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하듯 대영제국 도서관 파묻혀 연구
영국서 출간되고도 영어 번역은 사후에
꿈꾸던 혁명은 안 일어났지만 씨는 뿌려
절친 엥겔스의 추모대로 이름 길이 남아
금융위기 이후 '자본론' 불티나게 팔려
독일 라인란트의 유대계 변호사 집안에서 태어난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는 평생 돈 걱정을 하며 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궁핍한 망명객이 쓴 책이 세계 경제체제를 뒤흔들 줄은, 당시 대영박물관 열람실에서 코를 골며 졸던 사서들도 몰랐을 것이다.
환영받지 못한 손님, 그러나 떠날 수 없었던 도시
마르크스는 1849년 유럽 대륙에서 연달아 쫓겨난 끝에 런던에 도착했다. 프랑스에서는 신문을 폐간 당했고, 벨기에에서는 추방당했으며, 독일로 돌아갔다가 다시 쫓겨났다. 프랑스혁명 이후 온갖 혁명가들을 품어온 나라답게, 영국은 그를 추방하지는 않았다. 다만 환영하지도 않았다. "오시게, 하지만 조용히 계시게"라는 영국식 냉대였달까.
그는 런던 소호지역 딘가(홍등가) 28번지의 지독한 빈민가 다락방에서 일곱 자녀 중 넷을 어린 나이에 잃었다. 가재도구는 압류 당하고, 외상술집 주인에게 쫓기며, 전당포를 드나들었다. 아내 제니 폰 베스트팔렌(Jenny von Westphalen, 1814~1881)는 몰락한 귀족 집안 출신이었지만, 런던 뒷골목에서 남편의 낡은 바지를 기워 입히며 살았다.
이 와중에도 마르크스는 매일같이 출근하듯 대영박물관 열람실로 향했다.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꼬박꼬박.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성실한 백수였는지도 모른다. 집에 가면 빚쟁이와 배고픈 자식들이 기다리는데, 도서관만큼 좋은 피난처가 어디 있었겠는가. 게다가 난방비도 공짜였다. (이것은 지금도 그렇다)
산업혁명의 심장에서 자본론을 쓰다
마르크스가 런던에 정착한 시기는 절묘했다. 1850년대 영국은 세계의 공장이었다. 맨체스터의 방적공장에서는 열 살짜리 아이들이 하루 14시간씩 일했고, 템스강은 공장 폐수로 시커멓게 썩어갔다.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 1819~1901)은 화려한 궁전에서 차를 마셨지만, 런던 뒷골목에서는 사람들이 콜레라로 죽어갔다. 1858년 여름 발생한 템스강 폐수로 인한 '대악취 사건(Great Stink)' 때는 의회가 문을 닫을 정도였다.
마르크스는 이 모든 것을 봤다. 아니, 그 한가운데서 살았다. 절친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는 맨체스터에서 아버지의 방직공장을 운영하며(!) 자본가 행세를 하면서도 노동자의 비참한 실상을 기록으로 남겼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책을 쓰는데 자본가의 돈으로 먹고 살았으니, 이것이야말로 변증법적 모순 아닌가.
대영박물관 열람실에서 마르크스는 영국 정부가 발행한 공장 조사보고서들을 탐독했다. 아동 노동, 작업장 안전, 노동시간에 관한 방대한 통계들. 역설적이게도 자본주의의 심장부는 스스로의 죄상을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영국 관료들의 꼼꼼함이 훗날 자본주의 비판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줄이야.
영국이 마르크스를 만들었나, 마르크스가 영국을 바꿨나
독일어로 된 〈자본론〉 초판이 1867년에 출간됐지만, 정작 영어 번역본은 20년 뒤인 1887년에야 나왔다. 영국인들은 자기네 땅에서 쓰인 책을 독일어로나 읽을 수 있었다니, 이 또한 웃픈 아이러니다. 번역본이 나왔을 때 마르크스는 이미 죽고 없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살아 움직였다. 1889년 런던 부두노동자들의 대파업은 영국 노동운동사의 분기점이 되었다. 성냥공장 여공들이 들고 일어났고, 가스노동자들이 파업했다. 마르크스가 직접 조직한 '국제노동자협회'(1864년 창립)는 비록 오래가지 못했지만, 씨앗은 뿌려졌다.
1906년 영국노동당이 창당됐다. 물론 노동당은 마르크스주의 정당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독교 사회주의와 페이비언주의의 온건한 혼합물이었다. 하지만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대표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마르크스가 평생 주장한 바로 그것 아니었던가.
복지국가라는 타협
1945년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Attlee, 1883~1967) 정부는 국민건강보험제도를 만들었다.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은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복지국가 구호를 "사회주의적"이라 비난했지만,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웅 처칠도 선거에서는 졌다. 영국 국민들은 선택했다.
마르크스가 꿈꿨던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영국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 어딘가에서 타협점을 찾았다. 노동자들은 투표권으로 자신들의 몫을 챙겼고, 자본가들은 세금을 내고 노동조합을 인정했다. 완벽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19세기의 야만적 자본주의는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이를 '부르주아지의 기만'이라 불렀을까? 아니면 '노동계급의 승리'라 불렀을까? 우리는 알 수 없다. 그가 본다면 아마도 "아직 멀었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유령은 죽어서도 배회하리
마르크스는 1883년 3월 14일 런던 하버스탁 힐의 초라한 집에서 책상에 앉은 채 숨을 거뒀다.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은 11명. 그의 친구 엥겔스는 추도사에서 "그의 이름은 세기를 통해 살아남을 것"이라 했지만, 당시 타임스지는 부고조차 싣지 않았다. 런던 경찰의 감시 보고서만이 그의 죽음을 기록했다. "위험한 혁명가 마르크스, 사망."
하지만 20세기가 되자 상황은 달라졌다. 러시아에서는 레닌(Vladimir Lenin, 1870~1924)이 혁명을 일으켰고, 중국에서는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이 권력을 잡았다. 마르크스의 얼굴은 붉은 깃발에 새겨졌고, 그의 이름은 절반의 세계를 뒤덮었다.
영국은 다른 길을 택했지만, 마르크스의 흔적은 곳곳에 남았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자본론〉은 영국에서 다시 불티나게 팔렸다. 하이게이트 묘지에 있는 그의 거대한 묘비 앞에는 관광객들이 줄을 섰다. 무덤 입장료가 6파운드라는 사실이 또 하나의 풍자다. 자본주의를 비판한 남자의 무덤조차 상품이 되었으니.
결론을 대신하여
마르크스는 영국에서 환대받지 못했지만, 영국 없이는 마르크스도 없었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의 도서관에서, 가장 방대한 자료를 접하며, 가장 철저한 비판을 썼다.
오늘날 런던 금융가 시티에서는 여전히 초단위로 천문학적 돈이 오간다. 그리고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는 푸드뱅크 앞에 줄이 늘어선다. 마르크스가 살던 19세기와 얼마나 다른가?
그가 대영 박물관 열람실 책상에 남긴 흠집은 이제 없다지만, 그가 세상에 남긴 흠집은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어쩌면 영원히.
"철학자들은 세계를 여러 가지로 해석해 왔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 칼 마르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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