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일은 40회 유엔 제정 '국제 노예제 철폐의 날'

흑인 소년 매 맞는 장면 보고 노예해방운동 투신 결심

결사대 이끌고 연방정부군 병기창 습격했다가 교수형

경제적 착취 위해 인신매매되는 이주민도 현대판 노예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유엔은 1949년 12월 2일 총회를 열어 '인신매매 및 성매매 금지 협약'을 채택했다. 그로부터 90년 전 이날은 미국의 노예해방운동가 존 브라운이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날이기도 했다. 1985년 유엔은 존 브라운의 업적을 기리고 인신매매 금지 협약 채택을 기념하는 동시에 현대판 노예들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고자 12월 2일을 '국제 노예제 철폐의 날'로 정했다. 다음달 2일은 제40회 국제 노예제 철폐의 날이자 존 브라운 165주기다.

유럽인들은 기독교 교리와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평등과 인권의 가치를 중시해왔으나 이교도나 이민족은 예외였다. 특히 피부 빛깔이 확연히 다르고 근대 문명을 발달시키지 못한 아프리카 중서부 흑인들이 노예사냥의 표적이 됐다. 아메리카 대륙을 침략한 유럽인들은 원주민들이 질병과 학살 등으로 몰살하자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선으로 실어와 강제노동을 시켰다. 근대 인류사에서 최악의 흑역사로 꼽힌다.

'국제 노예제 철폐의 날'은 존 브라운이 사형 당한 날

노예제 철폐 투쟁에 앞장선 존 브라운
노예제 철폐 투쟁에 앞장선 존 브라운

이를 타파하기 위해 숱한 사람이 피를 흘렸다. 이 가운데 우뚝한 인물이 브라운이다.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스미스소니언 선정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100인'에도 꼽히고 유엔도 그의 기일을 기념일로 정했을 만큼 미국사와 인류사에 남긴 발자취가 뚜렷하다.

그는 1800년 미국 코네티컷주 토링턴에서 태어났다. 조상은 영국에서 이주한 청교도로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는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한 군인이었다. 피혁공장을 운영하던 아버지는 비밀리에 흑인 노예들이 피신할 수 있도록 도운 강성 노예해방주의자였다. 무인 기질은 두 할아버지한테서 물려받았고, 노예해방 사상은 아버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12살 때 한 흑인 소년 노예가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주인에게 삽으로 맞는 장면을 보고 노예해방운동에 몸 바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아버지 공장에서 일하다가 펜실베이니아에 따로 피혁공장을 차려 큰돈을 벌기도 했으나 사업보다는 노예해방운동에 관심이 더 많았다. 질병으로 아들과 아내를 잃고 경제공황으로 파산하는 어려움도 겪었다.

 

존 브라운의 봉기를 묘사한 존 스튜어트 커리의 벽화 ‘비극적 서곡’. 1942년 작으로 토피카의 캔자스주 의사당 벽을 장식하고 있다.
존 브라운의 봉기를 묘사한 존 스튜어트 커리의 벽화 ‘비극적 서곡’. 1942년 작으로 토피카의 캔자스주 의사당 벽을 장식하고 있다.

'피 흘리는 캔자스주'에서 노예제 폐지파 선봉에 선 브라운

미국에서는 18세기 말부터 노예제 폐지운동이 일어났다. 1780년 펜실베이니아주가 노예해방법을 통과시킨 것을 시작으로 공장이 많은 북부의 여러 주가 차례로 노예제를 폐지했다. 반면 대규모 농장이 많은 남부에서는 노예제를 유지하려는 세력이 우세했다.

1850년대 미국 본토 정중앙에 위치한 캔자스주는 두 진영이 치열하게 세력 다툼을 벌이던 지역이었다. 노예제 폐지파는 투표를 통해 자유주 연방에 가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했으나 노예제 옹호파는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이를 막으려 했다. 옹호파는 이웃한 미주리주 지원을 받아 민병대를 결성한 뒤 폐지파들을 잇따라 습격했다. '피 흘리는 캔자스(Bleeding Kansas)'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유혈 사태가 거듭됐으나 폐지파와 자유주들의 대응은 소극적이었다. 브라운은 이들을 비겁자라고 비난하며 탈주 노예들을 주축으로 비밀결사를 만들어 반격에 나섰다.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는 와중에 1856년 5월 캔자스주 폐지파들의 중심지이던 로런스의 신문사와 호텔이 습격당했다. 브라운은 옹호파들의 집단거주지 포타와토미를 습격해 전문 추노꾼 5명을 찔러 죽였다. 이 사건은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나 브라운은 처벌받지 않았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 사진과 노예해방 선언문. 링컨은 1863년 1월 1일을 기해 미합중국 내 모든 지역의 노예해방을 선언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 사진과 노예해방 선언문. 링컨은 1863년 1월 1일을 기해 미합중국 내 모든 지역의 노예해방을 선언했다.

