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고진 벨라루스행 중재, 사태 일단락
‘푸틴의 요리사’였던 예브게니 프리고진
음식산업으로 신흥재벌돼 바그너 결성
바흐무트 등 주요전투 주력부대로 분전
정규군과 차별하는 러군 지도부와 알력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정세 전환 고비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러시아 군에 반기를 든 ‘바그너 그룹’의 예브게니 프리고진은 ‘푸틴의 요리장’이라 불릴 정도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가까웠던 사람이다. 음식사업으로 성공해 ‘올리가르히’(신흥 재벌) 반열에 올랐다.
흔히 ‘용병’으로 불리는 민간군사회사(PMC) 바그너(Wagner) 그룹은 프리고진이 지난해 9월, 자신이 2014년에 창설했다고 공언했다. 2014년이면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점령한 해다. 그때 친러시아파가 우크라이나 동부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하면서 불거진 분쟁 때 와그너 그룹이 만들어졌다. 신흥재벌 프리고진의 돈이 그들을 하나로 엮었을 것이다.
주요 전투 주력부대 바그너
지난해 2월 러시아군 침공 때도 정규군과 함께 활동했고, 이후 주요 전투에서 주력부대로 싸웠다. 그 바람에 많은 희생자를 냈다. 올해 2월에 미국 정부는 바그너 전투원 사상자가 3만명 이상, 사망자만 9천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산하면서, 사망자의 대부분이 교도소 수감 중에 계약을 맺고 전선에 투입된 수형자 출신일 것으로 봤다. 1년여의 공방 끝에 지난달 러시아군이 점령한 도네츠크 주의 바흐무트 전투 때도 바그너 그룹이 주력부대로 싸웠고 엄청난 사상자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바그너 그룹의 이번 ‘봉기’도 이런 큰 희생과 함께 러시아 정규군의 턱없이 부족한 탄약 지원 등에 대한 불만, 군 지휘권 통합 움직임에 대한 불안 등이 배경에 깔려 있다는 지적들이 나오고 있다.
소련 비밀경찰 유전자 지닌 민간군사회사(PMC)
바그너 그룹은 이른바 민간군사회사(Private Military Companies, PMC) 또는 민간군사보안회사(Private Military and Security Companies, PMSC)로 불리는 용병집단 중의 하나다. 바그너 그룹은 우크라이나 외에도 시리아, 리비아 내전,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등 정규군이 직접 관여하기에는 곤란한 지역에 전투원이나 군사교련 교관으로 파견돼 러시아 정부 이익의 유지, 확대에 이용돼 왔다. ‘그림자 러시아군’ 역할을 한 것이다.
바그너 그룹은 ‘베체카(전러시아 비상위원회)’ ‘체카’(반혁명 저지 국가특수위원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소련 비밀경찰의 전통과 맥이 닿아 있다. 그 유전자는 소련 시절의 국가보안위원회(KGB)에 계승됐고, 소련 붕괴로 KGB가 폐지된 뒤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으로 이어졌으며, 러시아의 PMC에도 그 유전자가 들어 있다.
KGB의 적자라고 할 수 있는 푸틴은 그 유전자를 계승한 바그너 그룹을 자신의 권력유지에 잘 활용하다 자칫 그 때문에 결정타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 역설적인 상황이다.
소련 붕괴 뒤 대량실직 병사들 PMC로
소련 붕괴 뒤 러시아연방에 남은 군인은 100만 명 남짓이었고, 약 300만 명의 장병들이 군병력 삭감으로 실직했다. 그들 중 일부가 스포츠클럽 등을 통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뭉치면서 마피아화했다. 특히 KGB 산하 특수부대(스페츠나츠)였던 알파 그룹, 베가 그룹 등이 러시아연방으로 이행한 뒤 FSB나 내무부에 근무하다 돈많은 은행, 석유가스회사 등의 안전보장담당 간부(경호원)로 전출했다. 가스프롬의 경우 1993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 개인 경호대장 블라디미르 메드베데프 소장 등을 초빙해 보안국을 설치했는데, 2007년에 가스프롬 보안부대가 2만명을 헤아렸고 자체 무장도 허용됐다.
