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이사장에게 듣는 '피해자 배상 문제'
정부발표는 사법부에 대한 행정부 쿠데타
아베의 우익 반동사관에 대한 역사적 굴종
일본-세계시민, 20-21세기 싸움에서 패배
제2 샌프란시스코 체제, 전쟁으로 가는 길
5천만의 '스마트 민들레 시민사회'가 희망
“3.1운동과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주장했고 우리 헌법에 반영된 일제 식민통치 불법론이 한일 지식인 공동선언-간 나오토 담화-대법원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로 결실된 공든 탑, 그것이 이번 정부의 조치로 와르르 무너진 꼴이 됐다. 이번 외교조치는 사법부에 대한 쿠데타이고 일본 아베 반동사관에 대한 역사적 굴종이며 한일 간 1965년 체제를 극복하려는 지난 반세기의 민주적 노력에 찬물을 끼앉는 것이자 한국 헌법정신의 추락사건이다.”
김영호 동북아평화센터 이사장(경북대 명예교수, 전 산업자원부 장관)에게 정부가 발표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문제 ‘해결책’에 대한 생각을 묻고 들었다. 동아시아 평화의 실현을 위해 수십 년간 이론과 실천 작업을 펼치면서 특히 시민 연대에 의한 시빌 아시아(Civil Asia)’를 꾸준히 모색하고 있는 김 이사장은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을 두고 벌어진 한일 간 싸움을 21세기 한국 대법원의 20세기적 구시대 일본과의 싸움이라며,
“그것을 한국과 일본 간 민족주의의 싸움으로 가져가지 말고 세계 민주주의, 인도주의와 구시대 식민주의와의 싸움, 세계 시민사회와 일본의 싸움, 일본의 보수반동과 세계시민 간의 싸움, 20세기와 21세기의 싸움 쪽으로 가져갔어야 했다”면서, 그러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 “해볼 만한 싸움이었는데, 과거회귀세력, 이른바 혐한세력에게 지고 말았다”며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김영호 이사장과의 인터뷰는 지난 9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 있는 ‘시민언론 민들레’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 한승동 에디터: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문제에 관한 우리 정부 발표와 관련해서 여러 가지 예측을 해 보셨을 것 같은데요. 예컨대 그 내용이 어느 선까지 갈까, 이런 정도 아니겠느냐는 식으로 말이지요. 그런데 막상 결과를 보니 어떤 느낌이 왔습니까? 전체적인 소감이랄까 소회부터 들어보고 싶습니다.(이하 평서문으로 통일)
=김영호 이사장: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대략 이런 정도로 매듭 지어지지 않겠느냐 하고. 하지만 예상보다 훨씬 더 나쁜 결과가 나왔다. 윤석열 대통령 자신도 자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아마 모를 거라고 생각한다. 알면서 그렇게 매듭지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미래 싸움 아닌 과거와 과거 싸움에서 패배
- 특히 어떤 점이 그러했나.
= 한국 정부 쪽에서는 과거에 발목 잡히면 앞으로, 미래로 나갈 수 없다는 발상을 한 것 같은데, 이건 과거와 미래의 싸움이 아니고 과거와 과거의 싸움이었다. 일본에게 이번 한국정부의 ‘해결책’은 아베 신조가 추진했던 전전(戰前, 일본의 2차 세계대전 패전 이전)을 합리화하는 역사 반동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 됐다.
아베 반혁명의 성공을 의미하는, 그러니까 과거를 떠나서 미래로 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과거가 맞부딪친 싸움이었다.
- 확실히 더 과거로 가버린 셈이 된 것인가.
= 아베가 하려고 한 것이 결국 과거 전전의 긍정, 재긍정이었으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과거와 미래의 싸움이 아니고 과거와 과거의 싸움에서 한국이 판정패했다. 이로써 아베가 정당화하려고 했던 전전의 (군국주의 침략)체제에 대한 정당성을 일본이 확보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통탄할 일이다.
- 미국의 역할이 컸던 것 같은데?
= 지금 미국의 역할을 포함해서 제2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체제가 형성되고, 그 일환으로 지난해 11월 프놈펜 한미일 정상회담에 이어 한미일 삼각체제가 강화되고 있다. 제1 샌프란시스코 조약(1951년 9월 체결, 다음해 4월 발효)체제 때 미국은 한국에 서명국 지위를 주지 않아 배상금을 못 받고 청구권만 받도록 처우하고, 일본을 경제대국으로 만들었다. 이번 제2 샌프란시스코 체제에서도 일본이 유리하고 한국이 불리하게 온갖 압력을 행사해 일본을 군사대국으로 만들고 있다.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한국의 위안부, 강제동원 피해자 등의 문제해결 길이 막혔는데, 한국 민주주의의 성장으로 간신히 해결 가능성을 열었으나 제2 샌프란시스코 체제로 또 다시 그 길을 막고 있다.
한국이 과거에 발목 잡히지 않고 미래를 택했다고 하지만, 일본은 반도체 소재장비들의 수출규제 조치의 즉각 해제가 아니라 해제 협의를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제2 샌프란시스코 체제로 동북아의 전쟁 발발 위험성은 더욱 커지고 군사대국 일본이란 새로운 대적을 맞이하게 됐다. 일본의 평화헌법을 지키려는 민주시민세력과 연대하여 미중 마찰을 완화하고 전쟁을 예방해서 시빌 아시아(Civil Asia)를 건설하는 데 앞장서는 비전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과거싸움에 밀리면 미래싸움에서도 밀린다.
