 벌개졌다. 어린 것들은 화색이 돌았다. 누구는 감격하여 울고 그 옆에서는 기뻐서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울음과 웃음이 같은 뜻을 갖는 특이한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역도산은 코끼리 같은 미국(놈들)을 쌀 한 자루 던지듯 사방으로 던져서 혼을 빼놓고, 공중으로 번쩍 들었다가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들이 좀비처럼 다시 살아나서 엉기면 가라데춉(당수/唐手)으로 미국(선수들)을 실신시켰다. 그날 이후 오랫동안, 일본사람들은 어디에서나, 끝도 없이, 그 불가사의한 장면을 얘기하고 또 얘기했다. 온 열도의 일본족은 부화장의 병아리들처럼 활기를 띠었다. 역도산은 그 시간 이후, 일본열도와 거기 거하는 일본족 전원에게 과장 없이 메시아였다.
7. 기무라 마사히코
역도산은 神이 되어갔다. 아니, 이미 신이었다. 어느 날, 오래전, 샤프 형제와 한판 세게 붙었을 때, 역도산과 편먹었던 유도왕 기무라가 역도산에게 도전장을 냈다. 그때 미국 형제팀에게 묵사발이 되어 반죽음당했던 바로 그놈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누구든 역도산에게 도전하여 그를 이기면 자신이 역도산의 자리에 앉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1%의 가능성으로 덤볐다.
프로레슬링은 관중들에게 재미도 주면서, 용쟁호투(龍爭虎闘)를 야성적으로 펼치는 게임이다. 기무라는 시작하자마자 역도산의 급소(낭심)을 발로 찼다. 이는 금지되어있는 더러운 반칙이다. 자칫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역도산은 비열한 반칙으로 자신의 힘을 빼려는 나쁜 도전자를, 성난 호랑이가 토끼를 손보듯 처단했다. 그는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기무라는 역도산을 더 높은 존재로 만들었다. 그 이후에도 병원에 실려간 일본 선수들은 부지기수였다.
8. TV제조업의 흥성은 역도산의 공로였다
미국 레슬링 선수들은 일본에 와서 예외 없이 샤프형제들처럼 ‘벌을 받고’ 돌아갔다. 당시 일본은 TV가 없는 집이 대부분이었다. 프로레슬링 경기가 있는 날이면, 그 놀랍고 충격적이고 후련하고 신이 나는 장면을 볼 수 있도록 TV회사나 관공서가 가두(街頭)에 대형TV를 걸어놓았다. 남녀노소 수만 명이 거기서 단체로 시청했다.
그 관중들은 예외 없이, 집에서 편하게 앉아서 보고 싶었다. 드디어 가가호호 그 비싼 물건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 안에 TV 제조업체에는 일손이 달릴 정도로 주문이 급증했다. 역도산이 일본 TV산업을 발전시킨 결정적 공로자가 된 것이다. 미츠비시 사가 그 폭발하는 시장을 독점했다.
TV제조 분야에서 일본 기업들은 그 연장선에서 수십 년 동안 세계최고를 구가했다. 오늘날에는 그 자리를 모두 한국 업체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는 역도산에게 실신당한 일본의 레슬러들 꼴에 비유할 만하다.
역도산의 정치적 관심
그는 북쪽 함경도 출신으로 16살에 고향을 떠나 일본사람으로 살면서도 마음속은 늘 가족과 고향, 조국이 가득 차 있었다. 나도 그랬을 것이다. 고향 떠나 객지에서 살면서 겪는 이런저런 고충과 고통을 ‘객고’(客苦)라고 한다.
어머니와 고향과 조국은 크게 보면 하나다. 어머니를 핵으로 하는 사랑의 동심원, 그 ‘큰 하나’가 없이 산다는 것은 속이 텅 빈 채 허하게 비정상으로 세상과 만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세상은 각박하고 삭막한 것이다. 실은 그 결핍이 바로 객고다. 그래서 제정신인 사람들은 효성(孝誠)과 향수(鄕愁)와 우국충정(憂國衷情)의 가슴으로 살다가 여건이 되고 기회가 오면, 손 크게 사랑을 실천한다. 역도산이 그 좋은 모델이다.
