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화가 오윤의 역작, 50년 풍화에 한계상황
지속적인 박락현상에 보행자 상해 위험
이럴 때 국립현대미술관 나서야 하지 않을까
50년 간 종로 거리와 동고동락한 테라코타 벽화 <평화>
종로4가 우리은행 외벽에 위치한 테라코타 벽화 <평화>(1974)의 정체를 아는 시민들이 얼마나 있을까. 어쩌면 이 벽화는 광장시장 근방을 지나쳤던 분들에게 그저 조금 특이한 질감의 외벽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평화>는 1974년에 오윤, 임세택, 오경환, 윤광주가 가로세로 30cm, 두께 3cm 두께의 전돌을 배 모양의 상업은행 외벽에 이어 붙여서 제작한 대작이다. 이들이 이러한 테라코타 벽화를 제작한 것은 당시 상업은행 설계실 측과의 협의는 물론이고 임세택이 당시 상업은행장이었던 부친에게 삼각지, 종로4가, 구의동 상업은행의 벽을 경복궁 자경전 담처럼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고 설득한 것이 주효한 덕분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남은 것은 종로4가 우리은행 외벽의 <평화>와 내벽의 <산경문>뿐이다.
<평화>의 전반적인 구성은 오윤(1946~1986)이 주도했다. 그는 1970년 전후에 멕시코 벽화, 독일 표현주의, 입체주의 등을 참조하며 민중의 역동적 힘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가를 탐구했다. 그래서 <평화>는 유연하면서도 강인한 민중의 신체를 생명력 충만한 대지를 연상케 하는 고부조 전돌을 통해 드러낼 수 있었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평화>는 폐쇄적인 한국 미술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미술이 어떻게 전시장 밖에서 민중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소중한 선례이기도 하다.
오랜 세월 끝 보존의 한계상황에 처한 <평화>
한국 미술사 차원뿐 아니라 서울의 역사 차원에서도 매우 의미가 깊은 <평화>는 벽화라는 숙명 때문에 반세기에 걸쳐 풍화를 정면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되뇌어 보면 필자가 20대 시절에 광장시장을 지나며 <평화>를 마주했을 때도 이미 군데군데 파손된 흔적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또한 이 벽화는 꽤 오랜 시간 노점들을 바로 아래에 두고 있어 작품 전체를 살피기 매우 어렵기도 했으며 전돌 일부가 보행자에게 떨어질 위험이 있기도 했다. 물론, <평화>가 오랜 시간 노점들을 알게 모르게 품어주는 역할을 해준 것은 이 벽화를 제작한 이들의 의도와 상충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생할 수밖에 없는 안전 문제를 외면하면서까지 <평화>에 내재된 의도를 강조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평화>와 관련된 안전 문제는 2022년에 일부 해소되었다. 종로구가 종로4가 일대의 노점들이 점유한 공간을 정비하는 ‘거리가게 특별정비’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이 정비 사업에 따라서 기존 노점들은 우리은행 건물 쪽이 아니라 차도 쪽에 위치한 신규 판매대로 이동했다. 덕분에 <평화>의 하단부가 노점에 가려지지 않아 벽화 전체를 조망할 수 있게 되었으며 노점들도 전돌 조각 추락 피해 가능성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지속적인 전돌 박락 현상에 따른 보행자의 상해 위험성은 여전히 남겨진 상황이었다.
이후로 종종 광장시장을 지나며 <평화>를 보았지만, 겉으로 보기엔 큰 변화가 있지는 않았다. 그런데 최근 필자는 오랜만에 종로4가를 지나다가 <평화>가 큰 변화를 마주했음을 발견하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평화>가 반투명 가림막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가림막이 설치된 이유가 궁금하여 우리은행 내부를 살펴보니 리모델링 공사를 진행 중이었다. 아마도 <평화>에 가림막이 설치된 이유는 건물 내부 리모델링 공사 과정에서 계속 발생하는 진동으로 박락될 수 있는 전돌 조각들이 보행자를 덮치는 상황을 막기 위함이 아닐까 싶었다. 한편으로 이러한 상황을 바꿔 말하면 우리은행의 리모델링 공사로 <평화>의 내구성 문제가 더 악화될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젠 국립현대미술관이 나서야 하지 않겠나
최근 한겨레의 보도에 따르면 우리은행이 올해 초에 <평화>에 가림막을 설치한 후 4월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문의하여 대책을 논의했다고 한다. 또한 이 기사를 통해서 오윤과 함께 <평화>를 제작한 오경환의 지적으로 지난 7월 3일에 작품의 훼손 상황을 파악하는 조사 작업을 진행할 예정이었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이 조사 작업이 <평화>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미 반세기에 접어든 <평화>를 감당할 수 있는 우리은행의 역량이 한계점을 초과한지 오래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겨레의 기사를 접했을 때 이번 <평화> 조사 작업에 국립현대미술관 측도 입회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2006년에 오윤 작고 20주기를 맞아 《오윤: 낮도깨비 신명》을 열며 그가 사회현실 비판을 민족예술 형식으로 승화, 발전시킨 1980년대 현실주의 미술의 대표 작가라고 소개한 바 있다. 또한 국립현대미술관이 제작한 이 회고전 도록 도입부에는 1981년 여름호 『계간미술』에 실린 오윤의 말인 “미술이 어떻게 언어의 기능을 회복하는가 하는 것이 오랜 나의 숙제였다”를 인용하여 강조하기도 했다. 사실 언어의 기능을 회복한 미술에 대한 오윤의 고민이 잘 드러난 사례는 그의 판화 작업뿐 아니라 <평화>와 같은 벽화도 포함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평화>는 민중의 삶이 펼쳐지는 현장과 동고동락한 황톳빛 시각언어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벽화를 보존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이미 여러 대안이 나온 바 있다. 김진하 평론가는 작품성과 역사성이 높은 <평화>를 더 이상 방치하지 말고 원작이 있던 자리에 복제 벽화를 두고 원본은 서울의 문화유산으로 지정하여 서울역사박물관으로 이전하여 관리하거나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품으로 구입하여 관리하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평화>가 서울시의 문화유산을 넘어 국가 차원의 유산으로도 가치가 높다는 점과 국립현대미술관이 미술작품 보존과학에 대한 전문성을 갖추고 있음은 물론이고 오윤의 회고전을 열기도 했다는 측면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으로 전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물론, <평화>가 미술관으로 이전되면 이 벽화가 축적한 장소성이 훼손되는 문제가 없지 않다. 그러나 <평화>가 물리적 한계에 봉착한 지 오래되어 광장시장 일대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아니라 잠재적 보행 사고의 원인으로 취급되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필자는 <평화>가 이제 더 좋은 장소로 이전 및 관리되어 이 벽화가 쌓아온 가치가 더 많은 이들과 공유되고 논의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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