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와 불의 ②] 박경석 전 장군, 전두환을 말한다
상급자 멱살잡이 등 안하무인…진급 심사도 위세
대령 시절에 일반 장교 상상 못할 고급 요정 출입해
정권 탈취 이전에도 고위 장군들이 '황태자'로 모셔
박경석 예비역 준장의 책 ‘정의와 불의’에는 전두환 씨와 관련된 내용들이 나온다. 이들 내용을 보면, 전 씨는 박 장군과 처음 만난 중령 시절부터 상당한 파워를 과시하고 있었다. 상급자의 멱살을 잡는가 하면, 고급 요정에도 드나들었다. 급기야 준장 진급 이후에는 4성 장군도 헬기장까지 나와서 마중하는 위력을 자랑했다.
박 장군과 전 씨 둘 다 육군사관학교를 입교했지만, 묘한 관계이다. 박 장군이 생도2기이고 전 씨는 11기여서, 박 장군이 육사를 먼저 들어갔다. 그러나 생도2기는 4년제 과정으로 모집돼 1950년 6월 육사를 입교했지만 25일 만에 6.25를 만나 전선으로 차출됐고, 나중에 종합학교에 강제 편입돼 1950년 10월 23일 소위로 임관돼 육사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생도2기는 1996년이 되어서야 육사 명예졸업장을 받게 된다. 박 장군은 이 책에서 전 씨와의 알력에 대해 “나는 4년제 육사 선배임을 고집했고, 전두환은 졸업하지 못한 선배이므로 자기의 정통성을 고집했다”고 말한 것도 이런 사정이다.
두 사람은 1964년 진해 육군대학의 1년제 정규 과정에서 처음으로 같은 반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당시에도 전 씨는 자신보다 계급이 높은 상급자에게 멱살잡이까지 했다고 한다.
"나와 전두환 소령은 같은 클래스에 배정됐고 나는 그 클래스의 반장 격인 대표 학생장교였다. 나는 중령으로 전두환보다 상급자였으나 나이는 전두환 소령이 두 살 위였다. 1년간 사사건건 트러블이 계속됐고 나는 늘 그를 압도했다.
그러나 졸업을 앞두고 함안 종합 야외훈련장에서 일이 터졌다. 실습이 끝나고 교수부장 백문오 대령이 초청하는 학생대표 만찬장에서 누군가가 보안사령관 전신인 육군 방첩부대장 박영석 장군이 윤필용 장군과 교체되었다는 뉴스를 전했다. 박영석은 바로 내 위 형이었기에 순간 흥분하면서 '정치군인이 점령하는군'하고 내뱉자 전두환 소령이 나에게 대들었다. 전두환 소령은 학생대표 자격이 없었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총애하여 교수부장에 의해 특별히 초대됐다. 서로 티격태격 싸우다가 멱살잡이까지에 이르자 교수부장이 나서서 수습했다. 전두환은 나에게 잘못을 사과하고 여러 번 접근을 시도했지만 나는 외면했다."
군 내에서 전 씨의 행동은 이 정도는 약과이다. 군 내부에서 가장 민감하게 여기고, 그래서 내부 파워의 척도가 되는 진급 심사에서도 전 씨의 위세를 증언하고 있다. 박 장군은 군 진급심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는 지휘관의 서열 추천도 무시되고, 전혀 뜻밖의 심사 결과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육군본부 박 장군이 맡고 있던 인사운영감실 대령과장은 지휘관 추천 서열을 잘 받기도 하지만 진급이 잘 되는 노른자 보직 가운데 노른자로 통한다. 쉽게 말해서 장군 진급 1순위 자리이다. 그런데도 진급심사 결과 박 장군은 탈락하고, 전 씨는 당당히 선발됐다. 전 씨는 특진 제도를 이용해 판을 완전히 뒤집어버린 것이다.
고급 요정 이야기도 나온다. 전 씨가 초대한 요정은 종합이나 갑종장교 출신 장교는 물론 비하나회 육사 출신 장교들이 다니던 술집과는 차원이 달랐다는 것이다. 고급 요정은 1979년 12·12 당시 보안사령관(소장)이던 전 씨가 특전사령관, 수경사령관을 따돌리는 장소로도 등장한다. 당시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전 씨의 고급 요정 출입에 대해 혀를 차는 말을 남겼다지만, 전 씨는 대령 시절에도 고급 요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전 씨의 초대로 들어선 고급 요정은 일반 장교로서는 상상을 못할 정도로 화려했다. 식탁에는 당시 대통령이 마시던, 최고급 양주 시바스리갈이 놓여 있었다. 일반 장교들은 ‘카바이트술’이라는 막걸리와 소주를 먹던 시절이었으며, 맥주만 마셔도 호주머니 사정을 걱정해야 하는 시절이었다.