그때, 일본은 세상에서 가장 나쁜 나라였다. 일본관리들은 예외 없이 제국주의적이었다. 일본의 서민들 가운데서도 그처럼 약자를 멸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자들이 허다했다. 그들은 극단적인 악조건 생태계로서, 우리에게 거대하고 집요하고 육중한 폭압이었다. 그 환경에서 어린 소년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가장 치열한 싸움을 거쳐 이겨야 하는 분야에 인생을 던진 것이다. 그야말로 사즉생(死卽生)의 도전이었던 것이다.
역도산은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그 폭압적인 플랫폼 위에서도 승승장구하며 거인으로 성장했다. 마침내 일본에서 천황 못지않게 존경을 받았고,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레슬링경기협회를 창설하여 선수로서, 그리고 사업가로서 활동했다.
그 영향력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었다. 그 무렵, 역도산은 일본에서 손에 꼽히는 거부(巨富)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가질 것 다 가졌고, 누릴 수 있는 것은 다 누리는 완벽한 성공자의 진면목이었다. 그때 대장부는 정치를 하든가, 은자가 된다. 역도산은 전자를 택했다.
비슷한 시기에, 구테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부가 역도산을 초청했다. 이젠 스모선수도, 레슬러도 아니었다. 거물급 인사로 일본의 조야(朝野)에 영향력이 막강한 사실상의 정치인이었다. 역도산은 실은 5.16을 나쁘게 보았다. 김종필 등은 역도산을 만나 그의 힘과 위상을 군사정부의 안착(安着)을 위하여 활용하려는 의도를 피력했다.
이에 대하여, 역도산은 남북이 싸우지 말고 하나가 되어 스위스처럼 영세중립국으로 평화롭게 살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 마음이 얼마나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가. 남북 양쪽과 접촉하면서, 어느 한쪽에 기울지 않게 대했다. 맘속으로 정말 간절히 정계진출하여 조국을 위하여 크게 기여하고 싶었다.
공식적으로 정계진출하겠다고 선언했다면, 누구보다도 쉽게 의원이 되었을 것이고, 잘했을 것이다. 이권개입 등 나쁜 짓을 할 이유가 없고, 뭘 해야 할지, 무엇을 위하여 정치를 하려했는지, 가 너무나 명확했기 때문이다. 오호애재라! 구상을 끝내고 곧 선언할 예정이었으나, 운명의 여신은 역도산을 다른 별로 데리고 갔다.
김일성 對 박정희, 그리고 역도산
김일성은 일찍이 “력도산이 조선사람인데, 일본 선수라는 욕된 운명을 진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 식민지 통치가 빚어낸 후과”라고 밀했다. 김 주석의 역도산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묘향산에 가면 ‘국제친선전람관’이 있다고 한다. 거기에는 역도산이 김일성의 50회 생일날 선물한 벤츠 고급승용차가 전시되어 있다. 김주석의 지시로, 북조선 정부는 오랫동안 역도산을 소설, 드라마, 영화로 ‘민족의 영웅 역도산’의 일대기를 꾸준하게 제작해왔다.
역도산은 북한 정부에게 동경 올림픽(1964년) 참가비용을 대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김일성은 나라의 체면 때문에 사양했다고 한다. 김 주석은 역도산의 그 뜨거운 애국심에 높이 감동했다. 그리고 곧바로 그 올림픽에 남북단일팀 논의가 있었는데, 그 역시 역도산의 생각이었다고 한다. 역도산은 프로레슬링 선수 이상으로, 깊고 높은 사상을 간직한 채 때를 기다리고 살았던 인물이었다.
김종필 등 5.16 구테타 세력도 역도산을 비밀리에 초청하였다. 서울시장은 그에게 명예시민상을 주었다. 김재춘 중앙정보부장도 만났다. 역도산은 평화주의자다. 숨은 외교사절로 남한 정부에게 유익한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다.
역도산은 임진각에 방문하여, 점잖은 신사복 상의와 웃통을 벗어던지고 북쪽 경비병들이 서있는 곳까지 달려가더니, 북쪽을 향하여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한다.
“어머니! 어머니!”