탈옥 권유마저 거절한 채 교수대 오른 순교자

대규모 전투가 벌어질 우려가 높아지자 캔자스 주지사는 두 민병대에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해산을 명령했다. 양측은 이를 받아들였으나 브라운은 거부했다. 남부 산악지역에 거점을 마련해 노예해방 투쟁 기지로 삼을 계획을 세운 뒤 자신의 두 아들과 해방 노예 등으로 구성된 결사대를 이끌고 1859년 웨스트버지니아주 하퍼스페리의 연방정부군 병기공장을 습격해 점거했다.

연방정부는 즉각 진압군을 편성해 토벌에 나섰다. 지휘관은 남북전쟁 때 남군 총사령관으로 활약한 로버트 리 대령이었다. 진압 과정에서 결사대원 10명이 전사했고 브라운을 포함한 8명은 체포돼 사형을 선고받았다. 사형에 반대하는 탄원이 국내외에서 쏟아졌고, 동료가 감옥에 잠입해 탈옥시키려고 했지만 그는 모두 거절한 채 교수대에 섰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다. "만약 내가 부유한 자, 권력자, 지식인 등을 위해 나섰다면 누구나 그 행위를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처벌은커녕 오히려 보상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성경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해야 하며, 너희도 함께 갇힌 듯 지금 갇혀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라'고 내게 가르쳤다. 나는 그 명령을 따르고자 노력했을 뿐이다. 하나님의 소외받는 빈한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결코 잘못이 아니라 올바른 행위였다."

 

미국 뉴욕의 유엔 방문자 광장에 들어선 ‘귀환의 방주’. 2015년 3월 25일 ‘국제 노예제 및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 희생자 추모의 날’을 맞아 세웠다.
미국 뉴욕의 유엔 방문자 광장에 들어선 ‘귀환의 방주’. 2015년 3월 25일 ‘국제 노예제 및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 희생자 추모의 날’을 맞아 세웠다.

"브라운은 지금까지 살았던 가장 위대한 백인"

'노예들의 모세'로 불리는 흑인 여성 인권운동가 해리엇 터브먼은 브라운을 "지금까지 살았던 가장 위대한 백인"이라고 평가했다. 흑인 노예해방론자 프레드릭 더글러스는 "나는 노예를 대변해 말할 수 있었으나 브라운은 노예를 위해 싸울 수 있었고, 나는 노예를 위해 살 수 있었으나 브라운은 노예를 위해 죽을 수 있었다"는 추모의 글을 남겼다. 무장투쟁을 불사한 급진파 흑인 이슬람운동가 맬컴 엑스는 "흑인 민권운동에 함께할 만한 백인은 있는가"란 물음에 "없다"고 말하면서도 "혹시 존 브라운이 다시 살아 돌아온다면 몰라도…"란 단서를 붙이기도 했다.

그가 숨진 뒤 1년 4개월 만인 1861년 4월 남북전쟁이 일어났다. 링컨 대통령은 1863년 1월 1일을 기해 미합중국 내 모든 지역의 노예해방을 선언했다. 브라운은 노예해방의 상징이자 순교자로 인정받아 북군의 우상으로 추앙받았다. 북군의 승리로 전쟁이 끝난 뒤에는 미국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의 죽음을 기리는 노래가 "글로리 글로리 할렐루야"란 후렴으로 유명한 '존 브라운의 시신(John Brown's Body)'이다. 이 곡조에 새로운 가사를 붙인 '공화국 전투 송가(Battle Hymn of the Republic)'가 남북전쟁 때 북군의 군가로 쓰였다. 우리나라 찬송가집에도 '마귀들과 싸울지라'란 제목으로 수록됐고, 가수 조영남도 번안곡 '조국 찬가'를 불렀다.

 

지난 10월 시에라리온 출신 이주노동자 여성들이 레바논 하즈미에에 마련된 피란민 임시 거처에 누워 있다. 이들은 현대판 노예제로 불리는 악습 ‘카팔라(후견인)’제도에 따라 레바논에서 일하다가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발이 묶인 상태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10월 시에라리온 출신 이주노동자 여성들이 레바논 하즈미에에 마련된 피란민 임시 거처에 누워 있다. 이들은 현대판 노예제로 불리는 악습 ‘카팔라(후견인)’제도에 따라 레바논에서 일하다가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발이 묶인 상태다. (로이터=연합뉴스)

ILO "전 세계에 현대판 노예 5000만 명"

영국 의회는 1833년 7월 26일 대영제국 안의 모든 노예를 1년 안에 해방시킨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보다 앞서 스페인은 1811년, 네덜란드는 1814년에 노예제를 폐지했다. 나머지 유럽 국가 대부분도 1840년대와 1850년대에 걸쳐 노예제를 없앴다. 일본은 1590년, 우리나라는 1894년 갑오개혁 때 노예제가 폐지됐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인신매매, 성적 착취, 아동 노동, 강제결혼, 무력 분쟁에 동원되는 소년병 징집 등 현대판 노예가 존재한다. 위협, 폭력, 강압, 기만, 권력 남용으로 인해 개인이 거부하거나 떠날 수 없는 착취 상황에 놓인 것이다. 인도의 낮은 카스트 계급, 소수 부족, 원주민 등도 오랜 관습과 전통에 뿌리박혀 노예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프리카 북서부 모리타니는 1981년까지 합법적으로 노예제를 유지했다.