한국 대법원 배상판결이 옳다
- 우리 정부가 일본의 그런 의도에 완전히 놀아난 것인가. 아니면 알면서도 끌려간 것인가,
= 한국 대법원의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확정판결문을 어젯밤에 다시 한 번 읽어 봤는데, 참 잘 썼다는 생각을 했다. 대법원 판사들이 공부 많이 했구나, 고민 많이 했구나 하는 걸 느꼈다. 속이 다 시원했고, 눈물이 났다.
이번 강제동원 배상문제의 핵심은 강제동원 피해자의 청구권 문제라기보다 강제동원 피해자의 인권문제이고, 나아가 일본 식민통치의 불법성 문제다.
2010년에 한일 지식인 1000명이 참여한 공동성명을 발표했는데, 한국에서 600여 명, 일본에서도 500~600명이 서명했다. 그 작업을 할 때, 1998년의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에 따라 한일 공동의 역사교과서 만들기 프로젝트가 진행됐으나 서로 뜻이 안 맞아 결국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그때 제일 의견이 안 맞았던 부분이 한일합방 조약의 불법성에 관한 것이었다. 한국 쪽은 불법이라 했고 일본 쪽은 당시로선 합법이라고 주장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 때도 일본은 식민통치의 합법 유효성은 강고하게 유지하고 또 당시 오사카 지법 판결에서 한일합방의 합법성을 전제로 한 식민지 시행법의 유효한 집행이라는 판례를 낸 일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2010년에 발표한 공동성명 작업을 할 때는 일본의 주류 역사학자들 대다수가 한일합방이 불법이라는 데에 동의하고 서명을 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대법원 판결문을 보면 그 공동성명 정신이 잘 담겨 있다. 그 전에 위안부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제소가 잇따랐는데 통상 일본법원 쪽은 기판력(旣判力)을 내세워 외면해 왔다. 한 조사연구에 따르면,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이 큰 파장을 일으킨 이후 승소판결이 나왔고, 2018년 대법원의 강제동원 피해자 재판도 그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물론 법원의 자체 판단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대법원의 판결 내용은 우선 1969년의 빈(비엔나)협정에 딱 들어맞고, 2001년에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유엔 주최 ‘인종주의, 인종차별, 배외주의, 그리고 그와 관련된 불관용에 반대하는 국제회의’가 구미 제국이 자행해온 노예무역, 노예제도, 식민지배에 대해 적용한 ‘인도에 반하는 죄’ 개념과도 정확하게 부합하며, 2005년 유엔 총회에서 통과된 피해자 우선 원칙에도 맞고, 지금 서유럽에서 진행되는 인권에 대한 피해자 인권에 대한 판례하고도 딱 들어맞는다.
일본 변호사 160여 명도 대법원 판례 지지 성명을 냈다. 그러니까 1965년 체제에 대한 불만 이후 근 반세기의 투쟁 끝에 김대중-오부치 한일 파트너십 선언이 나오고, 그 선언에 대한 불만으로 10여 년에 걸친 투쟁이 이어진 끝에 역사가 다시 전진하여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2010)-간 나오토 담화(2010)-헌법재판소의 위안부 판례(2011)-대법원 강제동원 배상 판례(2012, 2018)의 헌법정신 구현이라는 새로운 민주주의 전선이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그 전선이 이번에 무너진 것이다.
한일 싸움이 아니라 20세기와 21세기의 싸움
-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의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확정판결이 옳다, 정당하다는 얘기다.
= 대법원 판결이 식민주의의 극복논리이고, 최근 서유럽 각국의 인권 중시 판례 추세하고도 맞아 떨어진다.
이것이 미래로 가는 21세기적 발상이다. 그런데 거기에 반대하는 일본의 주장은 이미 지나간 세계, 20세기의 기준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20세기적 기준에 대한 비판이고 그런 점에서 이번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을 두고 벌어진 한일 간 싸움은 20세기와 21세기의 싸움이었다.
그것을 한국과 일본의 민족주의 간의 싸움으로 가져가지 말고 세계 민주주의, 인도주의와 구시대 식민주의와의 싸움, 세계 시민사회와 일본의 싸움, 일본의 보수반동과 세계시민 간의 싸움, 20세기와 21세기의 싸움 쪽으로 가져갔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미래 혁신세력 쪽이었고, 일본의 과거 회귀세력은 거기에 맞섰다. 그 싸움은 해볼 만한 싸움이었는데, 과거회귀세력, 이른바 혐한세력에게 지고 말았다. 한국에 우호적인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세력에게도 패배를 안겼다.
"해볼만한 싸움이었는데 과거회귀 혐한세력에게 졌다"
- 그런 것 같다.
= 나는 대법원 판사들이 작성한 판결문에 감동하면서, 그것을 외교적으로 밀어붙여 더 옳고 넓고 깊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싸움을 벌이지 못한 우리 외교부는 편협한 세계관에 갇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 그 대법원 판결에 대해 일본은 국제법 위반이라고,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청구권은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했다는 청구권협정 제2조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집요하게 주장하고 있다.
= 그렇다. 그런데 그 청구권협정이 근거로 삼고 있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4조(a) 항은 식민지배 가해자와 피해자들간의 민사적, 재무적, 채권 채무 관계를 처리하기 위한 것이지 불법적 식민통치로 인한 개개인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권에 관한 조항이 아니다.