“16살에 일본으로 건너와서 마흔살이 다 될 때까지 고향방문은커녕, 전화 한 통, 편지 한 차례 한 적이 없는 이 불효막심한 아들이 어머니를 보고 싶습니다. 어머니!”
저 외마디 속에는 이 가슴을 치는 변명과 통곡하는 마음이 가득했을 것이다. 맘만 먹었다면, 고향방문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텐데, 왜 추진하지 않았을까.
역도산의 정체성을 위한 변명
16살에 스모를 시작했을 때, 함께 운동하며 먹고 자며 공동체생활을 했던 동료들은 그가 조선사람임을 다 알고 있었다. 역도산은 유명해지고, 일본말도 유창하게 하면서 본인이 ‘리키도잔’이라는 일본이름을 가진, 나가사키현 출신의 일본사람처럼 살았다. 이는 전적으로 일본사람들의 차별 때문이었다. 기자들, 정치인들도 대부분 알고 있었다.
스모를 때려치우고, 프로레슬러가 되어 거구의 미국(놈들)을 가라데춉으로 쓰러뜨리고 실신시키고 때로는 병원으로 실려가도록 만들 정도로 혼찌검을 내주는 역도산의 경기와 승리를 일본사람 모두가 자신이 미국과 싸우는 것 같은, 역도산과 동일시하기 시작하면서, “일본의 주류사회에 역도산이 조선사람이면 절대로 안 된다”는 암묵적 동의가 확고했다.
“저렇게 시원하게 미국을 무찌르는 우리의 대표가 우리가 개나 돼지처럼 무시하는 열등족속 조센징이라니...”, 일본족에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역도산도 일부러 숨긴 것이 아니라, 일본사람들을 절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커밍아웃하기를 뒤로 미룬 것이다. 인종차별에 저항하여 정상을 바로 앞두고 스모를 그만둔 일 등 역도산의 기질로 보아, 그가 장삿속으로 그럴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김영필 선생과의 인연
역도산의 40년 짧은 인생에서 김영필 선생(金永弼. 1912-1988)과의 인연은 참으로 소중하다. 선생은 전남 강진 출신이다. 온갖 고생을 다 하고 제조업 경영자로 자리를 잡았다. 목포 출신 아내를 맞이했다. 그 후 조총련에 가입하여, 고위간부로 활동했다. 오사카에 두 대밖에 없는 미제 고급차 링컨컨티넨탈을 타고 사업과 민족운동을 하며 공사다망하게 사는 성공한 동포사업가였다. 선생은 지인의 소개로 역도산을 만났다.
“나도 16살 때 가난한 고향집을 지키기 위해 혼자서 일본에 왔네. 친척이나 아는 사람 하나 없고, 일하러 나간 직장에서 일본말 못한다고 망치로 머리를 맞은 적도 있지. 어떻게 해서든 살려고 버텼네. 나는 자신을 숨기지 않았네.
(중략)
일본은 한국전쟁에서 흘린 우리의 피로 패전 후의 부흥을 이루었고, 일본국민들에게 그대가 준 용기 덕에 백인 콤플렉스로부터 정신적으로 회복할 수 있었다고 보네. 그렇지만, 나나 자네처럼 우리 재일동포들은 일본 안에서 차별과 멸시 속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자네가 조선인이라고 밝힌다면 재일동포들에게 얼마나 큰 용기를 줄 수 있을까!”
이 말을 듣고 역도산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이런 얘기를 들려준 분은 사장님이 처음입니다”, 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오직 강해야 했고, 돈도 벌고 언젠가는 나라에 멋들어지게 펄럭이는 깃발을 장식할 수 있도록 그 일념 하나만으로 달려온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했다.
이렇게 다정하고 진지한 대화와 피붙이 간에 주고받는 것과 같은 공감과 격려의 시간이 서로에게 큰 위로를 주었다. 그 값은 주판을 튀겨 환산할 수 없었다. 그로써 두 사람은 특별한 관계로 묶였다. 그날 저녁, 선생의 댁으로 몰려가서 부인이 정성껏 차린 고급요리에 술을 곁들여 모처럼 동포들끼리 더 훈훈하고 끈끈한 자리를 이어갔다. 역도산은 그 자리에서 ‘아리랑’을 불렀다. 아이들은 우리 노래들을 이어 부르고, 어른들은 조선에서 하던 대로 젓가락으로 상을 두드리며 흥을 돋우었다.