그들 스페츠나츠나 군사첩보 업무에 관여한 이들이 바그너 그룹의 전신인 안티테러 오렐(Anti-Terro Orel) 그룹을 설립했다. ATK그룹, 센터R, ENOT, RSB 그룹 등도 와그너와 유사한 경로를 거친 용병집단들이다.(시오바라 도시히코 고치대학 교수, <론자(論座)> 6월 1일)
이들 집단은 모두 비합법 조직이다. 규제법안을 만들었으나 통과되지 못했고, 이들의 지위는 애매한 채 방치됐다. 이것이 푸틴에게는 그들을 활용하기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정규군보다 바그너 그룹에 대한 의존율을 점차 높여간 것으로 미국 등 외부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미국 국가안보회의(NSC)의 커비 전략소통담당 조정관에 따르면 바그너는 지난해 말 용병 1만명과 교도소 수감자(수형자) 4만명 등 총 5만 명의 병력을 거느렸으며, 때로는 러시아 정규군을 지휘하기도 했다.
지원병 돌격부대 바그너
우크라이나 침공 뒤 러시아는 정규군과는 별도로 지원병 부대를 크게 늘렸다. 러시아는 정규군 동원의 부담을 줄이면서 병력 수를 늘리기 위해 중범죄자가 아니면 교도소 수감자도 정규군으로 계약할 수 있게 하는 규칙 개정을 논의하고 있었고, 이미 교도소에서 정규군 병사를 모집하기 시작했다는 얘기들도 흘러 나왔다. 러시아 국방부에 따르면 지원병 부대 수가 약 40개나 됐다. 러시아 국방부는 바그너 그룹을 “지원병 돌격부대”로 불렀다.
7월 1일까지 군과 계약체결 명령
6월 10일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이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크게 늘어난 지원병 부대에 대해 7월 1일까지 러시아군과 계약을 맺으라는 명을 내렸다. 여기에는 바그너 그룹 창설자 프리고진과 국방부의 대립이 그 배경으로 깔려 있다는 지적이 있다. 국방장관의 명령은 지원병 부대에 법적인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포괄적인 지원 및 임무 수행을 일원화하기 위해서였다. 달리 말하면 바그너 그룹의 프리고진과 러시아군 지도부 사이에 대립이 벌어졌고, 쇼이구 등 러시아군 지도부가 바그너 등 지원부대를 단일한 정규군 지휘 아래 통합함으로써 프리고진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7월 1일까지 계약을 완료하라고 명한 것이다.
프리고진은 자신이 올리가르히의 일원이 됐지만 푸틴의 측근으로서는 이례적이라고 할 정도로 올리가르히 등 엘리트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전장에서의 실적과 푸틴의 지지를 배경으로 프리고진은 자신들이 전장에서 피흘리며 고생하고 있을 때 엘리트들은 쾌적한 생활을 보냈고, 그들의 자식들은 결코 군에 동원되지 않는다고 대놓고 비난했다. 전장에서 실패를 거듭한 군 사령관을 “맨발로 전선에 보내라”고 쏘아붙이기도 했다. 바흐무트 공방 때 프리고진은 러시아군이 바그너 그룹에게 필요한 탄약의 10%밖에 보내주지 않았다고 맹비난했다.
기로에 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프리고진이 군에 반기를 든 것은 이처럼 러시아군 지도부와의 알력, 더 직접적으로는 자신을 밀어내기 위한 것이라고 본 계약 명령에 대한 거부가 그 계기로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총반격에 나선 우크라이나의 공세도 부담이 됐을까. 그가 러시아군 사망자가 러시아 쪽이 밝힌 것의 3, 4배라고 하고, 우크라이나 침공 이유를 우크라이나와 나토의 러시아 위협 때문이라고 한 푸틴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은 그의 불만과 거부가 단지 러시아군 지도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것조차 군 지도부가 푸틴에게 거짓말하고 속인 결과라며 군 지도부 탓으로 돌려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은 듯도 하지만, 이번 '거사'가 단순한 불만 차원이 아니라 전면적인 권력투쟁이라도 벌이려 한 것일까.
이날 밤 프리고진이 벨라루스의 알렉산더 루카셴코 대통령의 중재로 '정의의 행진'이라 주장한 무장봉기를 중단하고 벨라루스로 피신하기로 함으로써 사태는 일단락되는 듯 보인다. 크렘린의 드미트리 페스코프 대변인은 푸틴도 이 방안에 동의했다면서, 반란에 가담한 전투원들이 본래 업무에 복귀할 경우 처벌받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바그너 그룹은 점령했던 러시아 남부 로스토프의 군 사령부를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더 지켜봐야겠지만, 프리고진의 진짜 의도가 어떻든, 그의 ‘봉기’가 어떤 결말을 맺든, 이 뜻밖의 사태전개로 러시아 정세와 우크라이나 전쟁 판세가 크게 흔들리면서 새로운 고비를 맞게 될 것으로 보인다.
관련기사
개의 댓글
댓글 정렬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