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페인 수교 75주년 맞아 세워질 대형 조각상

1960~70년대 외화 획득의 견인차, 원양어업

파독 광부·간호사보다 훨씬 많은 외화 벌이

돈 번만큼 쓰는 것도 훌륭한 원양어업 두 영웅

“태평양에 김재철 있다면 대서양엔 권영호”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북대서양 카나리아제도는 스페인령이지만 유럽보다는 아프리카에 훨씬 가깝다. 스페인 남단에서는 1000㎞ 넘게 떨어져 있으나 아프리카 북서쪽 모로코와의 거리는 100㎞ 남짓에 불과하다. 1년 내내 기후가 온화해 ‘영원한 봄의 섬’이라고도 불린다. 경치가 빼어나고 지질과 식생이 독특해 유럽 관광객이 즐겨 찾는 인기 휴양지이자 유네스코 생물권 보호지역이기도 하다.

15세기부터 유럽에서 인도나 아메리카로 가는 항로의 중간 기착지로 활용됐다. 1496년 스페인이 카나리아제도 전체를 점령해 식민지로 삼았다. 1960년대 이후 분리 독립 움직임이 일기도 했으나 1982년 스페인 정부가 자치권을 보장한 뒤 잠잠해졌다.

 

라스팔마스 항구 전경. 15세기부터 유럽에서 아메리카와 인도로 가는 중간 기착지였고, 1960년대 이후 한국 원양어업의 전진기지였다.
라스팔마스 항구 전경. 15세기부터 유럽에서 아메리카와 인도로 가는 중간 기착지였고, 1960년대 이후 한국 원양어업의 전진기지였다.

한국 원양어업 본거지 라스팔마스에 세워질 ‘그리팅맨’

카나리아제도는 7개의 큰 섬으로 이뤄져 있다. 면적을 모두 합하면 7493㎢로 충청북도와 비슷하다. 가장 큰 도시는 그란카나리아섬의 항구 라스팔마스다. 인구는 38만여 명으로 스페인에서 9번째다.

이곳의 산타카탈리아 부두에 한국식으로 고개 숙여 인사하는 모습의 대형 조각상 ‘그리팅맨(Greetingman)’이 세워진다. 6m 높이의 조각상이 컨테이너에 실려 8월 말 라스팔마스에 입항했다. 유영호 작가도 10월 1일 현지에 도착했으며 이튿날부터 설치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10월 2일 라스팔마스항 산타카탈리아 부두에서 인부들이 크레인을 이용해 그리팅맨 설치 작업을 하고 있다. (유영호 작가 제공)
10월 2일 라스팔마스항 산타카탈리아 부두에서 인부들이 크레인을 이용해 그리팅맨 설치 작업을 하고 있다. (유영호 작가 제공)

제막식은 14일 오전 11시에 열린다. 임수석 주스페인 대사, 고문희 라스팔마스분관 총영사, 최기환 라스팔마스한인회장, 페드로 로얀 스페인 상원의장, 카롤리나 다리아스 산세바스티안 라스팔마스시장, 베아트리스 칼사다 오헤다 라스팔마스 항만청장 등 양국 관계자들이 참여할 예정이며 스페인 국왕 펠리페 6세도 축사를 미리 보내왔다.

그리팅맨은 유영호 작가가 2012년부터 펼쳐온 글로벌 공공미술 프로젝트다. 인사는 소통과 감사의 표현이다. 지역에 따라 가슴에 손을 모으거나 양쪽 뺨을 맞대거나 손을 맞잡기도 한다.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배려하는 한국식 인사를 통해 화해와 평화의 메시지를 전 세계에 전하겠다는 것이 그의 포부다.

해외 8개국 9곳에 설치된 글로벌 공공미술 프로젝트

그리팅맨의 재질은 알루미늄이며 겉에 우레탄 페인트를 칠했다. 고려청자 빛깔의 연한 푸른색은 인종을 초월한 중립적인 색으로 하늘 색깔과도 조화를 이룬다. 고개 숙인 각도는 비굴하지도 오만하지도 않은 15도로 정했고, 높이는 20피트짜리 표준 컨테이너에 들어갈 수 있도록 6m에 맞췄다.

한국의 대척점인 우루과이 몬테비데오를 시작으로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파나마, 적도 부근의 에콰도르 카얌베와 과야킬, 브라질 상파울루, 미국 뉴저지, 멕시코 메리다, 베트남 후에에 세워졌다. 강원도 양구, 경기도 파주와 연천, 서울 을지로3가, 대구 이현공원, 제주 서귀포 등지에서도 만날 수 있다.

