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대담쇼'에서 공손한 태도·편안한 질문

물가·금리·어려운 서민경제엔 한가한 질문만

본질 비껴가기·두루뭉술 질문에 추가질문도 안해

반대 입장 언급없이 일방적 국정홍보 시간 할애

대통령 심기보좌하는 비서관 혹은 홍보맨 역할

한 때 청년들에게 선망의 직업이었던 기자가 멸칭으로 불리기 시작한 게 세월호 참사 때부터인 것으로 기억한다. 그 전에도 일부 언론과 기자들이 왜곡·조작보도와 출입처 갑질로 욕을 먹었지만, ‘기레기’라는 멸칭을 얻은 것은 세월호 때의 끔찍한 오보와 패륜 보도 때문이었다.

모든 기자들이 다 그렇지는 않다. 우리 주변에는 진실을 파헤치려는 선한 열정으로 가득하며, 시민 앞에 겸손하고 권력 앞에 당당한 기자들이 여전히 많다. 압수수색·고소고발 같은 권력의 탄압에 맞서고 있는 기자들, 저널리즘의 기본원칙을 충실히 지키며 취재하고 보도하는 기자들이 그들이다. 그래서 많은 시민들은 인내심을 발휘해 멸칭을 자제하고, 언론에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얼마전 이런 희망의 끈을 계속 붙잡고 있어도 될지 의문이 드는 사건이 또 벌어졌다. 공영방송 KBS의 윤석열 대통령 신년 특별대담 방송이다. 이 프로는 언론과 소통을 끊어온 대통령이 기자회견 대신 사전 기획과 사흘간의 편집을 거쳐 방영된 ‘대담쇼’라는 점에서 비웃음을 샀다.  100분 대담쇼의 대통령의 답변 역시 무성의·무책임한데다 대통령으로서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답변으로 국민들의 한숨을 자아냈다. 오죽하면 극렬 ‘친윤 매체’들조차 이 방송을 보고 일제히 ‘아쉽다’ ‘안타깝다’라는 사설을 썼겠는가.

국민들이 실망한 것은 윤석열 대통령의 답변 때문'만'은 아니다. 윤 대통령이 그동안 공식석상에서조차 무책임·비논리·몰상식의 발언을 낸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대통령에게 묻는다’도 아니요 ‘대통령에게 듣는다’도 아닌, ‘대통령실을 가다’란 제목으로 방영된 ‘대담쇼’에서 국민들은 그가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솔직하고 논리적이며 책임있는 답변을 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대담쇼가 놀라웠던 것은 질문자 역할을 맡은 KBS 박장범 앵커 때문이었다.

언론인이나 눈밝은 국민들이라면 방송을 보는 내내 박장범 앵커가 왜 그 자리에서 그런 질문밖에 하지 못할까 답답했을 것이다. 그의 태도와 질문은 '기자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국민들이 알고 싶은 것을 대신 질문하는 기자가 아니라, 공손하고 편안한 말로 대통령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대통령 비서실 직원이었다. 질문으로 핵심을 날카롭게 찌르는 기자가 아니라 홍보맨의 자세였다.

몇가지 예를 들어본다. 박장범 앵커는 윤 대통령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도어스테핑 예전에 하시다가 이젠 중단하셨는데, 그 출근길에 기자들 안보시니까 어떠세요? 좀 마음이 편하세요? 아니면 섭섭하세요? 예전처럼 매일 하시는 거는 아니라도 가끔씩 기자들과 질의응답하는 기회를 그런 모습을 또 보고싶다, 이런 국민들의 의견도 있습니다.”

윤 대통령이 도어스테핑을 중단하고 기자와 소통을 끊은 지 1년이 넘었다. 대통령 비서실장은 ‘기자들의 난동’ 때문에 도어스테핑을 할 수 없다고 했다. 올해 신년 기자회견이 예상되기도 했으나 이것도 실행하지 않았다. 거의 모든 언론들이 대통령의 ‘불통’을 비판하고 있는데, ‘마음이 편하세요, 아니면 섭섭하세요’라고 묻는 박장범 앵커의 질문은 한가하기 짝이 없다. 왜 기자들을 만나지 않는지, 도어스테핑을 중단한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기자들을 ‘난동부리는 자’라고 한 비서실장 말에 동의하는지 물었어야 했다. 

 

KBS가 방영한 '특별대담 대통령실을 가다' 방송 화면 갈무리.
KBS가 방영한 '특별대담 대통령실을 가다' 방송 화면 갈무리.

