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문가들, 대미 자율성 강화한 '중간국 외교' 제안
'대만 독립 반대' 등 기시다에 '현실적 대중 접근' 권고
소에야 "중국 주도 국제시스템은 비현실적 시나리오"
중국 "합리적‧실용적 목소리"…일본 변화엔 회의적
일본의 외교정책이 지나치게 미국에 초점을 맞추고 중국의 위협은 과장하고 있다면서 기시다 후미오 정부가 더욱 현실적인 접근법을 취해야 한다는 일본 문제 전문가들의 제언이 나왔다.
소에야 요시히데 일본 게이오대 명예교수와 마이크 모치즈키 미국 조지워싱턴대 국제관계대학원(엘리엇 스쿨) 석좌교수가 이끄는 일본 문제 전문가 그룹이 25일 도쿄 외신기자클럽에서 간담회를 갖고 이런 내용을 담은 '갈림길에 선 아시아의 미래: 평화와 지속가능한 번영을 위한 일본의 전략'이란 제목의 보고서를 공개했다고 닛케이 아시아가 보도했다.
보고서에서 이들 전문가는 일본은 미국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지 말고 건설적 외교를 통해 미‧중 경쟁을 완화하기 위해 지역 전반에 걸친 '중간국들(middle powers)의 동맹'을 만들어야 하며, 그렇게 해서 역내에서 강대국 간 전쟁 위험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 무비판적 대미 추종…아시아와 일본에 비극 될 것"
그렇지 않고 현재의 패러다임을 고집한다면 이 지역(아시아‧태평양)은 장래에 혼돈과 분열을 겪게 될 것이며, "아시아, 특히 일본에 비극"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핵 오염수 해상 투기 계획 강행 움직임에서 일본의 대중 첨단 반도체 장비 수출통제, 그리고 일본 방위성 부상의 '유사시 대만 지원' 발언에 이르기까지 중‧일 갈등이 전방위로 확산되는 가운데 이같이 '현실적 접근'을 권고한 보고서가 나와 주목된다.
닛케이 보도에 따르면, 보고서는 대중 정책과 관련해 15가지 권고사항을 내놨다. 우선 중국이 영토 주권 차원에서 "핵심 이익 중 핵심"으로 여기는 대만 문제에 대해선 일본이 '대만 독립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확하게 표명할 것을 주문했다. 또한 영유권 분쟁 대상인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와 관련해서도 양국 간 '문제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고도 했다.
권고사항 중에는 또한 일본이 스리랑카 부채 구조조정 기구에 중국이 참여할 수 있도록 북돋워 주는 한편, 자유무역 확대를 지향하는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에 중국과 대만의 동시 가입을 허용하는 방안도 제시됐다.
'대만 독립 반대' 등 기시다에 '현실적 대중 접근' 권고
쉽지는 않지만 동시 가입이 성사되면 CPTPP는 중국과 대만 정부 관리들이 공식 참여하는 하나의 무대가 될 수 있는 데다가, 국영기업에 대한 중국 정부의 보조금 지급을 제한하고 중국 경제의 투명성을 높이며 인센티브를 제공해 경제 개혁을 유도하는 장점이 있다고 지적됐다.
중국과 대만의 CPTPP 동시 가입 아이디어에 대해 조지워싱턴대 국제관계대학원의 아시자와 쿠니코 박사는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좀더 안정적이고 토의와 협력에 더 이바지하게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소에야 명예교수의 지론인 '일본의 중간국 외교'는 미국과 긴밀하되 미국에만 의존하지 않는 보다 자율적 외교정책을 뜻한다. 이런 맥락에서 일본이 한국과 호주, 뉴질랜드, 인도,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협력 관계를 심화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 인도, 호주의 4자 안보협의체인 '쿼드'(Quad)가 중간국 외교의 기반이 될 수 있지만 여기서도 다른 접근법을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의 틀에선 쿼드는 미‧일 동맹 주도에 호주와 인도를 더한 걸로 인식되지만, 중간국 접근법을 택하면 쿼드는 일본과 호주, 인도주도에 미국을 더한 것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 세 나라가 어젠다 세팅을 주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언인 셈이다. 그는 "쿼드가 그런 식으로 재개념화된다면, 한국을 초청하는 것도 마땅하다고 여겨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소에야 "중국 주도 국제시스템은 비현실적 시나리오"
닛케이에 따르면, 현재 기시다 정부는 규범에 기초한 국제 질서를 수호하고 힘이나 강압에 의해 현상 변경을 시도하려는 어떠한 일방적 시도도 반대하고 있다. 당연히 중국을 겨냥한 정책이다.
일본은 중국이 중국공산당이 원하는 새로운 국제 질서를 구축하려는 것을 경계하고, 역내 국가들이 점점 더 중국의 영향권으로 들어갈 것을 우려하고 있다.
그러나 소에야 명예교수는 중국 주도의 국제시스템은 비현실적 시나리오라고 일축했다. 그는 "중국 중심의 지역 및 국제 질서에 행복해할 나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글로벌 사우스(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동, 중남미의 개도국, 저소득국) 나라들이 미국 주도 질서에 비판적이라해도 중국 체제가 그들에게 어필한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라고 말했다.
모치즈키 교수도 국제 정치학은 '절충'에 관한 것이라면서 "우리는 '우리의 룰이 다른 쪽의 룰을 이겼다'고 말하는 것보다 결과를 얻는데 훨씬 더 관심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 "합리적‧실용적 목소리"…일본 변화엔 회의적
일본의 전략적 자율성을 주문한 보고서에 대한 중국의 반응은 곧바로 나왔다. 중국 당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관영 글로벌타임스의 26일 논평을 통해서였다. 중‧일 갈등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비교적 합리적 제안을 했다고 평가하면서도 일본 정부의 변화에는 회의적 시각을 보였다.
신문은 "그런 목소리가 일본에서 나온 것은 미국과 긴밀하게 보조를 맞추고 일본의 전략적 자율성은 해치는 기시다 정부의 현 외교정책에 대한 우려와 불만족이 커지고 있음을 반영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관건은 일본 전문가들이 제기한 합리적이고 실용적 목소리가 일본 정치인들 사이에서 정치적 컨센서스를 얻거나 집권당에서 채택될지이고, 채택된다면 어느 정도가 될 것인지"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글로벌타임스는 일본의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점을 거론했다. 기시다 총리가 지난주 중‧일 관계는 현상 유지를 하고 있다면서도 중국은 최대 교역국이고 양국 관계는 분리할 수 없다고 말한 일본 언론의 보도를 인용한 뒤, 현재의 중국을 향한 도발적 자세를 고려하면 그의 발언의 신뢰성에 상당한 의문이 든다고 주장했다.
우호적인 메시지를 내놓고는 얼마 지나지도 않아 중국에 대한 적대적인 조치들을 실행에 옮기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에서다.
신문은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일본이 미국의 대중 봉쇄 전략에 너무 공격적으로 앞장서지 않도록 중‧일 관계를 관리하는 것"이라며 "일본에 과도한 미국 편향을 중지하고 중국 위협을 과장하지 말라고 촉구하는 목소리가 나온 것은 좋은 신호"라고 덧붙였다.
기시다 정부가 무비판적으로 미국을 추종하고 중국의 위협을 과장함으로써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미‧중 간 전쟁 위험성을 높일 수 있다는 일본 문제 전문가들의 경고는 동맹인 미국만 ‘맹신’하며 반중국 포위 전선에 앞장서 온 윤석열 정부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경고다.
관련기사
개의 댓글
댓글 정렬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