1965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난 유 작가는 서울대 미대 조소과를 거쳐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그가 제작한 서울 상암동 MBC 사옥 앞의 ‘미러맨(Mirrorman)’은 에콰도르 키토, 튀르키예 부르사,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등에도 설치됐다. 서울 공덕오거리 에쓰오일 본사 앞의 ‘빛을 든 사람’도 그의 작품이다.

해외로만 따지면 라스팔마스가 8개국 9번째 그리팅맨이다. 올해는 한국과 스페인 수교 75주년이다. 라스팔마스는 한국이 원양어업 전진기지를 설치해 스페인에서 가장 먼저 코리아타운을 이룬 곳이다. 내년은 한국 원양어선이 라스팔마스에 진출한 지 60년을 맞는다. 1966년 5월 13일 한국수산개발공사 소속 강화601호가 처음 이곳에 닻을 내렸다.

“남쪽으로 뱃머리를 돌려 부를 건져 올려라”

1945년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았다가 5년 만에 전쟁을 겪은 한국은 외화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정부는 미국 시애틀의 수산시험장이 1946년 연구 목적으로 건조한 230t급 종합시험조사선을 32만 6000달러에 도입한 뒤 외화 획득을 조건으로 제동산업에 불하했다. 우리나라 원양어선 1호였다. 배 이름은 “남쪽으로 뱃머리를 돌려 부(富)를 건져 올리라”는 뜻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지남호(指南號)라고 명명했다.

 

1957년 6월 29일 한국 최초의 원양어선 지남호에서 선원들이 선상 출항식을 열고 있다. (한국원양산업협회 제공)
1957년 6월 29일 한국 최초의 원양어선 지남호에서 선원들이 선상 출항식을 열고 있다. (한국원양산업협회 제공)

역사적인 첫 출항은 1957년 6월 29일 이뤄졌다. 출항 사흘 전 부산항 제1부두의 해양경비대 강당에서 정부 인사와 국회의원, 수산단체 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출어식이 열렸다. 윤정구 선장은 “출어식에서 보내준 격려를 국가의 지상명령으로 알고 기필코 시험조업에 성공하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조선일보는 6월 27일자 기사에서 “이번 출어에서는 200t 내지 300t 어획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외화 12만 불 획득을 예상하고 있다고 한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선장을 포함한 18명의 선원 모두 원양 조업은 처음이었고 참치를 잡아본 경험도 없었다. 원양어선 선장 출신의 미국인 기술자문관 모건이 승선하긴 했으나 허리 부상으로 대만에서 하선했다. 7월 18일 대만 동쪽 해상에서 처음 그물을 던졌으나 허탕만 쳤다. 필리핀과 싱가포르 근해로 옮겨서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연료마저 떨어져 싱가포르에 발이 묶였다. 현지 한국인 무역상에게 2500달러를 빌려 연료를 채우고 식량을 보충한 뒤 인도양으로 향했다.

일본어 ‘마구로’의 한자 훈을 따 참치로 작명

말라카해협을 지나 인도양 북서부 니코바르제도 근해에 이르렀을 때 처음으로 참치를 잡는 데 성공했다. 광복절인 8월 15일 새벽이었다. 그날 어획량은 0.5t에 불과했으나 우리 배와 기술로 대양에서 처음 거둔 성과여서 의미가 각별했다. 보름간 10t가량 잡은 뒤 108일 만인 10월 4일 부산항으로 돌아왔다.

 

‘印度洋(인도양) 漁擄(어로)에 凱歌(개가)’란 제목을 달아 지남호의 귀항 소식을 보도한 1957년 10월 16일자 경향신문.
‘印度洋(인도양) 漁擄(어로)에 凱歌(개가)’란 제목을 달아 지남호의 귀항 소식을 보도한 1957년 10월 16일자 경향신문.

당시 신문들은 ‘六日間(6일간)에 漁獲高(어획고) 四千貫(4천관)’(8월 23일 경향신문), ‘印度洋(인도양) 漁擄(어로)에 凱歌(개가)’(10월 16일 경향신문), ‘삼치 多量漁擄(다량어로) 遠洋船(원양선) 指南號(지남호) 歸航(귀항)’(동아일보 10월 17일) 등의 제목으로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삼치라고 보도했다. 삼치는 고등어과로 다랑어과의 참치와는 다르다. 이 대통령에게 선보인 것도 돛새치과의 청새치였으나 참치로 소개됐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던 물고기여서 혼선이 발생한 것이다. 참다랑어를 일본어로 ‘마구로(眞黑)’라고 하는데, 지남호 선원들이 ‘참 진(眞)자’의 한자 음(音) 대신에 우리말 훈(訓) ‘참’을 쓰고 비늘 없는 생선을 뜻하는 ‘치’를 붙여 ‘참치’란 말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지남호가 잡은 물고기를 보고 싶다고 하자 가장 큰 것을 부산에서 비행기로 긴급 공수해 경무대 뜰에 걸어놓고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당시 우리나라가 외화 획득에 얼마나 목을 맸는지 짐작하게 하는 일화다.