-말하자면 번지수가 완전히 틀린 것을 자꾸 들이대면서 국제법 위반이라고 주장하지만, 일본의 그런 주장은 근거 없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 대법원의 판결은 식민통치의 불법성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두 가지 법률, 국가 총동원령과 국민 징용령에 의한 강제동원에 대한 배상인데, 식민통치가 합법이면 이런 입법 장치에 의한 징용도 합법화된다. 그러나 식민통치가 불법이라면 그 두 가지 법령은 무효다. 따라서 이것에 의거해서 강제동원한 것은 불법이며, 강제동원당한 징용 피해자들에게 배상을 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배상한 적이 없다.
축구 골대를 마음대로 바꾼 건 일본
- 국가 간에 협정 등을 통해 청구권 문제를 처리했더라도 그것은 국가의 외교보호권이 없어졌다는 것일 뿐 피해자 개개인의 배상 청구권은 살아 있다고 일본 외무성과 최고재판소(대법원) 등 일본 각급 법원들도 인정했다. 다만 협정에 의해 그것을 재판을 통해 청구할 수는 없다는 이상한 주장을 하고 있지만.
= 맞다. 개인 배상 청구권이 살아 있다는 것을 일본 정부도 거듭 확인했다. 판결이 나온 2018년에 일본 외상도 그걸 확인했고, 1991년 8월 27일 일본 참의원 예산위원회 질의 응답에서 야나이 슌지 외무성 조약국장이 청구권과 관련해 포기된 것은 국가의 외교보호권이지 피해자 개개인의 청구권이 소멸된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것을 부정하는 일본정부는 이중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때는 소멸됐다고 하고 어떤 때는 살아 있다고 판정한다. 자신들의 유불리에 따라 기준을 달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의 외교보호권에 대해서도 한국 대법원 판결은 포기된 게 아니라 살아 있다는 입장이 분명한 걸로 보인다. 법리적으로 분명하다. 그래서 내가 판사들 공부 많이 했구나 하고 생각한 것이다.
사법부를 초토화한 한국정부
- 훨씬 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한 것이다. 우리 사법부가 그런 확실한 판결을 내렸다면 행정부 쪽에서도 일본과 교섭을 할 때 그런 근거들을 분명히 들이대면서 좀 더 유리하게 끌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알면서도 안 한 건지 아예 몰랐던 것인지 궁금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법원이 그런 판결을 내렸는데, 이번 윤석열 정부가 발표한 ‘해결책’은 그것을 부정한 거나 마찬가지다. 일본이 줄곧 대법원 판결을 국제법 위반이라고 주장하며 그것을 무효화하라고 요구해 왔는데, 한국정부가 그런 일본정부 요구를 받아들여 결과적으로 일본정부를 두둔한 꼴이 됐다. 그렇게 보면 대법원뿐만 아니라 한국 사법부가 굉장히 무시당한 건데, 사법부가 어떻게 대응할 것으로 보나?
= 사법부는 이번에 행정부에 의해 그야말로 거의 완전히 무시당했다. 사법부를 초토화시켜버린 것이 이번에 윤석열 정부가 한 작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신문을 보니 외교부에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저항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윤석열 정부가 밀어붙였다는 얘기인데, 외무부 관리들이 실제로 저항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저항을 했다 하더라도 결과를 보면 전반적으로 외교부 관료들 공부가 부족했다, 그 때문에 일본에 제대로 대응도 못하고 밀리기만 했다고 본다.
일본의 이중기준에 속수무책 당한 한국정부
- 일반 국민이 보기에도 대법원 판결이 국제법적 위반이라는 일본 쪽 주장에 대해 우리 정부나 언론이 설득력 있게 반박을 못한 것 같다. 왜 제대로,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을까?
= 그게 참 답답한 노릇인데, 김대중 정부 때 일본이 한일 어업협정이 일본에게 불리하다며 일방적으로 폐기해 버렸다. 그리고 새 어업협정을 만들었다. 1876년의 이른바 강화도조약이란 것도 관세 없는 불평등 조약이었다. 아마 세계 근대 통상조약치고 관세 없는 조약은 그 조약이 거의 유일할 것이다. 그 전에 일본이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을 때 일본은 관세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래서 미국이 가르쳐 가며 관세 있는 조약을 체결하게 해 주었다. 5% 관세였는데, 일본은 나중에 그게 너무 낮다며 메이지 시절에 관세 개정운동을 맹렬히 벌였다.
그래 놓고 한국에는 관세 없는 조약을 맺게 했다. 그래서 무관세 조약을 체결했는데 2년 뒤에 동래부의 두모포가 관세를 매기자 일본은 조약 위반이라며 함포를 끌고와 무력시위를 벌여 약 3개월 만에 그것을 폐기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때 미국과 한국 간에 통상조약을 맺었는데 5% 관세를 매겼다. 그걸 보고 어쩔 수 없이 일본이 한 발 물러섰다.
그때도 일본은 이중기준을 적용했다.
