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은 이승만 탄생 150주년이자 서거 60주년
비서이자 동지 프란체스카 도너도 탄생 125주년
한복 즐겨 입고 검소하게 생활해 국민 호감 얻어
대통령 방문객 고르고 면담에 배석해 잦은 마찰도
측근 박마리아 국정 농단은 4·19 혁명의 도화선
7월 19일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서거 60주기다. 그의 기일에 이승만 기념사업회와 광복회 주최로 각각 추도식과 이승만 학술강연회가 열리는 것 말고는 이렇다 할 기념행사가 없다. 지난 3월 26일 이승만 탄생 150주년 기념일에도 ‘우남 이승만, 세기를 넘어 세대를 잇다’란 주제의 기념식과 ‘이승만 탄신 150주년 기념 행진’ 등이 펼쳐졌을 뿐이다.
만일 윤석열 탄핵 결정과 조기 정권교체가 없었다면 리박스쿨을 비롯한 뉴라이트 단체와 관변 단체 등이 이승만을 추모하고 그의 업적을 기리는 행사들로 올 한 해 내내 떠들썩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올해 탄생 125주년을 맞는 부인 프란체스카 도너를 재조명하는 움직임도 볼 만했을 것이다.
이승만 찬양이 무산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이승만 부부의 공과를 제대로 따져 재평가하는 일은 필요하다. 더욱이 프란체스카는 대통령 부인을 넘어 동지이자 비서 역할을 하며 이승만 당선 과정은 물론 국정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대중에게 제대로 알려진 적이 거의 없다.
첫 결혼 실패하고 동양의 한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프란체스카는 1900년 오스트리아 빈 교외에서 유대인 사업가 루돌프 도너의 세 딸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아들이 없던 아버지는 영리한 셋째딸이 가업을 잇기를 원해 영국 스코틀랜드로 유학을 보냈다. 영어 통역사와 타자·속기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1920년 독일의 자동차경주 선수 헬무트 뵈룅과 결혼했으나 3년 만에 이혼했다.
이승만을 처음 만난 것은 1933년 2월 21일 스위스 제네바의 드라뤼시 호텔 식당에서였다. 프란체스카는 어머니와 여행 중이었다. 임시정부 전권대사이던 이승만이 이곳을 찾은 목적은 국제연맹 총회에 대한민국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 한편 회원국 대표들과 기자들을 만나 일본의 만주 침략을 규탄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식당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이승만은 지배인 안내로 프란체스카 모녀가 앉은 4인용 식탁에 동석함으로써 운명적인 만남이 이뤄졌다. 프란체스카는 정장을 차려입은 중년의 동양 신사가 감자 2개, 절인 배추, 소시지만 주문한 것을 보고 놀랐다. 당시 유럽을 방문하는 동양 귀족들은 호화판 식사를 즐기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호기심이 생긴 프란체스카는 여성이 남성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는 당시 관행을 깨고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물었다. 코리아라는 대답이 돌아오자 예전에 읽은 글이 생각나 “코리아에는 아름다운 금강산이 있고 양반들이 산다죠?”라고 말했다. 이승만은 깜짝 놀라며 반가워했다. 그때만 해도 코리아를 아는 유럽인은 매우 드물었다.
25살 나이 차, 독립운동 진영 반대까지 무릅쓴 국제결혼
이튿날 아침 프란체스카는 이승만 인터뷰 기사가 실린 현지 신문을 스크랩해 이승만이 묵던 호텔 방으로 전해줬다. 이승만은 답례로 차를 대접했다. 그때부터 둘은 가까워져 제네바에서 몇 차례 더 만났다. 각각 오스트리아와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편지를 주고받다가 7월 초 빈에서 다시 만나 장래를 약속했다. 프란체스카 어머니는 미래가 불투명하고 25살이나 연상인 동양인과의 결혼을 반대했다.
프란체스카는 어머니 반대를 무릅쓰고 1934년 초 미국으로 건너가 10월 8일 미국 뉴욕의 몽클레어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승만의 오랜 친구 윤병구 목사와 존 헤인즈 홈즈 박사가 주례를 맡았다. 프란체스카는 재혼이었고 이승만은 모국에 부인을 둔 중혼(重婚)이었다. 1891년 중매를 통해 한 살 아래의 박승선과 결혼했으나 종교 문제로 갈등을 겪다가 첫아들을 사산했고, 둘째 봉수마저 8살 때 디프테리아로 숨지자 사이가 멀어졌다. 1912년 이승만이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사실상 결별했다.(1948년 대통령 취임 당시에도 이승만의 법적 부인은 박승선이었다. 이승만은 혼인 무효소승을 거쳐 1949년 박승선의 호적을 말소하고 이듬해 프란체스카와 혼인 신고를 마쳤다. 박승선은 한국전쟁 때 북한군에게 사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로서는 재미동포 사이에서도 국제결혼이 파격적인 일이었다. 중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진영에서도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와이의 동지들은 이승만을 초청하며 “서양 부인을 데리고 오면 모든 동포가 돌아설 테니 꼭 혼자만 오라”고 부탁했다. 이승만은 당부를 어기고 프란체스카를 대동했다. 하와이 동포들은 우려와 달리 궁금증을 참지 못해 1000명이나 모였다.