그날 선생은 북쪽에 있는 역도산의 가족소식을 파악해주고, 최대한 빨리 역도산이 일본에 오기 전에 생겼던 딸 영숙(1943년생)과 형제들과의 만남을 주선해주기로 약속했다. 이 어려운 일들이 단 하루 만에 얘기되고, 약속되고 금방 이루어졌다. 참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쉽게 이루어졌다.
제자들
김일:1929-2006년
자이언트 바바:1938-1999년
안토니오 이노키:1943-2022년
역도산의 세 제자는 스승으로부터 혹독한 지도를 받았다. 그 지옥훈련을 잘 견뎠던 제자들은 훗날 스승이 세상을 떠난 뒤, 스승의 자리를 계승하여 제자의 도리를 다했다. 서로 사이도 좋았다고 한다. 특히 이노키는 김일이 암투병할 때 몇 번씩 문병하고, 치료비도 보탰다.
이노키는 정계진출 직전에 세상을 떠난 스승을 대신하여 정계에 나가서 그 어떤 정치인들보다 열성적으로 정치인의 사명을 다했다. 스승의 고향 북한에 38회나 방문하여, 일본과 북한의 관계를 좋게 만들고, 북한의 어려움을 해소시키기 위하여 다방면의 노력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세상 떠날 날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마지막 북한방문은 휠체어를 타고 갔을 정도였다. 역도산의 제자들이 레슬링에서만 아니라, 정치사회적으로, 인간적으로 세상에 주고 간 향기는 소중하고 감동적이다. 뭉클하다.
거인의 딸, 김영숙
유명한 만경봉호가 해방 후 귀국동포들을 태우기 위하여 입항했을 때, 그 배에 역도산의 딸 영숙이와 둘째 형 형락이 타고 있었다. 딸은 세 살 때 본 게 마지막이었는데, 그 새 18살 숙녀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 품에 안겨 울지도 않고 두 시간이 아주 어색하게 지났다고 한다. 일본에서 크게 출세한 아버지이지만, 북쪽에서 온 딸에게는 그저 가족과 조국을 버린 사람 아닌가. 그 특별한 자리에서 딸이 받았을 상처를 생각하면, 아쉬움이 지워지질 않는다.
아버지와 헤어지고 나서, 딸이 마침내, “아버지, 아버지!”를 부르며 통곡했다고 한다. 김선생이 그 사연을 역도산에게 전해주었다. 면전에서는 서로 도사리며 화를 내고 따지는 형국이었다 하더라도, 혈연이란 이런 것이다.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딸을 둔 아비로서, 눈물을 멈출 수가 없다.
북쪽의 가족들에게 역도산은 큰돈을 주었을 것이다. 그것으로 딸과 첫번째 부인 박여사, 형제들과 조카들은 모두 가난의 고통에서 해방되고 생활이 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내 마음이 편해진다. 흐뭇하다. 그렇게 넉넉하게 나누고서도 퍽이나 큰돈이 남았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 돈은 힘들게 사는 이웃들에게 쌀과 보리 한 가마니씩이라도 팔아서 나누어주는 선행에 쓰여졌기를 바란다. 꼭 그렇게 했기를...
죽음
역도산은 1963년 12월 15일에 죽었다. 1924년생이니 39살이었다. 요절(夭折)이다. 그 장례식이 일본 현대사에서 가장 많은 문상객이 몰려온 행사였다고 기록으로 남아 있지만, 나는 그의 죽음은 그 애도의 규모나 천황가의 위로 등으로 보상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60년이 지나도록 명명백백한 공식견해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의문사다.
일설은, 도쿄의 한 라틴빠에서 술을 마시던 역도산이 한 야쿠자단체 스미요시(住吉一家)의 어린 요원(무라타 가츠시 村田勝志)을 특별한 이유도 없이 구타했고, 그 친구가 살려달라고 빌고 있는데도 지속적으로 폭행했다는 것이다. 영화 ‘역도산’을 보면, 그 젊은 깡패는 역도산에게 잘못하면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판단이 들어서 칼을 꺼내어 찌르고 도망친 것이다.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부담스러워 사고 후, 큰 병원으로 가지 않고, 잘 아는 작은 병원으로 갔다. 거기서 응급처치한 뒤 금세 호전되어 곧 퇴원할 수 있다는 판단을 들었는데, 1주일 후 복막염으로 사망한 것이다.