조약이든 협정이든 잘못됐으면 고쳐야 하는 것이다. 일본은 자신들에게 유리할 때는 조약도 법률 해석도 바꾸지만 자신들에게 불리할 때는 원칙 고수를 고집한다. 문제가 있는 조약은 고칠 수 있다는 것이 세계적인 대세다. 그럼에도 일본은 이중기준으로 자신들에게 불리한 개정은 한사코 거부하고 유리할 때는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정부가 이에 대처하는 준비를 전혀 못한 것이다. 오히려 골대를 마음대로 옮긴다느니, 정권 바뀔 때마다 국제법을 어긴다느니 하는 일본의 비난을 들었다. 그러고도 제대로 대응도 하지 못하는 수모를 당한 것이다.
사법부에 대한 쿠데타, 아베 반동사관에 대한 굴종
- 그냥 수모로 그치는 게 아니라 치명적인 역사의 후퇴다.
= 1965년 한일 국교 재개에 대한 불만 이후 전후청산으로 한일관계를 바로 세우려던 우리의 노력은 근 30여년만에 침략을 시인하고 반성·사죄한 무라야마 담화를 끌어냈고, 그뒤 김대중-오부치 한일 파트너십 선언이 나왔다. 그러나 무라야마 총리는 담화 뒤 식민통치는 합법이고 유효했다고 덧붙였고, 일본정부는 시종 합법지배 입장을 유지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 때도 변함없었다. 또 이런 일본정부 입장을 반영한 오사카 지방법원 재판도 나왔다. 식민통치는 합법적이었고, 다만 다소 폭력적인 과정에 대해서는 사과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김-오부치 선언의 한계랄까 불만에서 우리는 계속 노력했고 다시 20여년 뒤인 2010년 한일 지식인 1000명의 한일병함 불법 무효 공동선언이 나왔다. 김-오부치 선언에서 합의한 한일 역사교과서 편찬작업 때는 사사건건 한일간에 의견충돌이 일어났는데, 한일 지식인 공동선언 때는 가장 난제였던 일본통치의 불법성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다.
그때 마침 무라야마 전 총리가 방한했는데, 나를 만나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의 일본통치 불법성 주장에 찬성한다고 고백했다. 그후 우리의 공동성명 정신의 영향을 받은 간 나오토 총리 담화가 나오고 2012년에 이어 2018년 한국 대법원의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재판에서 식민통치가 불법이라는 판결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3.1 운동 100주년 때 한일 시민 공동선언이 나와 다시 한일 지식인 공동선언에 대한 지지를 확인했다.
3.1운동과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주장했고 우리 헌법에도 반영된 일제 식민통치 불법론이 한일 지식인 공동선언-간 나오토 담화-대법원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로 결실된 공든 탑, 그것이 이번 정부의 조치로 와르르 무너진 꼴이 됐다. 이번 외교조치는 사법부에 대한 쿠데타이고 일본 아베 반동사관에 대한 역사적 굴종이며 한일 간 1965년 체제를 극복하려는 지난 반세기의 민주적 노력에 찬물을 끼앉는 것이자 한국 헌법정신의 추락사건이다.
왜 우리 외교부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나?
- 일본은 개인 청구권이 살아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 유독 한국에 대해서는 이중잣대를 들이댄다. 그런 수법이랄까 전략을 쓰는 걸 유능하고 훌륭하다고 봐야 하나 한국 쪽이 무능한 탓이라고 봐야 하나?
= 2002년 뉴욕 지방법원에 위안부 문제로 한국 시민단체가 제소했을 때, 그때는 한국과 필리핀 등 몇 나라가 함께 했는데, 일본은 거기에 대응하기 위해 개인 청구권도 끝났다는 쪽으로 기존 입장을 다시 바꿨다.
그런데 중국의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국제법적으로 개인 청구권은 그래도 살아 있다는 해석을 적용했다. 그리고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피해자들이 미국에 대해 배상을 청구했을 때도 일본정부는 개인 청구권이 살아 있다고 주장했다.
개인 청구권 문제는 개인이 국가로부터 상대적 자율성을 지닌 존재라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내가 시빌 아시아를 주장하는 근거 중의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한국에게는 그런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걸 왜 우리 외교부는 제대로 파악하고 대응하지 못하는가.
사법부, 가해기업 자산 현금화 판단할 것
-우리 사법부는 어떻게 할까? 그냥 정부 조치를 수용해야 하나?
= 가해기업들의 국내 자산 차압과 현금화에 대한 사법부의 최종 판단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 판단해야 할 시기가 임박하자 외교부가 연기를 요청했고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연기 요청을 한 지가 지금 몇 달이 지났다. 무한정 연기할 수 없고 사법부가 조만간 최종판단을 내려야 하는 걸로 알고 있다.
2018년 대법원의 확정판결이 대법관 전원합의체에 의한 판결이기 때문에 법리적으로 뒤집을 수도 없고 계속 미룰 수도 없다. 전문가들에게 물어 보니 조만간 현금화하라는 쪽으로 판결이 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 나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 그렇게 되면 결국 행정부와 사법부가 충돌하게 되는데.
= 이번에 사법부가 행정부한테 처참하게 깨졌으니까 사법부로서는 뭐랄까 기분이 안 좋다고 할까, 그런 분위기 아닐까. 알 순 없지만 조만간 현금화 쪽으로 결단을 내릴 것으로 나는 예측한다.
사법부와 행정부의 충돌?