유엔은 부채 때문에 강제노동을 하는 전통적인 방식 말고도 모든 종류의 경제적 착취를 위해 인신매매되는 이주노동자들이 존재한다고 파악하고 있다. 가사근로자, 건설 노동자, 농업 노동자, 매춘 등이 이에 해당한다.

ILO(국제노동기구) 추산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강제노동과 강제결혼이 최근 크게 증가하고 있다. 2021년 기준으로 현대판 노예에 해당하는 사람은 5000만 명으로 2016년에 비해 1000만 명이나 늘었다. 특히 여성과 어린이가 취약하다. 현대판 노예제는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발생하며 강제노동의 52%, 강제결혼의 25%가 중상위 소득국가에서 일어난다. 또 전 세계 어린이 10명 가운데 1명이 일하고 있는데, 대부분 경제적 착취를 위한 노동이며, 명백한 아동권리협약 위반이기도 하다.

 

아이티의 혁명 영웅 투생 루베르튀르의 모습을 담은 초상화. ‘검은 나폴레옹’이란 별명에 맞춰 나폴레옹 복장을 입혔다.
아이티의 혁명 영웅 투생 루베르튀르의 모습을 담은 초상화. ‘검은 나폴레옹’이란 별명에 맞춰 나폴레옹 복장을 입혔다.

유일하게 성공한 아이티 노예 혁명 기념한 '노예무역 철폐의 날'

1997년 유엔이 제정한 '국제 노예무역 철폐의 날'도 있다. 1791년 아이티 혁명이 발발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8월 23일로 정했다. 아이티 혁명은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성공한 노예 혁명이다. '검은 스파르타쿠스', 혹은 '검은 나폴레옹'으로 불리는 투생 루베르튀르는 흑인 노예들을 이끌고 프랑스군과 영국군을 잇따라 물리쳐 독립과 노예 해방을 쟁취했다. 이로써 아이티는 최초의 흑인 공화국이자 남북 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에 이어 두 번째 독립국이 됐다.

이를 계기로 비인간적인 노예무역을 불법화하는 법안이 각국에서 만들어졌다. 덴마크는 1802년, 미국과 영국은 1807년, 프랑스는 1819년, 스페인은 1820년 노예무역을 금지했다. 19세기 초 차례로 독립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도 노예무역 폐지를 선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남부와 서인도제도 등지에서는 한동안 노예제가 존속해 노예무역이 금방 종식되지는 않았다.

노예제가 폐지된 이후 서구 열강은 식민지 주민을 강제동원하거나 중국인과 인도인 노동자 등을 계약이란 허울 아래 데려와 혹사시켰다. 우리나라 선조들도 20세기 초 미국 하와이 사탕수수농장과 멕시코에서 에네켄농장에서 노예처럼 일했고, 일제강점기 말 징용으로 끌려가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노예선에 짐짝처럼 실린 노예들의 모습을 담은 18세기 기록화
노예선에 짐짝처럼 실린 노예들의 모습을 담은 18세기 기록화

'귀환의 방주'도 끊어내지 못하는 노예의 역사

유엔은 2006년 11월 총회에서 노예제와 관련한 또 하나의 기념일을 제정했다. 이듬해부터 3월 25일을 '국제 노예제 및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 희생자 추모의 날'로 기리기로 한 것이다. 2007년 3월 25일은 영국 의회의 노예무역 폐지법안 통과 200주년 기념일이었다.

2015년 3월 25일 미국 뉴욕의 '유엔 방문자 광장'에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귀환의 방주'란 이름의 영구 기념물 제막식이 열렸다. 아이티계 미국 건축가 로드니 레온의 작품이다. 노예선을 상징하는 조형물 안에 노예무역을 나타낸 원형 세계지도를 새기고 노예선에 실린 흑인 노예를 형상화했다.

유엔이 노예와 관련한 기념일들을 제정한 취지는 과거의 아픈 기억을 일깨워 오늘날 유사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제도적으로 노예제가 없어졌다고 해도 인권과 평등을 인정하지 않고 사람이 사람을 비인간적으로 부린다면 노예나 다름없다.

노예제나 노예무역을 오래된 옛일이나 바다 건너 먼 나라 일로만 여기고 있다. 그러나 형태만 달리했을 뿐 노예제의 역사는 지금 이 땅에서도 계속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맬컴 엑스 말대로 브라운이 다시 살아 돌아와 동남아시아나 중앙아시아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서 일하는 장면을 본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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