국제 감각과 외국어 능력 등으로 남편 도와
독립운동가나 정치인들이 프란체스카 이름 뒤에 여사를 붙여 예우하지 않고 호주댁이라고 부른 것도 만만하게 여긴 탓이다. 프란체스카의 출신국 오스트리아를 발음이 비슷한 오스트레일리아와 헷갈린 것은 이승만의 대통령 취임 이후로도 이어졌다. 6·25 전쟁 당시 유엔군 소속 전투기 가운데 호주에서 파견한 F-86 세이버, F-80 슈팅스타, 글로스터 미티어 등을 통틀어 호주기라고 불렀다. 일부 한국인은 이들 비행기가 프란체스카 친정 국가에서 보내준 것이라며 고마워하기도 했다.
프란체스카는 세련된 매너와 국제 감각, 뛰어난 외국어 구사 능력, 타자와 속기 실력 등으로 남편의 저술, 강연, 네트워크 형성 등에 큰 도움을 줬다. 이승만은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이 일어나기 6개월 전에 미국과 일본의 충돌을 예견한 저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로 명성을 얻었다. 이 책은 프란체스카의 손끝에서 탄생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프란체스카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이승만 부부는 1945년 10월에 한국에 들어와 돈암장과 이화장에서 살다가 1948년 8월 대통령 취임과 함께 청와대의 옛 이름인 경무대로 이사했다. 혼인 신고와 함께 호적에 기재된 이름은 프랜시스카 또나였다. 리푸랜세스카, 프란체스카 도너 리 등도 혼용했다. 이승만이 지어준 한국식 이름은 프란체스카의 앞 두 글자와 비슷한 발음의 이부란(李富蘭)이었다. 이금순이라는 이름도 함께 썼다.
프란체스카는 경무대 안주인이 된 뒤에도 한국의 전통적인 부인상에 걸맞게 남편에게 깍듯한 태도를 지키고 망명 시절 몸에 밴 검소한 생활습관을 지켜 국민의 호감을 샀다. 양아들 이인수 교수가 사준 양산은 30년간 버리지 않았고 1949년 장제스 중화민국 총통이 선물한 냉장고를 35년이나 썼다고 한다. 금성사가 에어컨을 선물하자 전력 낭비가 심하다며 돌려보냈다는 일화도 있다.
프란체스카는 6·25가 터지자 영어·불어·독어 3개 국어로 비밀 외교문서를 작성하는가 하면 수백 통의 편지를 써서 전쟁의 참상을 알림으로써 국제사회의 동정적 여론을 끌어냈다고 한다. 유럽의 은행가들에게 나라의 궁핍한 사정을 호소해 경제 원조를 받도록 다리를 놓기도 했다.
영어 통하는 사람들에게만 의존한 국정 개입
반면에 검소한 태도가 인색한 성격에서 비롯됐다는 평가도 있다. 이승만 비서실장 윤치영의 공보비서로 돈암장을 드나들었던 최기일에 따르면 이승만 생일 때 쇠고기·닭고기·오리고기 등이 선물로 들어왔는데, 프란체스카 측근들은 “많아서 다 먹지 못하니 주변에 나눠주라”고 권했으나 거절하고 보관하다가 음식이 상해서 내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대통령과의 면담을 원하는 방문객들을 선별하는 역할을 하고 주요 면담에 배석해 비서진과 마찰을 빚었다. 장택상 외무부 장관도 프란체스카의 과잉 내조에 불만을 털어놓았다. 좌우 합작운동을 벌이다가 전향해 이승만을 찾아온 안재홍은 프란체스카에게 문전축객을 당하다시피했다. 최기일은 “안 선생이 푸대접 받고 돌아가는 걸 보고 같은 조선 사람으로서 분한 마음이 들었다”고 증언했다.
내각 인사에 개입하기도 했다. 프란체스카는 여성운동가이자 교육자인 임영신 초대 상공부 장관이 이승만과 불륜 관계였다는 소문을 듣고 해임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이승만이 미국 캘리포니아대에 유학 중이던 임영신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일이 있었는데 와전된 것이다. 1950년대 후반에는 치매 증세를 보이는 고령의 이승만을 대신해 여러 국정 현안을 결정하기도 했다.
프란체스카는 김치와 고추장을 담그는 법을 배워 남편과 동포들을 기쁘게 했다고 한다. 공식 행사에는 한복도 즐겨 입었다. 그러나 언어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는 그가 정작 한국어를 제대로 배울 생각은 하지 않은 모양이다. 한글 휘호를 남기긴 했으나 말년에 이르러서도 거의 영어로 대화했다.