- 행정부와 사법부의 정면 대립이랄 수도 있고, 일본정부로서도 한국 사법부가 현금화 쪽으로 최종판단을 내리면 난리나는 것 아닌가. 사법부가 행정부 방침에 따르는 일본에서는 불가능할지 몰라도, 삼권분립 원칙이 있는 한국에선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 한국 시민사회가 어느 쪽 편을 들어주느냐에 달렸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도 ‘시민언론 민들레’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그런 싸움 볼 만하겠다. 민주주의와 인권 대 구시대 식민주의적 가치, 21세기와 20세기의 싸움, 일본 수구세력과 세계시민사회의 싸움이라면 제대로 한번 해 볼 만한 싸움 아닌가.
- 아까 얘기를 하다가 조금 옆으로 샜는데,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 때 한국 서명자가 600명이 넘었다. 일본도 비슷하게 가서 양국 참여자 1000명 선에서 서명을 중단하자고 제안했다. 계속했으면 1200명도 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서명한 사람의 5분의 4 정도는 역사학 교수들이었다. 일본 쪽도 그렇고. 역사학 교수들의 전체적인 감각을 우리가 문제 삼을 게 아니라, 역사 문제니까, 한일합방 조약이 원천 무효냐 아니냐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판단이라는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을 텐데, 그때 일본과 한국의 일급 전문가들 주류가 이것(한일합방 조약)은 불법이다 하고 양국에서 선언을 한 것이다. 전문 연구자들이 그랬으니 따라갈 거라고 생각했다. 식민통치가 불법이고 무효라는 한일 지식인 1000여 명의 주장은 실은 안중근 의사의 주장이기도 하다.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쏘아 죽인 주요 이유 12개 가운데 절반 정도가 일본이 조약을 위반했다, 약속한 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을사늑약은 원문도 없는 무효 판정
그런데 1000명의 성명서가 발표된 뒤에 한일 학자들에 의해서 을사보호조약이 원문이 없는 조약, 실체가 없는 조약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우리가 진행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관련 심포지엄에서 이태진 교수와 일본의 도쓰카 교수가 그런 사실과 1910년의 한일합방 조약에 고종의 사인이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말하자면 무효라는 이유가 더 분명해진 것이다.
국제법학자인 프랑스의 파란시스 레이와 맨리 허드슨 하버드대 교수는 강제에 의한 조약은 무효라며 그 대표적인 3가지 사례의 하나로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사늑약)을 들었다. 이는 국제연맹에서 ‘하버드대 보고서’로 발표됐고, 다시 유엔 국제법위원회 결의를 거쳐 1963년에 유엔 총회에서 정식으로 통과됐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정당성의 핵심 가운데 하나를 유엔 총회가 부정했다는 문맥을 갖는다.
한일 국교가 정상화된 것이 1965년, 말하자면 그로부터 2년 뒤였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것도 몰랐다. 한국정부가 그랬다.
일본정부는 그것을 숨기기에 급급했고, 성공했다. 한국정부는 유엔 총회에서 통과된 것조차 몰랐고, 몰랐으니 협상과정에서 써먹지 못했다.
이번 일을 지켜보니 아직도 그 수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외교부에 한 대 갈기고 싶다”
-일본은 주도면밀하게 자기들 주장이 자가당착이라는 걸 알면서도 철저히 숨기고 자국 이익을 위해 이용했는데, 윤석열 정부는 제대로 대응도 하지 못하고 그런 일본의 주장이나 요구를 덥썩 받아들여 버린 셈이다.
= 나는 이를 3단계로 나눠 이해한다. 먼저 한일 지식인 1000명의 공동성명으로 분위기가 잡혔고, 다음 2011년에 헌법재판소에서 국가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방치한 것은 국민의 권리보호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부작위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왔다. 그리고 2012년에 대법원에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2018년 대법원 판결은 이 2012년 판결의 최종 확정판결이다.
그러니까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이 1단계고, 그 다음에 사법부에 의한 판례로서 그것(한일합방 조약 등에 의한 식민지배)이 불법임이 확인된 것이 2단계, 그러면 3단계로 행정부가 이번에 외교적으로 그것을 구체화시켜야 하는데, 오히려 일본정부 손을 들어주는 판정패를 하는 바람에 공든 탑이 무너진 것이다. 행정부는 아무것도 안 했을 뿐만 아니라, 뭘 해야 되는지도 몰랐던 거나 마찬가지라고 봐야 된다.
역사에 대해 양보함으로써 경제적 안보적 혜택을 본다고 하는데, 오히려 역사의식이 고개를 숙이면 경제적 안보적 고개 숙임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그것은 또 일본에서 평화헌법을 수호하려는 양심적 민주 시민세력를 배반하고 보수적 혐한세력과 합작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도대체 멀리, 깊이 보지를 못한다!
이번 사태 결과는 제2의 샌프란시스코 조약체제
- 설마 우리 정부 관리들이 그걸 모를 정도로 무식하지는 않겠지,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미국이나 일본 눈치를 보면서.
= 내가 얘기해 온 제2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다. 1차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미국의 시나리오대로 미국의 힘에 의해 체결됐고, 그 결과 일본이 덕을 보고 한국은 피해를 봤다. 이번 일은 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재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샌프란시스코 1.0체제로 패전국 일본은 살아났고 식민지배 피해자 한국은 분단이 고착되고 미일동맹에 종속당했다. 지금 다시 샌프란시스코 2.0체제가 꾸려지면 우리는 또 다시 일본 이익이 중시되는 쪽으로 미국이 짜는 질서에서 굉장히 불리한 처지에 몰리게 될 수 있다는 얘긴가.