 

1957년 10월 경무대 뜰에 지남호가 잡은 청새치를 세워놓고 대통령실과 지남호 관계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물고기 바로 왼쪽이 이승만 대통령. (한국원양산업협회 제공)
1957년 10월 경무대 뜰에 지남호가 잡은 청새치를 세워놓고 대통령실과 지남호 관계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물고기 바로 왼쪽이 이승만 대통령. (한국원양산업협회 제공)

온 국민 성원 속 본격적으로 상업 조업 시작

지남호가 잡은 물고기 10t 가운데 절반은 노스웨스트 항공편으로 미국에 수출됐다. 이 덕분에 한국 어선도 남태평양 사모아 해역 진출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윤 선장은 1958년 1월 다시 지남호를 이끌고 남태평양으로 향했다. 본격적인 상업 조업의 시작이었다.

훗날 동원그룹을 일군 김재철도 부산수산대(현 부경대)를 갓 졸업한 상태에서 보수도 없이 실습항해사 자격으로 배에 올랐다. 동승한 문제안 한국일보 기자는 “태평양의 거센 파도를 헤치고 남으로 5천 마일이나 달려가 7∼8개월간을 구름과 수평선만을 바라보며 참치잡이를 할 지남호. 더구나 그것이 개인의 영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조국의 경제 재건을 위한 외화 획득이라는 대의명분이 있고, 한국 원양어업사의 첫 페이지를 기록한다는 역사적인 의의가 있다”고 썼다.

당시 외화 획득은 국가적인 지상 과제였고 선원들은 경제 재건에 앞장선 수출 역군이었다. 지남호는 사모아 근해에서 1년여 동안 6차례 출어해 450t의 참치를 잡아 당시로는 거액인 9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국민적 기대에 부응한 것이다.

지남호 성공에 자신을 얻은 제동산업은 1959년 5월 지남2호와 지남3호를 사모아 어장에 추가 투입했다. 고려원양, 오양수산, 사조산업 등도 잇따라 원양어업에 뛰어들었다. 김재철은 지남2호 선장을 거쳐 1969년 동원산업을 창업했다. 윤 선장은 고려원양 부사장과 오양수산 사장을 역임했다.

한때 4천여 명 동포들이 북적거렸던 라스팔마스

1958년부터 1979년까지 우리나라가 원양어업으로 벌어들인 외화는 20억 달러로 이 기간 총수출액의 5%를 차지했다. 1965년부터 1975년까지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모국으로 보낸 1억 153만 달러보다 훨씬 많았다. 1957년 배 한 척에서 20년 뒤 850척으로 늘어났고, 1990년엔 해외 기지가 28곳에 이르렀다.

가장 규모가 큰 곳은 라스팔마스였다. 1970년대에는 한국 어선 250여 척이 북적거렸고 상주 동포가 4천여 명을 헤아렸다. 1979년 라스팔마스 시립묘지에 순직한 한국 선원 묘역을 꾸며 위령탑을 세운 데 이어 2002년 해양부가 납골당을 설치해 117기의 유해를 봉안했다. 125기까지 늘어났다가 일부는 국내로 봉환돼 지금은 83기가 남아 있다. 이곳 말고도 사모아, 피지, 타히티, 수리남 등에 순직 원양 선원 묘지가 있다.

 

2002년 라스팔마스에 들어선 순직 한국인 선원 납골당과 위령탑. (해양수산부 제공)
2002년 라스팔마스에 들어선 순직 한국인 선원 납골당과 위령탑. (해양수산부 제공)

현재는 라스팔마스에 재외국민 476명과 스페인 국적자 285명을 합쳐 761명이 거주하고 있다. 스페인에 처음 개설된 총영사관도 영사관을 거쳐 분관으로 격하됐다. 우리나라 원양업체와 원양어선 수도 급격히 줄어들었고, 선원들도 이젠 동남아 국적자들로 대체됐다.

