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민낯 폭로 위해 '배신자' 자임
혁명의 꿈 실패했지만 영국의 변화 이끌어
평생 동지 마르크스와 '공산당 선언' 작성
영국 노동운동 조용히 지원한 숨은 조력자
부르주아 도련님의 위험한 산책
1842년 11월 스물두 살 독일 청년이 맨체스터에 도착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 라인란트 지방 부유한 방직공장 주인의 장남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영국 지사로 보내 사업수완을 익히게 하려 했다. 그런데 이 도련님, 낮에는 회계장부를 들여다보다가도 밤만 되면 빈민가로 향했다.
가이드는 아일랜드 출신 여공 메리 번스(Mary Burns, 1821~1863)였다. 그는 메리와 함께 리틀 아일랜드라 불리는 빈민촌을 누볐다. 하수구 넘치는 골목, 지하실에 10명씩 우글거리는 방, 다섯 살 아이가 방적기 밑을 기어 다니는 공장. 엥겔스는 자기 집 공장에서 돈을 벌면서, 그 돈이 어디서 나오는지 똑똑히 봤다.
1845년 폭탄선언, "영국놈들아, 이게 너희 나라다"
3년간의 현장조사 끝에 나온 책이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다. 스물다섯 살 청년이 쓴 이 보고서는 산업혁명의 찬란한 신화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맨체스터 빈민가 평균 수명 17세. 부유층 거주지는 38세.' 통계는 냉정했다. 엥겔스는 노동자들이 사는 지하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측정했다. "환기구도 없는 방에 7명이 잔다. 변소는 200명이 공동 사용한다. 창문이 없어 촛불 없이는 대낮에도 보이지 않는다."
영국 지배층은 발끈했다. "우리가 세계 최강국 아닌가? 증기기관차가 달리고 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솟구치는데, 무슨 헛소리냐?" 하지만 숫자는 거짓말하지 않았다. 1840년대 맨체스터에서 태어난 아이 둘 중 하나는 다섯 살 전에 죽었다. 이게 '대영제국의 영광'이었다.
더 충격적인 건 고발자가 바로 공장주의 아들이라는 사실이었다. 계급 배신자, 부르주아의 배반자. 엥겔스는 자기 계급에게 등을 돌렸다.
마르크스 만나 역사적 듀오 결성
1844년 파리 카페. 엥겔스는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와 마주 앉았다. 둘은 10일간 대화했고, 평생의 동지가 됐다. 마르크스가 도서관에 박혀 사는 이론가라면, 엥겔스는 공장 현장을 아는 실무자였다.
마르크스가 돈 한 푼 없이 쪼들리는 동안, 엥겔스는 맨체스터에서 월급 받으며 친구를 먹여 살렸다. "자네는 혁명 이론을 완성하게. 내가 자본가 노릇해서 돈 대줄 테니." 세상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후원 관계였다. 엥겔스는 20년간 아버지 공장에서 일하며 마르크스에게 송금했다. 마르크스는 그 돈으로 〈자본론〉을 썼다. 자본주의를 무너뜨릴 이론서를, 자본주의가 벌어준 돈으로 쓴 셈이다.
1848년 유럽을 뒤흔든 24쪽짜리 팸플릿
둘이 함께 쓴 〈공산당 선언〉이 나왔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첫 문장부터 섬뜩했다. "지금까지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선언문은 칼날 같았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마지막 외침이 유럽을 휩쓸었다. 1848년 혁명의 불길이 파리, 베를린, 빈을 태웠다. 영국도 들썩였다. 차티스트 운동이 절정에 달했다. 지배층은 공포에 떨었다. "저 독일놈들이 우리 노동자들을 선동하고 있다!"
엥겔스는 독일로 돌아가 혁명에 직접 참여했다. 총까지 들었다. 하지만 1849년 혁명은 실패했고, 그는 다시 영국으로 도망쳤다. 20년 동안 맨체스터 공장에서 '이중생활'이 시작됐다. 낮에는 양복 입고 자본가 행세, 밤에는 혁명 논문을 썼다.