=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때 가장 덕 본 나라는 일본이다. 그래서 전범 국가로 가혹한 처분을 내리려던 애초의 조치들이 철회되고 일본은 면죄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미국의 원조를 받았고, 한국전쟁으로 전쟁특수까지 누리면서 급속히 재건됐다.
이제는 한국도 민주화가 상당히 진전됐고 힘도 상당히 커졌으니 샌프란시스코 1.0체제 때와 같은 불리함을 감수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그런 변화 조짐이 지금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라이샤워 “한국은 일본 육성을 위한 뒷마당”
- 이런 식으로 가면, 예컨대 미국이나 일본이 계획하고 있는 샌프란시스코 2.0체제는 반으로 잘린 한반도의 남쪽(한국)을 일본에 합치고 북쪽 절반은 중국으로 가게 하든지 해서 사실상 한민족을 해체하려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일본 우익은 그걸 오래전부터 바라왔지만 미국도 거기에 동조하는 것 같은데, 윤 정부는 그걸 알고 그러는 건지 모르고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스스로 앞장서겠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이러다가는 미국과 일본의 장기 플랜에 우리나라가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마저 든다.
= 샌프란시스코 1.0체제 때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 중의 하나가 에드윈 라이샤워였다. 일본 대사를 지냈는데, 그때 서울에 와서 강연을 했다. 그 강연을 내가 가서 들었다. 그때 그가 아주 노골적으로 얘기했다. 미국에게 일본이 필요한 것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을 키워야 된다, 그런데 한국이 필요한 이유는 그 일본을 키우는데 그 뒷마당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얘기를 서울에 와서 했다. 그때 나는 울분을 토로했는데, 지금 우리가 그 차원에서 얼마나 벗어났느냐는 얘기라면, 미국에게 지금 한국의 가치가 일본을 키우기 위한 뒷마당 정도에서는 벗어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그때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한국은 일본을 키우기 위해서만 필요한 게 아니고 독자적으로 중요하다. 중국에 대한 미국의 전략에서 한국은 일본과는 상관없이 그 자체로 중요한 가치가 많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 점을 우리는 잘 살려야 한다.
- 그런데 현실은 그런 것 같지 않다.
= 그렇게 되기를 기대했는데 현재로서는 그것이 구체적으로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는 달라진 점이 보이지 않는다.
전기자동차에 대한 보조금이나 반도체, 배터리에 대한 미국의 지원정책에서 한국 기업들이 어떤 대접을 받게 될지, 지금으로선 개선될 전망이 없어 보인다.
한 가지 희망적인 관측은, 우리가 호주의 예에서 배울 것이 있다는 점이다. 중국이 호주의 대중국 상품 수출에 대해서 관세를 200%로 올려버렸다. 그러면 호주가 손 들고 나올 걸로 중국은 예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손 든 쪽이 호주가 아니라 중국이었다.
이승만 정부가 미국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한국을 배제하자 반공포로를 석방해 버리는 강수를 뒀다. 그게 한미 방위협정으로도 연결됐다.
- 평화주권선(이승만 라인)도 그어 그 안에 들어오는 일본 배들을 잡아들였다.
=맥아더 라인이 철회되자 이승만 라인을 그어 버렸다. 그 정도의 독자성조차 지금은 안 보인다. 문재인 정부 때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아베 정권의 외교적 ‘더티 플레이’에 격분해 덤빌 테면 덤벼 보라는 식으로 대응했던 그 정도의 기개조차 없는 것 같다.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는 대통령
- 그러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그냥 보고 있을 순 없지 않은가. 윤석열 대통령이나 정부는 그걸 알고도 그랬을까, 몰라서 그랬을까.
=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 다만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는지 본인은 모르는 것 같다. 알면 그럴 수가 없다.
- 지금 정부도 그렇고 정계도, 야당마저도 충분히 자기 역할을 하는 것 같지 않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주류 언론은 오히려 그런 정부를 옹호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일반 시민이라도 나서야 하는 것 아닌가.
= 1989년에 당시 동독 정부가 베를린 장벽을 철거할 것처럼 하다가 철거를 하지 않자 동독 시민들이 “우리가 바로 동독 헌법에서 말하는 그 폴크(Volk. 인민, 민족)다”, “우리는 한 민족이다(Wir sind ein Volk)”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너희 동독정부가 아니라 우리가 주인이라는 얘기였다. 그렇게 해서 장벽이 무너지지 않았나. 국민이 강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목소리를 대변해야 하는 것이 민들레다.
- 사람들은 이번 사태 뒤에 미국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반도 분단에 책임이 있는 미국이 이제까지 70여 년 동안 계속 한국에 불리한 정책들을 펴 왔고 지금도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미국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오랜만에 보는 변화 조짐인 것 같다.
= 이번 사태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재판이 아닌가 생각하는 이유도 바로 사태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때 주역을 맡은 미국이 그랬고, 지금도 한일관계를 놓고 미국이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 나름대로 미국을 어떻게 주체적으로 활용하느냐는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그런 주체적인 역량이 참으로 절실한 시대가 아닐까. 반미로 가는 건 지혜롭지 못한 것 같다.
우리가 미국의 데모크라시와 연결돼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군사 패권주의와 연결돼 있는 것이 문제다. 같은 미국이라도 캐나다는 미국의 좋은 점과 연결되고, 중남미는 그렇지 못한 것처럼. 한국이 미국의 어떤 면과 결합되느냐가 중요하다. 반미로 가서는 승산이 없다.