어선 두 척으로 시작해 8조 원 수산그룹 일군 김재철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은 1935년 전남 강진 태생으로 우리나라 원양어업의 신화를 만든 살아 있는 전설이다. 어선 두 척으로 시작해 국내 최초의 헬리콥터 탑재식 선망어선을 도입하고 참치 통조림을 국내 최초로 출시하는 등 업계를 선도해 연매출 8조 원이 넘는 종합식품수산그룹을 일궜다.

 

1969년 8월 16일 동원산업의 첫 번째 원양어선 제31동원호에서 인도양 출어식이 열리고 있다.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의 34살 때 모습이다. (동원그룹 제공)
1969년 8월 16일 동원산업의 첫 번째 원양어선 제31동원호에서 인도양 출어식이 열리고 있다.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의 34살 때 모습이다. (동원그룹 제공)

한국수산회 초대 회장, 한국원양어업협회장, 한국무역협회장, 장보고기념사업회 이사장, 여수엑스포유치위원장 등을 역임하고 금탑산업훈장, 국민훈장 무궁화장과 모란장, 인촌상, 뉴질랜드·세네갈·일본·칠레·페루·벨기에 정부 훈장, 가장 존경받은 기업인상, 올해의 21세기 경영인 대상 등을 받았다.

장학사업과 기부 활동에도 앞장섰다. 1979년 동원육영재단을 설립해 지금까지 6000명이 넘는 초중고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가 하면 한양대 AI솔루션센터에 30억 원, KAIST에 500억 원, 서울대에 250억 원의 사재를 출연했다. KAIST는 AI대학원 이름을 김재철AI대학원으로 개칭하고 서울대는 김재철AI클래스를 신설했다.

10회 장보고 한상 대상에 권영호 인터불고 회장

지난 9월 28일 전남 완도 청해진스포츠센터에서 열린 제10회 장보고 한상 어워드 시상식에서는 스페인의 권영호 인터불고(IB)그룹 회장이 대상을 받았다. 장보고글로벌재단과 완도군이 제정한 이 상은 대한민국의 경제·문화 영토를 넓히는 데 공이 큰 재외동포 경제인에게 수여하고 있다.

 

9월 28일 전남 완도 청해진스포츠센터에서 열린 제10회 장보고 한상 어워드 시상식에서 권영호 인터불고 회장(왼쪽에서 네 번째)이 대상을 받은 뒤 부인 김천녀 씨(왼쪽에서 다섯 번째) 등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9월 28일 전남 완도 청해진스포츠센터에서 열린 제10회 장보고 한상 어워드 시상식에서 권영호 인터불고 회장(왼쪽에서 네 번째)이 대상을 받은 뒤 부인 김천녀 씨(왼쪽에서 다섯 번째) 등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941년 경북 울진 태생의 권 회장은 1966년 국내 최연소 기관장으로 원양어선을 타기 시작했다. 1971년 대림산업 라스팔마스 주재원으로 부임했다가 1979년 폐선을 앞둔 일본 선적의 300t급 트롤어선 한 척을 구입해 조업에 나섰다. 이듬해 스페인 마드리드에 파나마법인 ‘인터불고(Inter-Burgo) S.A’를 차렸다. 인터불고는 스페인어로 ‘화목한 작은 마을’이란 뜻이다.

앙골라 내전을 뚫고 어장을 개척하는 등 불굴의 의지로 창업 20년 만에 50여 척의 대선단을 꾸렸다. ‘태평양에 김재철이 있다면 대서양에는 권영호가 있다’는 말이 나온 것도 이때였다. 원양어업 말고도 호텔·유통·건설·스포츠레저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해 자산 10조 원대의 그룹으로 키웠으나 2010년 이후 극심한 경영난을 겪으며 호텔인터불고 대구, 경산CC, 호텔인터불고 엑스코 등을 매각했다.

권 회장도 1986년 동영장학재단을 만들어 가난한 학생들을 도왔다. 중국 지린대에 단과대를 설립하는가 하면 200억 원 상당의 경북 칠곡군 임야 74만 평을 대구 계명대에 무상 기증했다. 1993년에는 매각 위기에 놓인 스페인 마요르카의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 유택을 30만 달러에 구입해 우리 정부에 기증하기도 했다. 2003년 유니버시아드대회를 유치한 대구시에 특급호텔이 없다는 말을 듣고 3천억 원을 들여 인터불고호텔을 세웠다. 국민훈장 동백장, 금탑산업훈장, 중국 우의상, 스페인 국민훈장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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