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정부 각료들 그런 BBC 일제히 비난하자
“우린 사실만 전한다…판단은 시청자의 몫"
"나치도 ‘적’이라 했지만 ‘사악하다’고 하지 않았다"
"그게 세계 5억 시청자가 BBC를 신뢰하는 이유다"
세계에서 가장 공정하고 영향력 있는 방송사 중의 하나로 알려진 BBC(British Broadcasting Corporation, 영국방송공사)가 최근 이스라엘에 잔혹한 기습공격을 가한 이슬람 무장조직 하마스를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부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총리를 비롯한 영국 정부 각료들로부터 일제히 비판을 받고 있다.
BBC는 이에 대해 “그것은 그들의 주장일 뿐”이라며, “우리는 어느 한 편을 들지 않는다”, “BBC는 창립 때부터 지켜 온 그런 원칙을 고수할 것”이라고 당당하게 맞받았다.
영국정부 각료들 일제히 BBC 비판
리시 수낵 총리는 지난 9일 “애매모호하게 할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표현으로 불러야 한다”며 BBC를 비난했다. 외무장관 제임스 클레벌리와 국방장관 그랜트 샵스, 문화장관 루시 프레이저도 테러리스트라는 말을 쓰지 않는 BBC를 비판하며 정책을 바꾸라고 촉구했다. 샵스는 BBC가 하마스를 테러리스트로 부르지 않고, “언제나 양면이 있다고 얘기한다”며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야당인 노동당 당수 키어 스타머까지 나서서 “‘테러리즘’ ‘테러리스트’는 분명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이라며 BBC에게 그런 말을 쓰지 않는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테러리스트라는 말은 어느 한 편을 들겠다는 것”
이에 대해 지난 50년 간 중동지역 사태를 취해, 보도해 온 BBC 존 심슨 세계문제 편집자(World Affairs editor)가 11일 X(트위터)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영국 정치인들은 BBC가 왜 '테러리스트'라는 단어를 피하는지 잘 알고 있으며, 지난 세월 많은 이들이 개인적으로 이에 동의했다. 누군가를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 것은 당신이 한쪽 편을 들고 상황을 공정하게 대하는 것을 그만두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BBC의 임무는 청중에게 사실을 제시해서, 호언장담 하지 않고 정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국과 전 세계에서 거의 5억 명의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듣고, 읽는 이유다. 우리가 호언장담을 해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항상 있다. 미안하지만, 그건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
나치도 ‘적’이라 했지만 ‘사악하다’고 하진 않았다
심슨은 또 이날 BBC에 이 문제와 관련한 자신과 BBC의 입장을 더 분명하고 자세하게 밝히는 글을 기고했다.
“BBC는 왜 하마스 무장세력을 '테러리스트'라고 부르지 않는가”라는 제목이 달린 이 글에서, 그는 그 이유를 BBC 창립 때 천명한 원칙으로 거슬러 올라가 찾을 수 있다면서 X에 올린 것과 같은 논지의 글을 더 자세하게 피력했다.
그는 BBC가 테러리스트, 테러리즘이라는 말을 쓰는 게스트나 기고자들을 인터뷰하고 인용도 하지만 그것을 BBC의 입장으로 전달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우리의 목소리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임무는 청중에게 사실을 제시하고 그들이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의 나치를 ‘적’이라고 불렀지만, 그들이 “악하다”거나 “사악하다”는 말을 쓰진 않았으며, 그것은 BBC가 방송인들에게 명시적으로 내린 지시사항이었다고 했다. 그는 마거릿 대처 총리 암살 폭탄공격까지 벌인 IRA(아일랜드 공화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면서 그런 높은 객관적 기준을 지킨 것이 지금의 BBC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BBC의 편집정책 및 표준 담당국장 데이비드 조던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청중이 우리가 제공하는 정보를 신뢰하고, BBC가 갈등의 한쪽 편에서 다른 쪽에 반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며, 우리 저널리즘이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도 계속 사실에 입각하고 정확하며 공정하고 진실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려 한다."
존 심슨 에디터가 BBC에 기고한 글의 전문을 번역해서 싣는다.
BBC는 왜 하마스 무장세력을 '테러리스트'라고 부르지 않는가
정부의 장관, 신문 칼럼니스트, 일반 사람들 모두 왜 BBC가 남부 이스라엘에서 끔찍한 잔혹 행위를 자행한 하마스 무장괴한들을 테러리스트라고 하지 않는지 묻고 있다.
그 대답은 바로 BBC의 창립 원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테러리즘은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비난받는 집단에 대해 사용하는 말이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들에게 누구를 지지하고 누구를 비난해야 하는지, 누가 좋은 사람이고 누가 나쁜 사람인지 알려주는 것은 BBC의 책무가 아니다.
우리는 영국과 다른 정부들이 하마스를 테러 조직으로 비난했다는 사실을 자주 지적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말이다. 우리는 또 하마스를 테러리스트로 묘사하는 게스트들과 기고자들을 인터뷰하고 인용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우리의 목소리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임무는 청중에게 사실을 제시하고 그들이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테러리스트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를 공격한 사람들 중 다수는 우리의 사진을 보고, 오디오를 듣고, 이야기를 읽고, 우리의 보도를 토대로 결정을 내리면서,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진실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얘기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우리가 본 것과 같은 일에 대해 경악할 것이다. 그 사건들을 "잔혹행위"라고 부르는 것은 전적으로 합당하다. 실제로 바로 그랬으니까.
민간인, 특히 어린이, 심지어 유아들의 살해를 옹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음악 축제에 참석한 무고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공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지난 50년 동안 중동지역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취재하면서 이번에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공격의 여파를 직접 목격해 왔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레바논과 가자의 민간 목표물들에 대해 감행한 폭격과 포격의 여파도 지켜봤다. 그런 일에 대한 공포는 영원히 당신의 마음 속에 남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지지자들이 저지른 테러 때문에 우리가 그 조직을 테러 조직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걸 의미하진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객관성을 유지해야 할 의무를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BBC에서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BBC 방송인들은 나치를 "적"이라고 부를 수 있었고 또 불렀을지언정 나치를 악하다거나 사악하다고 부르지 말라는 지시를 명시적으로 받았다.
BBC 문서는 이와 관련해 "무엇보다도 호언장담할 여지를 줘서는 안 된다"고 했다. 우리의 톤은 차분하고 아주 침착해야 했다.
IRA(아일랜드 공화군. 독립파 무장조직)가 영국을 폭격하고 무고한 민간인을 살해했을 때 그 원칙을 유지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우리는 그렇게 했다. 이와 관련해 마거릿 대처 정부는 BBC와 나와 같은 기자들에게 엄청난 압력을 가했다. 특히 그녀는 가까스로 죽음을 피했지만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죽거나 다친 브라이튼 폭탄공격(1984년 IRA가 브라이튼의 그랜드 호텔에 시한폭탄을 설치해 대처 총리를 암살하려 한 사건) 이후 그러했다.
하지만 우리는 기존 원칙을 고수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
우리는 어느 편도 들지 않는다. 우리는 "사악하다"거나 "비겁하다"와 같은 함축적인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테러리스트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만 이 원칙을 지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언론사들 중에도 우리와 똑같은 정책을 지닌 곳들이 있다.
그러나 BBC가 특별한 관심을 받는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정치와 언론에서 강한 비판을 받고 있기 때문이고, 또 부분적으로는 당연하게도 BBC가 특히 높은 기준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높은 기준을 유지하는 것은 가능한 한 객관적이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영국과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매일 말하는 것을 보고, 읽고, 듣는 이유다.
관련기사
개의 댓글
댓글 정렬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