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이 나갔다’는 표현이 장애인 비하 표현?
만화엔 여러 장르적 특성이 있다. 일테면 컷과 컷 사이의 여백을 읽어내야 하는 호흡도 필요하고 특유의 과장된 표현에도 익숙해야 한다. 따지고 보면, 만화를 보는 것에도 일종의 학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만화 ‘심술통’으로 유명한 이정문 선생님이 1965년에 그린 2000년대 사회상은 당시 허무맹랑한 ‘상상’의 소산이었지만 50여년이 지난 2024년 현재 휴대폰이랄지, 전기차랄지, 로봇청소기랄지 대부분 실생활에서 자연스레 향유하고 있는 기술들이다. ‘상상의 힘’은 만화의 대표적인 영역이다.
‘과장’ 또한 그렇다. ‘만찢남’, ‘만찢녀’는 만화를 찢고 나온 남성 또는 여성, 즉, 비현실적으로 뛰어난 외모의 인물을 가리킨다. ‘들장미소녀 캔디’가 현실에서 존한다고 상상해 보라. 얼굴 면적의 절반이 안구인 사람을 마주치면 비명부터 지르지 않겠는가. 그냥 비명만 지르는 게 아니다. 눈알이 튀어나오고 턱이 빠지기 마련이다. 과장을 통해 상상을 극한까지 몰아세우는 것이다.
만화가는 ‘만화 같다’는 말에 상처받지 않는다
‘상상’과 ‘과장’, 만화의 이런 대표적인 특질들 때문에 웬만해선 현실에서 쉽게 일어나기 어려운 상황이나 믿기지 않는 묘사를 두고 흔히 관용적 표현으로 ‘만화 같다’고 한다. ‘빨간 빤스’에 망토를 두르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초능력자 캐릭터가 만화에서 탄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단언컨대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만화 같은 일”이라는 관용적 표현에 상처받을 만화가는 없다. 심지어 초현실적인 상상을 업으로 삼는다는 사실에 묘한 자부심까지 가질테다.
하지만 흔한 관용구에 상처받는 이들도 있다. 2020년 7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아들의 군 휴가 미복귀 의혹과 법무차관의 대가성 인사 의혹을 연결지은 미래통합당 윤한홍 의원 질의에 당시 추미애 법무부장관은 “소설을 쓰시네요. 질문도 질문 같은 걸 하세요”라며 반발했다가 한국소설가협회로부터 소설을 단순히 거짓말 따위로 폄훼했다며 공개사과를 요구받은 바 있다.
한국소설가협회는 성명서를 통해 “거짓말은 상대방에게 ‘가짜를 진짜라고 믿게끔 속이는’ 행위다. 소설에서의 허구는 거짓말과 다르다. 소설은 '지어낸 이야기'라는 걸 상대방(독자)이 이미 알고 있으며, 이런 독자에게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일어날 수 있을 법한 이야기'로 믿게끔 창작해 낸 예술 작품”이라며 추미애 장관의 발언을 “소설가들의 인격을 짓밟는 행위”라 규정했다.
물론 ‘소설 쓴다’는 문장 자체는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관용어구지만, 발언의 맥락상 추미애 장관이 ‘거짓말’과 ‘창작적 허구’를 구분치 않아 소설가들이 자괴감을 느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왜 소설가, 삼천포 시민, 광부들은 열 받았을까?
추미애 장관이 당시 미래통합당 윤한홍 의원이 제기한 의혹을 두고 ‘지어낸 이야기임을 알면서도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일어날 수 있을 법한 이야기로 믿게끔 창작해 낸 예술적 주장’이라 여겨 ‘소설’이라 칭했을 수도 있겠지만, 소설가들이 상처받고 자괴감까지 느꼈다니 존중해야 하지 않겠나.
그러고 보니 ‘삼천포’도 떠오른다. 제대로 가던 일이 엉뚱하게 흐르거나 그르치게 됐을 때 쓰는 ‘삼천포로 빠진다’는 관용구도 삼천포(현재 삼천포시와 사천군이 통합한 사천시) 지역민들의 반발로 화제가 된 바 있다.
‘막장’은 또 어떤가. 2009년 3월 당시 조관일 대한석탄공사 사장은 언론사에 보낸 ‘막장은 희망입니다’라는 글을 통해 “광산에서 제일 안쪽에 있는 지하의 끝부분을 뜻하는 ‘막장’이라는 말이 최근 좋지 않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숭고한 산업현장이자 진지한 삶의 터전”이라며 함부로 사용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한 바 있다.
7월 4일 열린 국회 본회의 대정부질의 과정에서 더불어민주당 김병주 의원이 국민의힘 대변인 명의의 논평에 등장한 ‘한미일 동맹’ 표현을 문제 삼으며 “정신 나간 국민의힘 국회의원들”이란 표현을 써서 국회가 파행되는 일이 있었다. 이후 국민의힘은 본회의 뿐만 아니라 국방위까지 취소하며 김병주 의원의 사과를 요구했다.
또한 장애인인 국민의힘 김예지 의원과 최보윤 의원 또한 “‘정신 나갔다’는 표현은 정신장애인 비하 표현”이라며 당사자성 발언으로 비판 여론에 힘을 실었다.
일본과 ‘동맹’ 운운하는 집권여당은 정신줄 놓은 것이 맞다
시민사회가 성숙하고 인권개념이 발전하면서 ‘외눈박이’, ‘절름발이’, ‘난쟁이’ 같은 용어가 사라지고 있는 마당에 장애인 비하 표현은 안될 말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미친 XX’ 따위 표현이면 십분 이해가 갈지언정 ‘정신이 오락가락한다’거나 ‘정신이 나갔다’는 표현이 어째서 장애인 비하 표현인지 나로선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듣는 동료 의원들이 기분 나쁘다니 김병주 의원이 언행이 마냥 좋았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겠다.
다만, 공당으로서, 군소정당이라도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겠거니와, 하물며 집권여당에서 과거사는 둘째치고라도 현재 시점에서조차 호시탐탐 대한민국 영토를 집적대는 일본과의 군사적 ‘동맹’을 운운한 사실은 ‘정신줄을 놨다’거나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표현 이외에 그 어떤 적절한 표현이 맞춤한지 도통 모르겠다.
‘달을 가리키니 손가락만 본다’는 흔해 빠진 관용어구를 떠올리지 않을 재간이 없을만큼 채 해병 특검법 상정을 막고 보자는 국민의힘의 얄팍한 속내가 빤히 보이지만, 사실 그보다는 앞서 나열한 사례들처럼 차별과 혐오, 비하 등에 우리 사회가 나날이 민감해져가는 것은 또 그 나름 좋은 일 아닌가 여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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