당시 당국은 부검결과를 공개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역도산의 죽음이 단순사고사인지, 음모 또는 정치사회적 타살인지, 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나이에 비하여, 아직도 건강하게 살고 있는 세 번째 부인 다나카 게이코(1941년생)는 역도산의 죽음은 의료사고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그 근거도 제시하지 못했다.
역도산은 당시(1963년 전후)의 한반도 상황에 대해서 매우 관심이 컸다고 한다. 남쪽은 군인들이 쿠테타로 집권하여 혼란스럽고, 조금 안정되자마자 한일외교관계 회복을 우선적인 국정과제로 정해놓고 학생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북쪽은 박정희의 정통성 문제를 지적하며 외교전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남쪽 군사정권을 압박하고 있었다.
일본 조야에서 그야말로 막강한 영향력을 인정받고 있는 역도산을 남북 양측이 서로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는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평화주의자의 입장을 굳게 유지했다.
이에 일본 극우는 역도산이 ‘조센징’인데, 너무나 큰 인물이라는 점이 불만이었고, 역도산의 정치노선이 일본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정보와 평가, 주장들은 60여 년 내내 확실한 반박 없이 살아서 숨을 쉰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여전히, 역도산의 죽음은 일본극우의 암살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천황 다음으로 존경받았던 거인의 죽음을 60년 동안 의문사 상태로 방치하는 것은 우리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일본다운 정치행위다.
가족들
역도산이 15살에 일본으로 건너갈 때 함경도 고향에는 부모와 형들 둘(용락, 형락)이 부모와 함께 살고 있었다. 아버지 이름은 김석태(金錫泰), 어머니는 전기(田器)였다.
역도산과 박신봉이 10대에 조혼으로 낳은 첫째 딸 김영숙(1942년생)의 남편 박명철은 체육상(장관), 박명철과 김영숙의 딸 박혜정은 북한 최초로 국가대표 여자 역도팀 감독. 박명철의 여동생 박명선은 내각부총리를 거쳐 인민봉사총국장과 역도협회 위원장 역임. 또다른 여동생 박명순은 당경공업부부장으로, 김정은의 현지지도를 수행하는 실세 관리다.
두 번째 부인은 게이샤(藝人. 기생). 오자와 후미코. 해방 전 일본에 건너와서 비교적 긴 세월 동안 동거한 교토 출신 여성. 1958년에 이혼. 장녀 1944년생 모모타 치에코(百田千榮子), 장남 모모타 요시히로(百田義浩. 2000년 사망), 1948년생 모모타 미츠오(百田光雄), 역도산의 손자는 모모타 치카라(百田力). 1981년생이다.
다나카 게이코는 세 번째 부인이다. 1941년생으로 아직 생존해 있다. 1964년생 딸 히로미가 있다. 아버지 역도산이 그렇게 운명하는 바람에 유복녀가 되었다. 그녀는 아들과 딸을 하나씩 두었다. 딸(역도산-게이코의 외손녀)은 아시아나 항공의 스튜어디스로 일하고 있다. 아들이 누나보다 먼저 일찍 결혼했다. 고교시절에는 유명한 야구선수였으나, 지금은 평범한 회사원이다.
게이코 여사는 북한에 있는 역도산의 딸 김영숙에 대하여 정말로 부녀관계가 맞는가, 유전자 검사를 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역도산이 결혼할 당시, 젊은 아내에게 부담 주지 않으려고 형의 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녀는 그 얘기를 하는 것 같다.
북한에서 역도산의 가족들이 대부분 비교적 굵직한 명함의 주인공들로 살고 있는 것은 다행스럽기도 하고, 보기도 좋다. 국가는 공로자들을 그렇게 대우해야 옳다.