제2의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전쟁으로 가는 길
- 반미로 가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의견들이 있다는 얘기다. 그런 미국을 이제까지처럼 그냥 좌시하거나 미국의 의도대로 하게 두는 것은 분명히 우리 이익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부든 시민사회든 나서서 어떤 식으로든 의사를 전달하거나, 미국 일본이 그런 식으로 나가는 건 미국 일본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다는 걸 분명히 알려야 하지 않을까.
= 이런 식의 제2 샌프란시스코 조약 형태로 가면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그 전쟁이 중국과 대만 사이에 일어나든 중국과 미국이 직접 맞붙는 전쟁이 일어나든, 우크라이나 전쟁과 연결돼 동북아시아에 파장을 불러오든. 또 북한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수도 있을 것이다. 하여튼 전쟁 위험이 높아질 수 있다.
지금처럼 일본 미국과의 새로운 관계 형성이 제2의 샌프란시스코 체제로 간다면 한국에서 전쟁 위험이 높아질 것이다. 여기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나는 일본의 군비 강화보다 일본의 평화헌법을 지지하는 사람이다. 일본의 평화헌법 체제가 동북아 전체의 평화헌법 체제가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을 위해서도 굉장히 불행한 일”
일본에 대해서 한 가지 더 얘기하고 싶은 게 있다. 아까 얘기했듯이 1876년의 강화도 조약은 관세도 없는 세계 최악의 근대 통상조약이었다. 그리고 을사보호조약이라는 것 역시 강압에 의해 체결했지만 조약문도 존재하지 않는 실체가 불분명한 최악의 조약이다. 세계 역사상 최악의 3대 조약 가운데 하나로 유엔이 규정했다. 그리고 1965년의 한일 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 또한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이 없는 조약이다. 2차 세계대전 뒤 체결된 이른바 전후 조약 가운데 가해자가 식민지배에 대해 반성하지 않은 조약은 이 조약이 세계에서 유일하다. 그 점에 대한 여러 가지 우려와 반성에서 일본의 역대 내각들이 고노 담화에서부터 무라야마 담화를 거쳐서 간 나오토 담화까지 내 놨다. 그러다가 2015년의 이른바 아베 신조의 전후 70년 담화로 그것을 모조리 다 뒤집어 버렸다.
이번에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역대 총리의 담화를 전체적으로 계승한다는 것을 재확인한다고 한 것들 중에는 아베 담화도 포함된다. 그렇다면 기시다도 아베 정권의 계승자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전후 청산이 이뤄지지 않은 사례를 남겼다. 일본은 세계사에 큰 오점을 남겼다. 일본이 이번에 정치적으로 이긴 것 같지만 그게 아니다. 일본을 위해서도 그것은 굉장히 불행한 것이다. 일본이 그것을 알아야 된다.
- 일본군 위안부 문제라든가 이런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는 실은 일본이 청산했어야 되는데 청산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일본의 문제인데 마치 한국이 무슨 잘못해서 지금 문제가 빚어진 것처럼 뒤집힌 인식이 퍼져 있다. 방금 지적한 대로 이건 일본을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고 장차 일본한테 결코 이익이 되지 않을 것이다.
= 청산을 하지 않은 나라들 중에서도 가장 안 하고 넘어온, 세계사 속에서 거의 유일한 사례가 일본이라는 점을 꼭 지적해 두고 싶다.
베를린에 가보면 유대인 학살에 대한 반성에서 지은 기념관이 있잖은가. 덴마크 코펜하겐에 가면 ‘퀸 메리’라는 이름의 동상이 있다. 식민지배 시절 메리라는 아프리카의 젊은 흑인 여성을 불 태워 죽였는데, 그것을 사죄하는 뜻으로 희생자의 이름을 딴 큼직한 동상을 세우고 거기에다 퀸(여왕)이라는 존칭을 붙였다. 덴마크가 여왕의 나라니까 그 여왕과 동격으로 만들어, 아프리카 식민통치에 대한 최대한의 반성의 뜻을 표시한 것이다.
그게 세계사적인 추세다. 그런데 일본은 거꾸로 가고 있다.
- 일본은 위안부 소녀상도 지금 철거하라고 난리니까.
= 일본에는 소녀상이 없다.
- 일본에는 당연히 없고, 나라 바깥에 시민들이 세워 놓은 소녀상을 치우라고 소녀상을 세운 나라의 정부와 지자체에 압력을 가하며 집요하게 괴롭히고 있다.
= 예전에 일본의 수도가 교토에 있었는데, 거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 신사가 있고 바로 그 앞에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조선사람 코와 귀를 베어 소금에 절여 묻어 놓은 큰 돌무덤, 이른바 ‘코무덤’이 있다.
교토의 코무덤은 수구일본의 상징
- 나도 가 봤다.
= 피해 국가의 코무덤을 보존하고 있는 나라. 코펜하겐과 베를린은 그런 류의 조형물들은 모두 다 반성의 뜻으로 조성돼 있는데, 그와는 거꾸로 기념하는 나라. 그것이 일본을 상징한다.
