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모꼬지] 서민과 약자의 편에 서고 싶었다는 한동훈
시나리오 작법 첫 수업에서 배우는 것이 있다. ‘캐릭터를 규정하는 것은 대사가 아니라 행동’이란 가르침이다. 일테면, 사랑에 빠진 남자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그녀 앞에만 서면 얼굴을 붉힌다거나 되도 않은 핑계를 만들어 그녀 앞에서 얼쩡댄다거나 하는 식으로 소소하게 드러나는 그의 행동에 시청자(혹은 독자)는 더욱 감정이입하게 되고 드라마가 풍성해진다는 뜻이다.
이 경구(警句)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배트맨 비긴즈>에서도 비슷하게 인용된다. “It’s not who I am underneath, but what I do that defines me.” (자신을 나타내는 건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다.) 영화에선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두고 내적 갈등으로 힘들어하던 배트맨에게 일종의 깨달음(?)을 주는 장치로 쓰인다.
흔히 정치는 ‘말’로 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말’이란, 그냥 입으로 내뱉는 ‘말’이 아니라 상대방 혹은 국민을 향한 ‘설득’을 의미한다. 대화와 타협 또한 ‘말’이다. 어느 정치인이 “나는 청렴하다”라고 백날천날 떠들어봤자 명품백 받아 챙기는 행동 하나에 앞선 말들은 허무하게 무너지게 마련이다. 또 우린 일상생활에서 ‘말 따로, 행동 따로’인 인간 유형을 ‘신뢰하지 못할 사람’이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반대로 ‘언행일치’란, 믿음직한 사람을 나타내는 여러 표상 중 하나이다.
근래 SNS에서 재밌는 얘기를 봤다. “윤석열 대통령이 크리스마스 행사로 순직 군경 자녀들을 초청해 오찬을 한 걸 보니 이제 곧 순직 군경 관련 예산이 깎이겠군.”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8월 29일 국무회의에서 “선거 매표 예산을 배격해 절약한 재원으로 서민과 취약계층, 사회적 약자를 더욱 두껍게 지원하겠다”고 천명한 바 있다. 그리고 열흘 후 기재부는 노인·아동·청소년·장애인 관련 278개 사업 중 176개(63.3%)를 폐지·통폐합 또는 감축하는 등 관련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지방, 보육, 여성, 국방, 과학기술 등 국정 전반에 걸쳐 이런 경우가 한두 건이 아니다. 그리고 이 무참한 예산 삭감 소식에 이어 들려오는 건 ‘결혼·출산 시 3억 원까지 증여세 공제’ 등 온갖 부자감세 소식뿐이다.
재벌-부자들에게 감세 혜택을 주고 그것 때문에 세수가 줄어드니 서민-약자 관련 예산을 줄이는 패턴은 윤석열 1년 7개월 임기 기간 내내 초지일관한 재정정책이다. 허나 지난 10월 31일 윤석열 대통령이 국회에서 행한 예산안 시정연설 전문을 읽어보라. “총 23조에 이르는 지출구조조정 등 재정 낭비 요인을 차단하면서 약자복지 강화·일자리 창출 등 민생 관련 부분에 집중 지원”한단다. 행동과 철저히 유리된 이 ‘언어도단’은, 그저 대통령님의 치밀하고 속 깊은 국정철학을 이해하기엔 내가 너무 무식한 탓이라고 믿고 싶을 지경이다.
아니나 다를까. 윤석열의 아바타라는 세간의 평을 받는 한동훈 법무부장관이 지난 21일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기기 위해 법무부를 떠나며 가진 이임식에서 “서민과 약자의 편에 서고 싶었다. 그리고 이 나라의 미래를 대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한동훈 법 전문가님. 제가 법에 대해선 일체 까막눈이라 여쭙고 싶은데요.”
전세금 16억 8천의 도곡동 타워팰리스에 거주하며 소유 부동산 40억이 넘고 임대보증금만 18억인 동시에 배우자가 외제차 구입비에 부과되는 세금 몇 푼 아끼려고 위장전입을 했지만 서민과 약자의 편에 서서 미래를 대비하고 싶지 말란 법은 없나요? 없겠죠? 그러니 그렇게 서민과 약자를 무시로 입에 올리시는 거겠죠?
한동훈이 보수언론으로부터 대한민국 보수의 맹아이자 희망으로 대접받는 저변엔 ‘화려하고 논리적인 언변’이 한몫 한다. 한꺼풀 벗겨보면 화려함은 깐족거림에, 논리는 오류와 논리가 적당히 섞인 궤변에 가깝지만 하여튼 이 땅의 보수언론이 보기엔 그렇단다. 하지만 그런 건 하등 중요치 않다. 이제 집권여당 비대위원장으로서 보여 줄 ‘행동’이 남았을 뿐이니까.
거듭 말한다. 캐릭터를 규정하는 것은 말이 아닌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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