유언
역도산이 그렇게 비운으로 요절하지 않고, 포부(抱負)대로 정계진출했더라면, 남북관계만이 아니라, 일본을 포함하여 세 나라 사이에 대립하고, 서로 증오하고, 언제든지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나쁜 정치환경은 조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보다는 좋은 관계로 지낼 것이다. 내가 그렇게 확신하는 것은 역도산이 패망 이후, 패배주의에 빠져 있는 일본사람들의 ‘집단우울증’을 치료해준 공로가 실로 지대하고 또 위대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한 영향력은 선하고 거대하여 일본 정치권과 유권자들이 역도산을 정치분야의 희망으로 여기지 않았겠는가. 그 점 참으로 아쉽다.
그 대타로 정계에 들어간 안토니오 이노키가 스승을 대신하여 나름대로 일본 기성정치인들과는 다르게 열정적이고 특별한 정치활동을 하지 않았는가. 역도산이라면, 어땠을까. 그에 관해서는 긴 말이 필요 없다는 것이 나의 확고한 생각이다.
게이코 여사에 의하면, 역도산은 마지막 순간에 “나는 이렇게 빨리 죽기 싫다”고 말했다고 한다. 대부분 그렇지 않겠나. 젊으나 젊은, 꿈 많은, 유능한 역도산은 정말로 죽기 싫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부르면 누구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따라야 한다. 바로 그 순간, 역도산은 이승의 마지막 호흡을 하면서 특별한 유언을 남겼다. 오른손을 조금 들어 손가락 셋을 펴고 눈을 감았다. 증인은 게이코 여사다.
세 손가락의 뜻
마이니치의 한반도 전문기자인 스즈키 선생은 그 깊은 뜻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하여 그에 관한 답을 내는 데 도움이 될 사람들을 찾아 한국에 왔었다. 결론은 감동적이었다. “세 손가락은 남북한과 일본, 세 나라를 뜻하는 것이다.” 그의 정성과 열정에 고마움과 함께 존경을 표한다.
나는 그의 결론을 좀 더 풀고 펼쳐서 보완하고 싶다.
“세 나라가 지금과 반대로, 평화적으로, 우호적으로, 다정하게, 가슴 활짝 열어놓고, 시간 정해놓지 않고, 어떤 주제에 대해서 속이 시원해질 때까지 대화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정말로 바보들의 시간이었다. 백년 후, 천년 후를 내다보며 이제까지 없었던 찰진 관계를 이룩하고, 역도산의 날들, 그 관중들처럼 ‘가라데춉’을 함께 외치는 우정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다. 온 세상이 부러워하고 함께하려고 몰려오는, 그런 위대한 시대를 열자!
숨을 거두기 직전에, 세 손가락을 들어보이는 것으로 특별한 유언을 남긴 역도산의 마음은 참으로 감동적이고 아름답고 귀하다. 지혜롭다. 마지막 순간에, 그 극소한 여력(餘力)을 세상에 주고 싶은 메시지를 표현하기 위하여 세 손가락을 들어보이는 일에 쓰고 눈감은 그 정성과 사랑은 눈물겹다. 이 특별한, 찰라의 순간을 ‘영웅의 죽음에 걸맞는 유언’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상황에 전혀 걸맞지 않다. 영웅은 이 큰 사람 역도산에게는 작은 칭호다.“
덧붙임:지난 11월 9일, 도쿄에서 역도산의 가족과 지지자들이 ‘역도산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생일파티였다. 서울에서도 오는 12월 20일, 선생의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를 이어간다. 그동안 종종 삼삼오오 모여서 역도산을 추억하던 이들이 이번에는 집단으로 모여서 생신축하와 추모제를 합쳐서 문화제(기획총괄 김경원, 추진위원장 김병수)를 열기로 했다. 국내에서는 최초의 행사다. 뜻 있는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를 바란다.
새해 2025년은 한일국교 정상화 60주년이 되는 해다. 1965년, 수교문제로 ‘내전’을 벌였던 그 특별한 역사는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된다. 세월은 쏜살같이 흘러 어언 60돌이 된 것이다. 그 뜻깊은 ‘나이’에 합당하게 품위 있는 교류와 협력이 가능한 관계가 되면, 어디 덧나나. 특히 서로 이웃인 세 나라 사이에 역도산이 꿈꾸었던 화풍난양(和風暖陽)의 봄날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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