고물가와 고금리에 관한 질문도 어처구니 없었다. ‘과일값이 굉장히 비싸다’라며 물가안정 대책을 물어보고 ‘싼 대출로 갈아탈 수 있는 서비스가 추가로 나오는가’라며 고금리 대책을 묻는다. 서민들이 과일값이 비싸서 힘들어하고 싼 대출 서비스로 갈아타면 형편이 나아진단 말인가? 고물가·고금리로 인해 갈수록 어려워지는 서민경제의 해법을 마치 봉숭아학당 질문처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심각한 저출산 문제에 관한 질문은 너무나 가벼웠고, 이에 대한 윤 대통령의 답변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무성의했다. 그런데도 박장범 앵커는 더 따져묻지 않았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의대정원 확대, 늘봄학교, 중대재해처벌법 문제도 반대입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아 대통령의 일방적 국정홍보에 시간을 할애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박장범 앵커의 다른 질문들에 포함된 표현을 몇가지 보자.

“윤석열 정부 초반에 한 특징으로 여소야대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답답한 상황이 여러번 있었죠.”

“(윤 대통령이 ‘무슨 영수회담이라고 하는 거는 우리 사회에서 이제 없어진 지 꽤 된다’고 하자) 그런 용어도 이제 요즘은 안씁니다.”

“(윤 대통령이 9건의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한 것에 대해) 말씀하신 대로 입법부와 행정부가 서로 견제와 균형, 헌법상 민주주의 가치에 따라서 각각 부여받은 권한을 행사하는 것...”

“일각에서는 검사출신 대통령이 사법 리스크가 있는 이재명 대표 만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꺼려한다, 이런 분석도 있습니다.”

“(한동훈 비대위원장과 갈등설과 봉합설에 대해 언급한 뒤) 한동훈 위원장 잘 하고 있는 것 같습니까?”

“지지율이 잘 나오면 대통령도 신이 나실 텐데, 좀 국민들이 야속하세요? 열심히 노력하는 걸 못 알아주니까.”

“지난 정부에서 상당히 고초를 겪으실 때도..왜 저한테 지금 이러십니까라고 얘기하셨는데, 이 한마디가 진심이 느껴졌고, 속시원한 메시지고 무슨 말 하는지 알겠다라는 국민들이 많았거든요. 그 시원한 승부사 윤석열이,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너무 조심하시는 거 아니에요?”

“(개식용금지법에 관해 길게 이야기하며) 강아지 좋아하시고 또 김건희 여사도 댁에서 같이 강아지를 많이 키우시고, 그런 개고기 식용금지법안 같은 법안을 애기할 때는 김건희 여사 좀 조언도 듣고 그러십니까?”

대부분의 질문은 이런 식이었다. 그냥 ‘대통령의 입장에서’ 질문하고, 심각하고 불편한 질문은 피해가는 방식이다.  윤 대통령에게 ‘답답한 상황’이고 윤 대통령의 생각대로 ‘영수회담이란 용어도 요즘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검사 출신 대통령’이 사법리스크가 있는 야당 대표를 만나는 게 꺼려질 것이라고 한다. 한동훈 비대위원장과 갈등설이 대통령의 불법적인 ‘당무개입’에 의한 것이라는 지적은 하지 않고 왜 ‘한동훈 위원장이 잘 하고 있는 것 같은지’만을 물어보는가? 대통령 지지율이 낮아 ‘국민들이 야속한지’, 대통령 된 뒤 ‘너무 조심하는 것 아닌지’, 김건희 여사의 조언을 듣고 있는지, 이런 것들이 국민들이 궁금해하는 문제일까? 박장범 앵커는 공중파 방송에서 마치 대통령의 심기보좌를 하듯 질문을 던졌다.

이런 의미없는, 아니 시청자 국민을 무시한 질문의 클라이맥스는 김건희 씨 명품백 수수 관련 질문이다.

“이른바 파우치 외국 회사 그 조그마한 백이죠. 그 백을 어떤 방문자가 김건희 여사를 만나서 그 그 앞에 놓고 가는 영상이 공개가 됐습니다...어떻게 저렇게 검증되지 않은 사람이 더군다나 시계 몰래카메라를 착용한 전자기기를 가지고 대통령 부인에게 접근할 수 있었을까 이거는 의전과 경호의 문제가 심각한 것 아니냐라는 생각을 가장 먼저 사람들이 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죠?”

이젠 국민 모두가 다 알고, 전세계 유력 언론들이 다 소개한 ‘명품 디올백 수수’를 ‘파우치, 외국회사 그 조그만 백’이니 ‘몰래카메라 접근’이니 ‘의전과 경호의 문제’라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죠?”라고 되묻는다. 국민의 과반 이상이 진실을 밝히길 원하는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씨의 김영란법 위반 사건을 ‘함정취재’ ‘경호’ 문제의 프레임으로 뒤집고 윤석열-김건희 두 사람을 피해자로 둔갑시켰다. 대통령실과 여당이 원하는 딱 그대로를 물었다. 그걸 공영방송의 뉴스 앵커인 박장범 기자가 해낸 것이다. 