특히, 박 장군은 17살, 어린 나이에 소위로 임관해 6·25전쟁에 참가하면서, 전선에서 돌격의 두려움를 잊고자 선임하사관이 건네준 술을 마신 기억을 갖고 있다. 자신은 죽음의 공포를 피하고자 술을 마셨지만, 환락의 술 세계를 보고서 부아가 치밀기도 했다.
"내가 전두환보다 잠시 앞섰던 육군본부 인사운영감실 대령과장 시절이었다. 나는 몇 달 후면 장군 진급이 예약된 정황이고 전두환 대령은 대령 진급이 2년 늦은 후임 대령이었다. 어느 날 사무실에 찾아와 간곡히 저녁 식사 대접을 한다기에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따라나섰다. 도착해 보니 어마어마한 요정이었다. 내 생애 최고 식사 장소로 기억된다. 나는 긴장했다. 여기에서 벗어나야 하겠다고 마음을 정한 탓인지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 내가 한 말은 '훈계'였을 것이다. 분위기가 냉랭해지면서 나는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요정에서 벗어났다. 몇 개월이 지났다. 장군 진급 1순위라는 대령과장 박경석은 장군 진급 명단에 없었고 심사 명단에도 없었던 전두환을 비롯한 하나회 핵심 5명은 특진 케이스로 진급 명단에 올랐다. 나는 다음 해, 그 다음 해에도 장군과는 거리가 먼 퇴역을 앞둔 고참 대령 신세가 되었다."
장군이 된 전 씨는 군 내부에서 욱일승천했다. 당시 그에 관한 몇 건의 일화들이 소개된다.
"전두환이 장군이 되어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받으며 위세를 떨칠 때에도 나는 그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러나 육군의 고위 장군들은 계급과 관계없이 굴욕적인 태도로 그에게 극진한 모습을 보였다. 가령 그가 준장일 때 상급부대를 방문하면 3성 장군인 군단장은 물론 4성 장군인 군사령관까지도 헬기장에 나가 그를 마중했다. 육군 내 장교 간에는 전두환을 황태자라 조롱하는 말들이 떠돌았다."
박 장군은 여러 화제를 가지고 있다. 어린 나이에 소위로 임관한 그는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에서 전투 지휘관으로 참전하여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보국훈장 천수장, 보국훈장 삼일장 및 외국 훈장 등 11개의 각급 훈장을 수훈했다. 그는 베트남 파병 당시 맹호부대 제1진의 초대 재구대대 대대장을 맡았다. 그가 전 씨에 대해 자신감을 가진 것은 이들 각종 훈장 때문이다.
"전두환은 나를 껄끄럽게 보면서도 나의 경력과 업적을 사실 그대로 인정하는 대범한 모습을 보이는 척했지만 내면으로는 나를 늘 질시하며 경계했다. 훗날 이야기지만 전두환은 '자기도 베트남전에 참전했는데 박경석은 웬 놈의 무공훈장이 그렇게 많으냐'고 술만 마시면 투덜댔다고 한다."
박 장군은 군내 정치 사조직에 맞서 올바른 방향을 고집했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그는 군 내 실세인 하나회와 추종세력의 눈 밖에 났다. 그는 1975년에 늦깎이 장군으로 진급한 뒤, 앞서 밝힌 대로, 소장 진급을 스스로 포기하고 1981년 7월 군문을 떠났다. 군 예편 이후 문인이자 군사평론가인 그는 무공훈장 수여 문제 이외에도 왜곡된 한국 군사를 바로잡는 데 앞장섰다. 이명박 정부 시절 정부와 군은 백선엽 예비역 대장을 명예원수로 추대하려 했지만, 박 장군은 간도특설대 복무 기록을 제시하며 반대 운동을 펼쳐 좌절시키기도 했다.
금연과 금주의 절제된 생활로 노익장을 과시하며 아직도 집필 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이번 책 '정의와 불의'가 87권째 작품집이다. 그는 그동안 국제PEN본부 문학상을 비롯하여 대한민국 전쟁문학상 시 부문, 소설 부문 등 총 13회 문학상을 받았다. 또 용산 전쟁기념관 '서시' '조국' '추모시' 세 시비 등 전국에 11개의 박경석 시비가 건립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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