- 그 코무덤 보고 정말 섬찟했는데, 상당히 크게 만들어 놓고 과거의 비인도적인 죄업에 대한 반성과 희생자를 기리는 회오의 장소가 아니라 일종의 자랑스런 전리품처럼 많게는 수십만 조선사람들의 신체 일부를 잘라 와 그렇게 묻어 두고 마치 관광 기념물처럼 여기는 듯한 풍경이 기이하고 충격적이었다.
그런 일본을 식민지 지배하듯 철저히 이용해 온 나라가 미국이다. 가쓰라-태프트 밀약 이래 미국은 그런 일본을 지배하기 위해 한국을 활용해 왔다. 이런 것이야말로 21세기가 아니라 19세기나 20세기의 세계 아닌가.
일본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미국에 대해서도 그런 식의 한국정책이 두 나라에도 결국 득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려야 한다.
= 두 나라 관리들을 움직이는 데 한국은 너무 약하다. 그에 비해 일본은 그게 너무 강력하다. 한국이 판판이 지고 있다.
나는 과거로부터의 자유라는 개념을 좋아하는데, 한국은 과거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과거에 구속되는, 과거에 다시 사로잡히는 그런 외교로 대처한 것이다.
보수반동에 맞서는 민들레 시민사회
- 맞다. 이번 발표를 과거와 이별하고 미래로 가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사실은 과거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과거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과거로의 재구속으로 가는 과거사 처리 방식이다.
= 나는 예전에 두만강 가에 가서 동해를 바라보면서 저 일본에는 식민지 조선의 바람에 날려간 민들레 홑씨들이 일본의 바위틈에 뿌리를 박아서 지금 널리 퍼졌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사할린 쪽과 러시아에도 날아간 민들레 홑씨들이 뿌리를 박았다. 중국 훈춘 쪽에 가서도 조선 쪽 민들레 홑씨들이 식민지 바람과 냉전의 바람에 거기로 날아가 뿌리를 박은 것을 봤다. 북한 땅에 있는 민들레와 남한에 있는 민들레가 모두 그랬다.
내가 어느 신문 칼럼에서 '민들레 경제권'에 대해 쓴 적이 있는데, 여기 민들레 사무실에 오니 옛날에 썼던 그 글이 생각이 나서 재밌게 생각했다.
아무튼 여기 이 민들레가 자라서 아시아에서 제일 강력한 시민사회를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하기 바란다. 아시아에서 정권이 선거를 통해 제대로 교체되고 있는 나라는 한국 빼고 거의 없다. 이제 약 5000만의 중산층, 더구나 스마트 기기로 무장한 5000만의 이 시민사회가 북한에 대해, 일본에 대해, 중국에 대해 자신이 지닌 시민사회의 가치와 파워를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아베와 같은 보수 반동 노년층의 지금 파워에 대항해서 일본의 젊은 층이 한류와 교류하면서 얼마나 한국과 가까워지고 있나.
- 끝으로, 삼권분립하의 사법부를 행정부가 '묵사발'로 만들었는데, 이건 헌법 위반 아닌가.
= 헌법 위반이다. 삼권분립 원칙에 어긋난다.
- 일본은 우리와 다른 것 같다. 일본은 사법부가 행정부의 눈치를 보고, 최고재판소(대법원)도 행정부의 뜻에 따르는 것 같다.
= 그것은 일본의 이른바 사법부의 자제론이라는 것인데, 한국에서도 지금 대법원에 대해서 서울대 법대 어느 교수가 늘 사법부 자제론을 주장하고 있다. 또 외교부도 사법부 자제론을 얘기하고 있고, 역대 주일 한국대사 출신자들이 신문에 쓴 글을 보면 전부 사법부 자제를 얘기한다.
나는 사법부가 2018년 확정판결 때처럼 그런 틀에서 벗어나서 과감한 판결을 해야 세계적인 재판, 인도주의에 앞장서는 그런 재판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이번의 가해기업 자산 현금화 판단이 그럴 수 있는 기회 아닌가.
행정부의 결정에 대해서 그게 아니다 하고 분명히 자기 태도를 밝히고 진정한 해법은 이거다 하고 분명히 자기 입장을 밝혀야 하지 않을까.
= 나는 시민사회가, 또 지식인 사회가 거기에 대해 얼마만큼 용기를 북돋아 주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그냥 지금 이런 상황에서 사법부만 용감하게 나서라 하고 하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용기를 주고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게 중요하다. 지식인 사회와 특히 언론계가 앞장서야 한다.
말하자면 그 질문은 나한테 해야 할 게 아니라 내가 민들레에게 해야 한다. 민들레가 그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겠는가?
집단기억을 흔들 용기
- 민주주의와 인권 대 구시대 식민주의적 가치, 시민사회와 수구세력, 21세기와 20세기의 한판 싸움이 벌어졌으면 좋겠다.
= 두고 보자. 나는 이번 싸움은 이기는 싸움이었는데 진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이제 더 큰 승리로 이끌려면, 행정부 단독으로 못할 경우 시민사회와 언론 특히 민들레 같은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 사법부 혼자의 용기보다 주변에서 사법부에 용기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
*김영호 이사장은 경북대 교수, 도쿄대 교수 등을 역임한 원로 경제학자다. 김대중 정부 시절이던 2000년에는 산업자원부 장관을 맡아 한국의 산업·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그 후 유한대학 총장, 한국학중앙연구원과 성균관대 석좌교수를 지냈으며 동북아평화센터 이사장,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시민 연대에 의한 시빌 아시아(Civil Asia)’를 꾸준히 모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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