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희 씨는 희생자일 뿐, 국민들이 '매정'하다는 궤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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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밤(7일)에 방송된 윤석열 대통령의 신년 대담에서 그가 한 얘기의 핵심을 요약하자면 사과할 주체는 내가 아니라 국민들이라는 것이었다. 사전 녹화된 뒤 사흘 동안의 편집을 거쳐 공들여 ‘제작’된 이 KBS와의 대담에서 대통령이 쏟아낸 말들의 속뜻을 풀이해보면 이렇다.
“제 아내 김건희 씨의 명품 가방 수수 의혹에 대해 국민들은 '그 억울한 사정을 잘 모르고 오해했으니 우리 국민들은 죄송합니다'라고 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제게는 그런 국민들의 진솔한 사과가 필요합니다.”
'사려 깊은' 국민이라면 대통령의 말을 들으면서 미처 깨닫지 못했음을 돌아보고 반성해야 한다. 사과할 사람은 대통령이나 그의 배우자가 아니라 자신들이었음을.
“(만나러 오겠다는 이를) 매정하게 끊지 못한 것이 문제”였을 뿐이고, 매정하게 선물을 뿌리치지 못한 부인의 여린 마음이 문제였으며, “누구한테 박절하게 대하긴 참 어려웠던 것”이 문제였을 뿐이다, 라고 대통령은 간곡히 얘기한다. 자신의 배우자인 김건희 씨는 뇌물을 받은 것이 아니라 수수'당했다'고 해야 맞지 않은가. 죄가 있다면 매정하지 못하고 박절하지 못한 영부인의 여린 심성 탓일 뿐인데, 그걸 알아주지 않은 국민들은 자신의 '매정'과 '박절'을 반성하고 뉘우쳐야 마땅한 일이었다. 대통령의 '진심'은 그렇게 국민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게다가 자신의 가련한 배우자는 '정치 공작'의 희생자가 아닌가. ‘친북적인 사람’이 공격 의도로 접근하는 것에 이렇게 취약하니, 대통령과 그 배우자 주변은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대통령이 이렇게 간절하게 얘기하듯 이제는 사건의 이름 자체를 바꿔 불러야 마땅해 보인다. '명품 가방 수수' 의혹 사건이나 '뇌물' 사건이 아니라 '심성이 모질지 못한 탓에 피해를 당한' 사건이며 '대통령의 거처가 불순한 이에게 침입당한' 사건이라고.
대통령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어여쁜' 후배인 여당의 비상대책위원장도 "국민들께서 걱정하실 만한 부분이 있었다는 건 분명하다"고 말했다. 이제 보니 그 말은 국민의 '걱정'을 살 것은 대통령 부인의 뇌물 수수가 아니라 불순한 이들이 함부로 대통령 부부의 주변에 들어와 마음 약한 이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는 환경이 국민들의 걱정을 살 일이라는 뜻이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그간 이런 사정과 내력을 모르고 그를 다그쳤으니 얼마나 죄송한 일인가. 국민들이 너그럽게 이해를 해 주면 될 일인데 대통령이 이렇게 수고스럽게 설명을 하게 만들었으니, 국민들은 면목이 없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일로, 피해자이며 희생자인 영부인을 처소에 한 달 이상 유폐하는 처사를 겪게 하고 있으니 억울한 이를 더욱 가여운 처지로 내몬 국민들은 얼마나 대통령 부부에게 미안해해야 할 일인가.
대통령의 이날 말들은 대담이라기보다는 자탄이며 애원이었다. 그의 말들은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하는 자문자답과도 같았다. 앞에 어떤 이가 앉아 있건 간에 혼잣말을 하는 ‘독백’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국가기간 공영방송, '국민의 방송'의 저녁 메인뉴스를 진행한다는 앵커는 대통령의 앞에 공손히 마주 앉아 그 애처로운 독백을 연민 어린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그는 명품가방이라는 누구나 알 수 있는 말 대신에 ‘최근에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이른바 파우치, 외국 회사 그 조그마한 백’이라는 암호 같은 말을 짜내어 대통령의 상처 받은 마음을 다독여 주는 '사려'를 보여줬다. 그런 장면, 그런 말들은 대담이라기보다는 군주를 ‘알현’하려 온 것이라고 해야 맞을 듯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오간 말들은 국민과 대통령, 언론과 대통령 간의 대담이 아닌 정담(情談)이었고, 질문과 답변이라기보다는 임금의 '교지'를 받아 적는 듯했다. 사전 준비된 질의응답에다, 녹화에다, 사흘 간의 편집까지, 그런 모든 예외와 파격은 그러나 이 약하디 약하고 가련한 대통령을 위해 마땅히 필요한 배려였다. 그것이 국가기간방송사의 제1의 소임 아니겠는가, 라고 국민들은 이해해줘야 한다.
대통령이 그 대담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 국민들이 대담에서 봐야 했던 것, 그것은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대통령과 그 부인!’이라는 발견과 각성이었다.
국민들은 대통령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해달라고 할 게 아니라 오히려 국민들이여, 저희를 보호하소서”라고 간절히 기원하는 이의 호소와 탄원을 들었다. 대통령이 대담을 녹화한 바로 그날 설날을 앞두고 대통령실 직원들과 명절 인사 영상을 찍으면서 부른 노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사랑뿐'이었다고 한다. 그 노랫말의 숨겨진 의미를 그대로 지나쳐서는 안 됐다는 것을 7일의 대담은 보여줬다. 그러나 '매정하고 박절한' 국민들은 그 노래 제목에서 '우리에겐 국민의 사과와 동정과 보호가 필요해'라는 간절한 요청을 듣지 못했다. 국민들은 너무도 무심했다.
그 애원과 호소를 더 이상 외면할 수는 없다. 저 약하디 약한 이를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저 가련한 이들의 처지를 모른 체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로 하여금 상담을 받게 하고 재활하게 해야 한다. 그 재활의 방식이 어떤 식이든지 간에, 자활 의지가 없어 보이므로 강제 재활 프로그램이 필요해 보인다. 그의 재활이 곧 국가 재활이다. 그를 규탄하고 성토하느라 그를 보살피지 못한 국민들은 그에 대한 '사랑'과 관심에 소홀했음을 반성하고 그에게 먼저 사과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과와 함께 국민들은 스스로에게 사과해야 한다. 간밤에 들은 것과 같은 말들을 대통령으로부터 들어야 하는 우리의 이 현실, 그 현실을 있게 한 것은 다름아닌 우리 자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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