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이사장 기고] 원폭의 진짜 희생자 추념이 세계평화의 원점
그것은 (윤석열 정부가 주장한) 과거냐 미래냐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가 만들려던 새로운 과거와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일파가 미화한 추악한 과거와의 싸움이었다. 그것은 지나간 과거의 문제가 아니었다. 해방 후 20년간의 방황 끝에 맺어진 ‘1965년 체제’였다.
과거와 과거, 평화노선과 전쟁노선의 싸움
그에 대한 불만에서 다시 25년간의 고투 끝에 김대중- 오부치의 한일 파트너선언에 도달했고, 그 선언에서 한국 식민통치가 부당하나 합법적이라고 한 한계를 넘어 그 후 20년간의 분투 끝에 한일 지식인 1000인의 한국병합조약 불법무효 공동성명이 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2012년과 2018년 대법원의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청구소송 재판에서 식민통치가 불법이었다는 판결이 나왔다. 그리고 2019년 3·1운동 100주년 한일 시민평화공동선언에서 식민통치의 불법성을 재확인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1965년의 청구권협정과 2018년 대법원 식민통치 불법판결은 제3의 절충안이 있을 수 없는 문제였다. 극우파의 보수적 농간 속에 청구권협약이 이루어졌고, 일본 파시즘 미화론자들이 일본 평화헌법의 개정을 추진하면서 미 군산복합체와 제휴했다. 이는 중·러·북과 제1차대전 전야와 같은 군사적 대결을 극대화하는 전쟁노선이다.
이에 대해 일본의 평화헌법 수호세력과 한국 시민사회가 연대하여, 일본 시민사회는 한국의 역사정의운동을 지원하고 한국 시민사회는 일본 시민의 평화헌법 수호를 지원해야 한다. 이는 시빌 아시아(Civil Asia)로 세계사에서 아시아시대를 준비하는 평화노선이다.
우리는 지금 이런 두 개의 미래가 충돌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
히로시마의 조선인 피폭자 위령비
윤–기시다 회담 중에 히로시마 평화공원에 있는 조선인(한국인) 위령비를 한일 두 정상이 공동참배하기로 합의한 것은 뜻밖의 사건이었다.
내가 1980년대에 일본의 대학 교수로 재직했을 때, 히로시마 평화공원과 얽힌 일들이 많았다. 1970년에 재일동포들이 2~3만 명의 조선인 피폭 희생자 위령비를 만들었으나, 공원 안에는 공간이 없다는 이유로 불허하여, 공원 바깥 강 기슭에 세웠다. 히로시마 평화공원을 참배하려 갔다가 공원 밖에서 차별받고 있는 조선인 피폭자 위령비를 보는 순간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당시 이 위령비를 공원 안으로 옮기는 문제가 이슈화되고 있었다. 당시 나는 위령비를 공원 안으로 옮기지 말자는 반대론을 폈다. 그 근거는 이랬다.
히로시마는 일본의 태평양전쟁 당시 핵심 군수기지로 민간인은 거대한 병영국가의 평복을 입은 군인이라 할 정도였다. 전쟁 도발의 핵심지에 원폭이 떨어졌으니 벌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희생된 조선인 피폭자는 거의가 징용자들이었고, 민간인들도 일본제국의 질서 속에서 사회경제적으로 강제된 이주자들이었다.
그들이야말로 일본 식민주의의 희생자이면서 원폭의 희생자들이었다. 죄없는 이중의 희생자들인 그들의 위령비야말로 초라한 묘역이지만 세계평화의 원점이었다. 당시 히로시마대학 평화연구소 또는 유엔 군축특별위원회 등이 주최한 심포지움에 자주 나가 일본인 피폭자의 전쟁책임과 한국인 피폭자를 차별하는 히로시마 평화공원의 위선을 비판했다.
그때 마침 나온 졸저 <동아시아 공업화와 세계자본주의>를 ‘세계평화의 원점에 바친다’며 헌정하기도 했다.
‘이중의 희생자’인 조선인 피폭자들이 새로운 핵군축의 원점
스웨덴의 노벨상수상 시인 하뤼 마르틴손은 핵 방사능에 녹아내리며 울부짖는 피폭자들이 고통 속에 뒤엉켜 있던 히로시마 현장에서 요란한 매미 울음소리를 듣고 생명의 존엄과 평화의 염원을 담아 ‘매미시’를 썼다. 그 뒤 매미상(스웨덴어로 Cikada상)이 제정되어 아시아의 시인 중 생명의 존엄을 읊은 시인에게 시상해 왔다. 나는 그와 관련한 <엔에이치케이(NHK)>의 특집방송을 보고 마르틴손재단에 편지를 보내 ‘전범이 평화의 심벌(상징)이 되고 가해자가 희생자가 되는 사기극을 옹호하는 데 매미가 동원돼, 진정한 희생자를 차별하는 매미가 돼서는 생명의 상징이 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1994년 황영조 선수가 히로시마 아시아경기대회 마라톤에서 우승한 뒤 인터뷰에서 “한국인 피폭자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나는 달렸다”고 했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바로 <한겨레신문> 칼럼에 “태극기 아니 만국기를 들고 곧바로 한국인 피폭자 위령비로 달려가 참배했으면” 하고 썼다.
그 뒤 1999년에 위령비는 히로시마 평화공원 안으로 옮겨졌다. 나는 공원의 일본인 희생자보다는 한국인 희생자의 위령비가 있기에 전체가 구원받고 있으며, 세계 반핵운동의 원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인 피폭자 위령비는 일본 피폭자와 연대하여 다시는 핵 피해가 없는 ‘노 모어 히로시마‘, 전범 피폭자들이 반성없이 평화의 상징이 되는 드라마를 중지하라는 의미의 ’노 모어 히로시마‘, 가해자가 피해자로 변신하는 드라마를 집어 치우라는 의미의 ’노 모어 히로시마‘라는 삼중의 의미를 지닌 ’노 모어 히로시마‘론을 꽤 오래 펴고 다녔다.
아울러 그 연장선에서 경남 합천의 2만 명이 넘는 원폭 부상자 치료 병원 일대를 세계평화공원으로 조성하는 구상을 했고, 동북아의 비핵지대화운동을 위해 그것이 헬싱키 프로세스(냉전을 극복해낸 유럽의 평화협력체제) 같은 합천 프로세스의 원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번 G7 정상회의에서 핵군축 비확산 공동문서 합의를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히로시마 G7 정상회의 대표와 한국 대통령의 합동 한국인 위령비 참배가 히로시마 평화공원 내의 한국인 희생자를 위문하는 추모의 차원을 넘어 세계 핵군축을 위해 새 출발을 하는 미래의 원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얼마 전 노벨 수상자 50명이 매년 2%씩 핵무기 군축을 해 가는 핵군축 5개년 계획을 세우고, 그렇게 해서 절약되는 돈을 기후변화와 코로나 팬데믹에 쓰라고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냈다. 이 새로운 대열에 히로시마 원폭의 진짜 희생자들을 앞세우기를, 시인 마르틴손의 매미와 함께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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