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식’이나 ‘영어’에 사족을 못쓰는 인간들
십수 년 전,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자본주의: 러브스토리>(Capitalism: A Love Story)를 보다가 나름 신선한 충격을 받은 장면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미국이 ‘자본주의 국가’라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듣고 살았다는 마이클 무어 감독은 문득 미국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에 의문을 품고 국립문서기록관리청까지 찾아가 헌법 원본을 살펴본다.
‘인민’ 대신 ‘황국신민’ 줄임말 ‘국민’을 쓰는 사연
무어 감독이 탐독한 결과, 미 헌법 전문 어디에도 미국이 ‘자본주의’라는 대목은 없었는데, 평생 미국 헌법을 접할 기회는커녕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내게 정작 인상 깊었던 건, 미국 헌법이 미국인 자신들을 ‘인민’(We the people)이라고 표기했다는 사실이었다. 맙소사!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빨갱이였다니!
우리 제헌헌법 초안 또한 ‘인민’으로 표기하였으나 우파 정치인 윤치영이 ‘인민’은 공산주의자들이나 쓰는 말이라고 초안 작성자 유진오 박사를 공격하여 결국 ‘국민’으로 바뀌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는 ‘국민’과 ‘인민’, ‘시민’이라는 단어의 개념 정리가 꽤나 모호한 편이다. 세월이라는 흐름에 얹혀 그 용례가 대충 굳어졌다지만, 그래도 명색이 민주주의의 기본주체를 나타내는 개념어인데 설겆이가 설거지로, 짜장면이 자장면을 거쳐 다시 짜장면으로 바뀐 것처럼 취급해선 곤란하지 않을까.
이를테면, 교육부는 광복 50주년인 1995년 ‘황국신민’의 줄임말인 ‘국민’이란 단어가 적절치 않다는 이유로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변경했지만 3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에도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인민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국민’이란 단어를 쓰는 것이 현실이다.
서울대 사회학과 박명규 교수의 저서 <국민·인민·시민>은 분화되지 않은 피지배층 ‘민(民)’을 가리키던 전통 어휘가 정치의 주권자이자 인격적 주체를 뜻하는 근대 개념어로 전환되는 과정을 통시적 관점에서 추적하고 그 과정에 내재된 복합적인 시간성과 공간성을 고찰한다.
그 안에는 수세기동안 벼려진 서구 개념의 수용을 일제강점기 일본어 번역에 전적으로 의존한 강퍅했던 처지를 포함해 이데올로기의 극한 대립 결과물인 한국전쟁과 분단까지 우리 근현대사의 비극이 오롯이 담겨 있다.
국민·인민·시민에 대한 서구개념부터 이를 수용하거나 독자적으로 구축된 동양개념까지 다루려면 3박4일도 모자라겠으나 현재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용례를 대략적으로 규정하자면, ‘국민’은 헌법부터 일상어까지 가장 보편적이고 폭넓게 쓰이는 단어이겠고, ‘인민’은 중국이나 북한 같은 전체주의 국가에서나 쓰는 말일 것이며 ‘시민’은 비교적 최근에 각광받는, 뭔가 배운 티가 나고 왠지 좀 있어보이는 말쯤 되겠다.
한동훈이 ‘동료시민’을 애용하는 사연은?
아니나 다를까. 작년 3월,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그것도 무려 영어원서를 옆구리에 끼고 국외출장길에 오르고, 지난 연말 비대위원장 수락연설에서 꽃게마냥 ‘손가락 따옴표’를 선보이며 ‘미국식’에 남다른 애착을 보이던 국민의힘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요즘 ‘국민’이나 ‘시민’ 대신 ‘동료시민’이란 단어를 부쩍 쓰고 다닌다.
대학교에 갓 입학한 신입생이 교양수업에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란 개념을 처음 배운 후 길을 걷다가 다른 사람과 옷깃만 스쳐도 “그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야!”라고 석달 내내 떠들고 다니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추측컨대 ‘동료시민’이란, 미국 존 F 케네디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연설에서 쓰던 용어인 “my fellow citizen”를 직역한 듯한데, 한동훈 자신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성숙한 자유민주주의 사회는 시민들 간의 동료 의식으로 완성되는 거라 생각한다”며 “재해를 당한 낯선 동료 시민에게 자기가 운영하는 찜질방을 내주는 자선, 지하철에서 행패 당하는 낯선 동료 시민을 위해 나서는 용기 같은 것이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완성하는 시민들의 동료의식”이라고 설명했다.
다소 두서없고 장황하지만 쉽게 요약하자면, 재해를 당한 동료 시민에게 찜질방을 내주는 자선은 성숙한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완성하는 동료의식이지만, 150여 명의 생떼 같은 목숨을 앗아간 참사를 조사해 모든 의혹을 해소하자는 이태원 참사 특별법은 거부해야 마땅한 것이다.
한동훈 스스로도 개념을 간명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동료시민’은, 지난 2008년 ‘어륀지’(또는 오륀쥐 또는 어뤤쥐) 발언으로 인민들에게 큰웃음을 선사했던 이명박 대통령직 인수위 이경숙 위원장을 떠올리게 한다. 한동훈판 ‘어륀지’랄까.
잠을 연구하는 신경과학자 러셀 포스터(R. Foster)는 자신의 TED 강연에서 아침형 인간에 대해 설명하며 “아침형 인간과 저녁형 인간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둘 사이의 유일한 차이점이라면, 아침형 인간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우쭐거린다는 것뿐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미국식’이나 ‘영어’에 사족을 못쓰는 인간들일수록 왜들 그렇게 우쭐거리지 못해 안달인지 모르겠다.
관련기사
개의 댓글
댓글 정렬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