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심 판결 뒤엎은 스모킹건 ‘노태우 비자금’
노 “SK그룹에 300억 주고 약속어음 받아”
“비자금이 최 회장 재산형성에 결정적 기여”
윤, 부산 시장 방문 때 재벌 총수 병풍 세워
전경련도 부활…길고 긴 정경유착의 그림자
최태원 SK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 소송 2심 판결이 한국의 정경유착 흑역사를 소환했다. 최 회장의 손을 들어줬던 1심과 전혀 다른 판결이 나온 스모킹건 역할을 한 핵심 증거가 노 관장의 부친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었기 때문이다.
서울고법 가사2부(재판장 김시철)는 최 회장이 노 관장에게 20억 원의 위자료와 함께 이혼에 따른 재산분할금으로 약 1조 3800억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는 2022년 12월 1심을 맡은 서울가정법원 가사합의2부(부장판사 김현정)가 인정한 위자료 1억 원, 재산분할금 665억 원보다 20배 넘게 늘어난 것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이혼 소송 재산분할금 중 최대 규모다.
판결이 뒤바뀐 핵심 증거는 노 관장이 2심 재판부에 처음으로 제출한 약속어음 6장이다. 이와 관련한 자초지종을 이해하려면 1990년대 초 SK그룹의 전신인 선경그룹이 현 SK증권인 태평양증권을 인수했을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최 회장과 노 관장이 결혼한 지 4~5년 됐을 무렵이다. 노 관장 측 주장에 따르면 부친인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1년 비자금 300억 원을 사돈인 최종현 SK그룹 선대 회장에게 전달한 뒤 선경그룹 명의의 약속어음을 받았다. 노 관장 측은 이를 증명하기 위해 50억 원짜리 약속어음 6장의 사진과 관련 메모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언론들이 보도한 2심 재판부 판단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 약속어음은 차용증과 비슷한 측면이라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이렇게 전달된 비자금이 최종현 선대 회장과 최태원 회장의 SK 주식 매입에 일부 쓰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 만큼 노 관장과 그 일가의 기여도를 인정해야 한다. 태평양증권을 인수할 당시 자금 출처가 불분명했으나 세무조사나 검찰 조사 등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고, 이후 SK는 (투자 위험성이 높은) 이동통신사업(현 SK텔레콤)에도 진출했다. 지극히 모험적인 행위였으나 SK가 대통령과 사돈 관계를 보호막·방패막이로 인식하고 위험한 경영을 감행해 결과적으로 성공한 것이다. 1988년 결혼 당시 양쪽 모두 재산이 없었으므로 현재의 재산은 대부분 혼인 생활 중 ‘부부 공동체’가 형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대해 최 회장 측은 “SK그룹 주식은 선대로부터 증여·상속받은 ‘특유 재산’이라 재산 분할의 대상이 아니며 (태평양증권 인수에 들어간 돈은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이 아닌) 계열사 자금을 횡령해 만든 비자금”이라고 반박했다. 노 전 대통령의 제6공화국 비자금 유입과 각종 유·무형의 혜택은 전혀 입증된 바 없는데 2심 재판부가 모호한 추측만을 근거로 판단했다는 주장이다. 최 회장 측은 당시 사돈이었던 6공화국의 압력으로 각종 재원을 제공했고 노 관장 측에도 오랫동안 많은 지원을 해왔다고도 항변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최 회장 측은 즉각 대법원에 상고할 뜻을 밝혔다. 그러나 대법원에서는 법리만 따진다는 점에서 2심 판결이 다시 뒤집힐 가능성은 낮다는 게 법조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법원 판결과 별도로 양쪽의 공방은 대한민국 경제·산업사의 어두운 측면인 ‘정경유착’을 소환했다는 점에서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과거 정경유착의 흑역사가 다시 조명받으며 SK에 대한 이미지도 나빠졌다. 법조계에서는 “과거 형사재판 과정에서도 인정된 바가 없는 노태우-SK 사이의 정경유착이 가사 사건에서 사실로 인정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재판부는 판결 근거로 30여 년 전 사례를 거론했으나 정부와 재벌기업의 정경유착의 긴 그림자는 여전하다. 예전처럼 노골적인 정경유착은 아니더라도 기업들은 정권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고 그 대가로 정권은 기업에 편의를 봐주는 모습을 지금도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윤석열 정부 들어 정경유착으로 의심할 만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
그 상징적인 장면이 작년 12월 7일 거의 모든 신문이 1면에 게재한 ‘재벌 총수 병풍 삼은 대통령 사진’이다. '2030부산 엑스포' 유치 실패로 성난 민심을 달리기 위해 윤 대통령은 6일 부산 중구 깡통시장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비롯한 재벌기업 총수들과 떡볶이를 시식했다. 사진은 그 장면을 담았다.
올해 1월 MBC 탐사기획 ‘스트레이트’는 ‘신 정경유착’이라는 제목으로 윤석열 정부의 정경유착 사례를 고발했다. 해외순방 때 대기업 총수를 대거 동원하고 사우디아라비아에 ‘29대 119’라는 처참한 결과로 참패한 ‘2030부산 엑스포’ 유치전을 펼치면서도 기업과 밀착했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당시 정경유착을 주도해 해체됐던 전국경제인연합회를 ‘한국경제인협회’로 이름만 바꿔 부활한 사실도 '신 정경유착' 사례로 볼 수 있다.
기업들은 많은 비용이 들고 총수들이 바쁜 시간을 쪼개야 하는 불편이 있더라도 대통령 요구를 거절하기 어렵다. 기업 입장에서 각종 인허가권을 쥔 정부의 힘은 막강하다. 특히 불법 경영권 승계와 사익편취 의혹 등에 연루된 재벌기업 총수들은 검찰 정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다른 한 편으로 정부에 협조한 대가를 기대할 수도 있다. 실제로 윤 대통령은 재벌기업 총수들을 대대적으로 사면 복권하고 법인세를 깎아주는 등 대기업에 유리한 정책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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