모순 덩어리, 승마하는 혁명가
엥겔스의 삶은 모순투성이였다. 여우 사냥을 즐겼다. 영국 귀족들이나 하는 취미였다. 고급 와인을 마셨다. 승마 실력은 일류였다. 사교모임에 나가 자본가들과 어울렸다. 그러면서 노동자 혁명을 외쳤다.
비판자들이 냉소했다. "입으론 평등, 몸으론 귀족이네." 엥겔스는 대꾸했다. "내가 부르주아로 사는 이유는 부르주아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다. 적의 돈으로 적을 치는 게 뭐가 나쁜가?"
실제로 그는 이중생활을 철저히 유지했다. 정식으로 결혼한 부인은 없었지만 메리 번스, 그가 죽은 뒤엔 동생 리지 번스(Lizzie Burns, 1827~1878)와 살았다. 둘 다 노동자 계급 출신이었다. 결혼은 부르주아 제도라며 거부하다가, 리지가 죽기 직전 병상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가 유일하게 제도에 굴복한 순간이었다.
동지 마르크스 죽고 홀로 남아 〈자본론〉 완간
1883년 3월 14일 마르크스가 런던에서 숨졌다. 엥겔스는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읽었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가 떠났다." 그는 홀로 남았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마르크스가 미완성으로 남긴 〈자본론〉 2권, 3권을 정리해 출간했다. 친구의 유고를 10년 넘게 붙들고 씨름했다. 마르크스의 악필 때문에 고생했다는 후문이다. "자네 글씨는 암호문이야." 엥겔스가 평소 투덜댔던 말이다.
1870년 런던 이주 후 그는 영국 노동운동의 숨은 조력자가 됐다. 제1차 국제노동자협회(1864~1876)에서 활동하며 영국 노동조합을 지원했다. 직접 나서지는 않고 뒤에서 조언하고 돈을 댔다. 10시간 노동법, 선거권 확대운동에 그의 사상이 스며들었다.
1895년 8월 바다로 돌아간 혁명가
엥겔스는 후두암으로 쓰러졌다. 말도 못하고 글도 못 썼다. 평생 글 쓰고 떠들던 사람이 입을 다물어야 했다. 1895년 8월 5일, 일흔다섯 살로 런던에서 눈을 감았다.
유언대로 시신은 화장했고 유골은 이스트본 앞바다에 뿌려졌다. 국가도, 종교도, 무덤도 거부했다. 철저한 유물론자답게 자연으로 돌아갔다. 장례식에는 수백 명의 노동자가 모였다. 자본가의 아들이 아니라 노동자의 벗으로 배웅 받았다.
영국이 받은 가장 쓴 선물
엥겔스가 영국에 남긴 건 뭘까?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변화는 일어났다. 20세기 영국 노동당(1900년 창당) 탄생, 복지국가 건설, 국민의료보험 체계. 모두 그가 폭로한 자본주의 모순에 대한 응답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엥겔스가 가장 증오한 영국 자본주의는 그의 비판을 받아들여 스스로를 개혁했다. 혁명 대신 개혁을 선택했다. 어쩌면 엥겔스가 바란 건 혁명 그 자체가 아니라, 노동자가 인간답게 사는 세상이었는지 모른다.
부잣집 도련님이 빈민가를 걷다가 세상을 바꾼 사상가가 됐다. 계급을 배신하고 인간을 선택했다. 자본가의 돈으로 자본주의를 비판했다. 이보다 더 통쾌한 복수가 있을까?
2025년 오늘, 불안정 노동과 양극화가 심화되는 시대. 엥겔스가 180년 전 맨체스터에서 목격한 풍경이 또 다시 재현되고 있다. 그가 던진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게 나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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