박장범 앵커는 이어진 질문에서 “여당에서는 이 사안을 정치공작이라고 부르면서 김건희 여사가 정치공작의 희생자가 됐다라고 얘기하거든요. 동의하십니까”라며 짐짓 다른 곳에서 ‘정치공작설’의 기원을 찾았다. 그러더니 ‘그 이슈(제2부속실 설치)가지고 부부싸움 하셨냐’고 물었다. 마치 억울하게 누명이라도 쓴 연예인 부부의 하소연을 들어주려는 황색잡지 기자의 질문 같다.

이후 외보안교, 남북관계, 대미·대중·대인 관계, 북핵 문제 등의 분야에서 질문이 나오지만, 대부분이 두루뭉술하고 새로울 것 없는 관점이었다. 윤 대통령의 답변도 그런 수준의 질문에 부합해서 구체성이 거의 없거나 과거 발언을 반복하는 정도였다. 최고통치자의 허점을 찌르고 혹시 모를 높은 콧대를 꺾을 질문은 귀를 씻고 들어봐도 없었다.

박장범 앵커가 ‘대담쇼’ 100분 동안 던진 질문의 특징을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 그저 대통령이 하고 싶은 말, 홍보하고 싶은 말을 하도록 멍석을 깔았다. 덕분에 윤석열 대통령은 논란의 대상이 된 몇몇 정책을 편안히 설명할 기회를 얻었다. 둘째, 정작 논란이 되고 국민들이 궁금해하는 질문은 대부분 뺐다. 예컨대, 김건희 씨 주가조작, 양평고속도로 노선변경, 고발사주, 해병대원 순직사건 개입, 당무개입 등 쏟아지는 어마어마한 불법비리 의혹을 비롯해 경제와 민생을 어떻게 살릴 것인지, 집값 안정 의지는 있는지, 부자감세는 계속 할 것인지, 재정악화는 어떻게 할 것인지 등에 관해서는 자세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넘어갔다. 셋째, 꼭 물어야할 질문을 하더라도 핵심과 본질을 의도적이고 교묘하게 비껴나갔다. 김건희 씨 명품 디올백 수수 스캔들 관련 질문이 그랬다. 넷째, 불편한 질문은 없었고 대통령에게 최대한 공손하고 편안한 질문만을 던졌고 표현도 그러했다. 예컨대, 문재인 대통령에게 ‘독재자’란 표현을 쓰며 질문했던 5년전 KBS 기자와는 전혀 다르게 박장범 앵커는 그 흔한 ‘검찰독재’라는 표현을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대통령 답변에 대해 다시 꼬치꼬치 캐묻는 추가질문도 없었다. 

 

KBS 시청자 청원 게시판 인터넷화면(2월13일 오전 1시 현재) 갈무리.
KBS 시청자 청원 게시판 인터넷화면(2월13일 오전 1시 현재) 갈무리.

기자가 대통령에게 기본적인 예의를 갖출 수는 있다. 그러나 기자라면 이렇게 질문하지는 않는다. 이럴 수 없다. 권력자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기자의 일임을 스스로 잘 알 것이다. 1년 이상 언론과 소통하지 않아 국민들이 궁금해하고 답답해하는 대통령에게, 경제와 민생이 지표와 체감 모두 악화되고 있는 나라의 대통령에게, 본인과 부인과 장모가 여러 건의 불법비리 의혹에 휩싸여 있는 대통령에게 이렇게 한가하고 편안한 질문을 던질 수는 없다.

박장범 앵커는 1994년 KBS에 입사해 정치·경제·사회부 등 주요 부서를 거친 기자 출신이고 간판 뉴스인 9시뉴스의 메인 앵커를 맡고 있다. 이런 기자가 대통령 최고권력 앞에서 그의 공손한 비서관 혹은 홍보맨이 되었으니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다. 1980년 담배를 꼬나문 전두환과 대담을 나누며 머리를 조아려 굴욕의 전설로 남은 MBC 이진희 사장이 소환됐다. ‘기레기’ 멸칭도 SNS에서 다시 돌고 있다.

KBS는 이 대담쇼가 8%가 넘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며, 설날 재방송까지 했다. 공중파를 통해 이 엉터리 국정홍보 쇼를 봐야하는 국민들에게 KBS 구성원들은 부끄럽지 않았을까? 언론노조 KBS본부는 “이제 KBS가 국영방송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게 됐다”고 했다. 공영방송 기자 30년 경력의 박장범 앵커는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가? KBS시청자청원 게시판에는 그에게 ‘앵커인가 비서인가’라고 묻는 사퇴 청원 게시글로 가득하다. 새해 초부터 기자 멸칭과 기자 망신을 불러온 일등공신은 조중동 친윤언론이 아니라 공영방송 기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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