정권의 말로 재촉한 박마리아와의 밀착
이 때문에 주변 사람의 조언이나 직언을 폭넓게 듣지 못하고 영어로 대화할 수 있는 일부 측근에만 의존하는 결과를 낳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기붕 비서의 부인 박마리아였다. 프란체스카가 한국에 들어온 직후에는 윤치호의 딸 윤노라가 시중을 들다가 박마리아와 윤치영 부인 이은혜가 그 일을 맡았다.
프란체스카는 양반 가문 출신으로 도도한 기질의 이은혜를 부담스럽게 여긴 반면 싹싹하고 궂은일 마다하지 않는 박마리아를 편애했다. 박마리아는 감리교 정춘수 목사 집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던 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란 뒤 정 목사와 선교사 등의 도움으로 미국 밴더빌트대에 유학까지 다녀왔다.
박마리아는 프란체스카의 신임을 발판으로 이화여대 문리과대 학장과 부총장, 한국YWCA(여자기독교청년회) 회장, 이화여대 동창회장 등을 역임하며 교육계와 여성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기붕이 경무대 비서실장과 서울시장을 거쳐 민의원 의장, 부통령 등으로 승승장구하며 이승만 후계자로 부상한 것도 프란체스카를 등에 업은 부인 덕이었다.
“이기붕이 자식 팔아 출세하려 한다”
이기붕·박마리아 부부는 1957년 장남 이강석을 자식이 없는 이승만·프란체스카 부부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세간에는 “이기붕이 자식 팔아 출세하려고 한다”는 말이 돌았다. 당시 민법상 장남은 다른 사람의 양자가 될 수 없어 법적으로 무효였다. 또 전주이씨 항렬로 따지면 이강석은 이승만의 손자뻘이어서 이기붕이 이승만 양자로 들어가든가 이강석이 8살 때 숨진 이봉수 양자로 들어가는 게 순리였다.
박마리아의 국정 농단은 민심을 부글부글 끓게 만들었다. 여기에다가 부정선거를 통해 이기붕을 무리하게 부통령에 당선시키려는 이승만 정권의 시도가 4·19 혁명을 불렀다. 성난 시위대는 당시 서대문 경무대로 불리던 이기붕 집으로 몰려가 불을 질렀다. 이 집터에는 4·19 혁명 기념회관과 4·19 혁명 기념 도서관이 들어섰다.
이강석은 4월 28일 친부모와 동생 이강욱을 모두 총으로 쏴죽인 뒤 자살했다. 이기붕 부부의 음독설, 이강석 타살론 등도 제기됐으나 진상은 미궁에 빠졌다. 이기붕 일가족의 불행한 파국도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프란체스카의 국정 개입과 비선 정치에 닿아 있다.
이승만은 4월 26일 하야하겠다고 발표하고 이틀 뒤 프란체스카와 함께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돌아갔다. 이곳에서 한 달간 지내다가 5월 29일 미국 하와이로 함께 출국했다. 동포 유지인 최백렬, 오중정, 윌버트 최 등의 도움으로 빌라에 머물렀다가 건강이 악화해 하와이 요양병원으로 거처를 옮긴 뒤 1965년 7월 19일 90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프란체스카는 남편을 떠나보낸 뒤로도 하와이에서 거주하다가 한국 외무부 장관이 발급한 특별 여권을 소지하고 고향인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친정 언니와 동생 집을 전전했다. 1970년 5월 16일 귀국해 이인수 명지대 교수 부부와 이화장에서 조용히 살았다. 일요일마다 정동제일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매주 이승만 묘소에 참배하는 것이 주요 일과였다.
권력자 부인의 착각과 불통이 빚은 한국사의 비극
프란체스카는 1992년 3월 19일 세상을 떠나 정동제일교회에서 영결예배를 치른 뒤 국립서울현충원의 남편 곁에 안장됐다. 이인수 교수 부인이자 중앙일보 초대 스위스 특파원을 지낸 며느리 조혜자 씨에게 남긴 유언은 “틀니를 끼워주고 태극기로 나를 덮어 달라. 성경책을 무덤에 꼭 넣어 달라”는 것이었다. 2012년에는 한국-오스트리아 우호의 상징으로 2㎞에 이르는 오스트리아 빈 한인문화회관 앞의 오솔길을 ‘프란체스카 도너 리의 길’로 명명했다.
그는 저서 ‘이승만 대통령의 건강-프란체스카 여사의 살아온 이야기’와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6·25와 이승만’를 남겼다. 조혜자 씨가 우리말로 옮긴 이들 책에는 조국을 끔찍이 사랑하는 이승만의 모습과 그런 남편을 극진히 보살피려는 프란체스카의 애정이 가득 담겨 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이승만의 권력욕과 오만은 현대사의 비극을 낳았다. 그 비극의 이면에는 ‘남편이 최고’라고 여기고 자신과 대화가 통하는 사람의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인 프란체스카의 착각과 불통이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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