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청하면 수리해야 하는 공무원이 반헌법적 결정"
채무자 대신해 변제공탁할 자격도, 이유도 없는데
공탁 공무원을 판단·결정 못하는 기계적 존재로 폄하
'공탁 불수리' 확정되면 일본 기업 강제집행 가능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4일 광주지방법원이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하 '재단')의 공탁 신청에 대해 '불수리(수리하지 않음)' 결정을 내린 데 대해 대해 외교부는 대변인을 통해 입장을 내놨다. 이 입장문은 두 가지 점에서 대단히 이례적이고 놀랍다.
첫 번째는 법원의 결정에 대한 정부의 입장으로서, 특히 '외교적 수사'에 익숙한 외교부의 입장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과격한 표현으로 일관돼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내용 하나하나가 모두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주장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우선 외교부 입장문 전문을 살펴보자.
광주지방법원 소속 공탁 공무원이 1건의 공탁에 대하여 '불수리' 결정을 하였고, 저희 정부는 강한 유감을 표합니다.
공탁 제도는 공탁 공무원의 형식적 심사권이나 공탁 사무의 기계적 처리, 형식적인 처리를 전제로 하여 운영된다는 것이 확립된 대법원 판결입니다. 공탁 공무원이 형식상 요건을 완전히 갖춘 공탁 신청에 대해 제3자 변제에 대한 법리를 제시하며 불수리 결정을 한 것은 공탁 공무원의 권한 범위를 벗어난 것이고, 헌법상 보장된 '법관으로부터 재판 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것입니다. 이는 유례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정부는 이미 면밀한 법적 검토를 거친 바 있고, 이번 불수리 결정을 법리상 승복하기 어렵습니다. 이에 즉시 이의절차에 착수하여 법원의 올바른 판단을 구할 것이며, 또한 피해자의 원활한 피해 회복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공탁 공무원, 신청하면 수리하는 기계적 존재"
한 마디로 "광주지방법원의 공탁 공무원이 공탁 신청을 수리하지 않은 것은 권한을 벗어나는 부당하고 유례도 없는 반헌법적 결정"이라는 얘기다.
"강한 유감을 표한다" 정도는 할 수 있는 얘기라고 해도 "공탁제도에 있어서 공탁공무원은 형식적이고 기계적으로 신청을 수리해야 하므로 불수리 결정은 권한을 넘어선 것"이라는 말은 공탁 공무원을 어떠한 판단과 결정도 할 수 없는 기계적 존재로 폄하하는 발언이다. 공탁 공무원은 공탁 신청이 법적 요건에 맞는지 판단하여 수리 여부를 결정해야 할 권한과 의무가 주어져 있다.
"헌법상 보장된 '법관으로부터 재판 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말은 신청인인 재단의 헌법적 권리가 침해됐다는 것으로 공탁 공무원이 자그마치 헌법에 위배되는 반헌법적 결정을 내렸다는 말이 된다. 아무리 불수리 결정이 불만스럽다고 해도 헌법을 끌어들일 일은 결코 아니다.
또한 "재판 받을 권리 침해" 부분은 그 자체로 허무한 주장이다. 외교부 대변인은 곧이어 "즉시 이의절차에 착수하여 법원의 올바른 판단을 구할 것"이라고 했다. 공탁이 불수리되면 이의신청을 하고, 법원이 그걸 기각하면 항고와 재항고를 거쳐 대법원에서 최종적인 심리를 받게 된다. 외교부는 이러한 절차를 통해 법원의 판단을 받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법관으로부터 재판 받을 권리'가 침해되기는커녕 충실한 이행이 보장되어 있음을 외교부 스스로 얘기하는 것이다.
'공탁 공무원의 처분'에 대한 너무도 명확한 판례
그 뒤에 이어지는 "이는 유례없는 일이기도 하다"는 부분은 가장 말이 안 되는 주장이면서, 역으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공탁 공무원의 공탁 불수리에 대해서는 너무나 명확한 판례가 있다. 대법원의 2009년 5월 28일자 판례(2008마109)로 제목 자체가 '공탁 공무원의 처분에 대한 이의'다.
이번 경우처럼 공탁 신청에 대해 공탁 공무원이 불수리 결정하자 이의 신청 후 항고와 재항고를 거쳐 대법원의 판단이 내려진 사건이었다. 외교부가 이의 신청을 하고 대법까지 끌고갈 생각이라면 이 건과 정확하게 일치하게 되는 판례다.
이 판례의 내용은 "변제할 정당한 이익이 있는 자는 채무자를 대신하여 변제할 수 있는데, 이 사건의 경우 신청인은 변제로 얻게될 이익이 없어 채무자를 대신하여 변제할 수 있는 경우에 해당되지 않으므로 공탁 공무원이 변제공탁을 수리하지 않은 결정은 정당하다"는 판단이다.
'변제할 정당한 이익'이란 예를 들어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채무를 변제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게되는 사람의 경우 채무자를 대신해 채권자에게 변제를 해줌으로써 그 불이익에서 벗어나는 경우를 말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연대보증이다. 보증인의 경우 채무자가 채무를 갚지 못하면 집이 날아가 버린다거나 보증채무로 인해 정상적인 경제생활을 할 수 없는 위험에 처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우선 대신 빚을 갚아주고 그런 위험에서 벗어난 뒤 원래 채무자에게 천천히 돌려받는 방법을 취할 수 있다.
그럴 때 만약 채권자가 어떤 이유로 변제받는 것을 거부하거나 당장 변제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변제금을 법원에 공탁해 채무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이런 경우 공탁 공무원은 정당하고 합당한 공탁 신청이므로 공탁 신청을 수리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는 너무도 당연하게 수리하지 말아야 한다.
'공탁 불수리' 확정되면 일본 기업 강제집행 가능
그런데 재단은 변제를 통해 얻게 될 이익, 즉 변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입게 될 불이익이라는 것이 없다. 이때의 불이익이란 보증인의 경우처럼 집이 날아가거나 평생을 신용불량자로 살아야 하는 그런 유형의 '법률적 불이익'이어야 한다.
배상금이 지급되지 않는다고 해서 재단의 재산이 압류되어 날아가버리는 것도 아니다. 재단에 어떤 법적인 채무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대통령이 화가 나서 재단이 곤란한 입장에 처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것 정도는 여기서 말하는 '법률적 불이익'에 해당하지 않는다.
따라서 징용 피해자들이 변제받는 것을 거부할 경우 재단은 더 이상 "일본기업 대신 변제하겠다"고 나설 법적 자격이 없게 되므로 공탁도 불가능해진다. 이러한 판례와 법리에 따라 3일 광주지방법원은 2건 중 1건에 대해 불수리 결정을 내린 데 이어, 5일에는 수원지방법원이 두 명의 배상금 공탁 신청에 대해 불수리 결정했다.
앞으로의 절차를 통해 대법에서까지 '불수리 결정'이 타당하다고 확인될 경우 재단의 배상금 수령을 거부한 피해자와 가족들은 현재 진행 중인 배상금에 대한 강제집행을 속행해 현재 압류한 일본기업의 재산으로 변제를 강제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제3자 변제'와 '공탁'을 통해 피고인 일본 기업의 국내 자산 현금화와 관련한 법원의 절차를 중단시키고, 2018년 대법원 확정판결을 지워버린 채 일본 기업의 책임을 면제해주려던 윤석열 정부의 의도는 완전한 실행이 불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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